출판계의 불황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개인 미디어산업이 주체로 등장하는 등 아예 미디어산업의 구조 자체가 재편되는 가운데 출판사들은 기존의 비즈니스 모델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그런 가운데 최근에 일본을 대표하는 출판사의 하나인 ‘카도카와(KADOKAWA : 角川書店)’의 새로운 사업모델이 주목을 받고 있다. 카도카와는 2020년 11월 디지털과 인공지능 테크놀로지를 갖춘 출판 물류 및 오피스 거점 시설을 기반으로 도서관, 박물관, 미술관, 호텔, 카페, 레스토랑, 신사까지 한 데 어우러진 복합 문화공간을 탄생시켰다. 쇠퇴해가는 지역과 생존 위기에 처한 출판사가 손을 잡고 만들어낸 이 공간의 성공 여부는 향후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위기에 처한 출판사와 쇠퇴한 배드 타운이 손잡다
1945년 창업한 카도카와는 일본을 대표하는 출판사로 초기에는 문학작품을 그리고 1970년대 후반부터는 잡지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0년대부터 영화 및 애니메이션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애니메이션 콘텐츠를 보유하기 시작했고 이를 기반으로 영상 비즈니스 업계를 견인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출판 시장의 불황과 함께 카도카와는 비즈니스 모델의 재편을 도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카도카와는 2020년 11월 사이타마현(埼玉県)의 도코로자와(所沢市)에 ‘도코로자와 사쿠라 타운(所沢サクラタウン)’이라는 대형 복합 문화시설을 오픈했다.
카도카와는 어떻게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도코로자와 사쿠라 타운’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됐을까? 그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도코로자와라는 지역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80년 전후로 버블 경기가 절정에 달하면서 도쿄 도심의 부동산 가격은 하루가 다르게 폭등했다. 그러자 샐러리맨들은 도쿄 도심의 좁은 임대 아파트의 삶에서 벗어나 교외에 마이 홈을 찾기 시작했고, 그러한 니즈와 함께 세이부(西武SEIBU) 그룹은 사이타마현 도코로자와에 배드 타운 개발을 추진하게 된다. 그리고 도코로자와는 젊은 부부들의 삶의 터전으로 잡게 됐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40년이 지난 지금 도코로자와에는 당시 젊었던 부부들이 모두 60세가 훌쩍 넘은 나이가 됐고, 자녀들은 모두 지역을 떠나면서 도코로자와는 저출산 고령화의 대표적인 지역으로 남게 됐다.
이러한 인구 감소의 흐름 속에서 도코로자와는 노후화된 지역을 재생시켜 새로운 지역만들기를 도모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때, 도코로자와에 새로운 물류거점을 찾고 있던 카도카와 측에서 도코로자와에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복합 문화 공간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카도카와는 도코로자와에 있는 자신들의 물류 시설이 노후화됨에 따라 이 시설을 허물고 새롭게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인공지능 등의 혁신적인 테크놀로지 기능을 갖춘 물류 및 오피스 거점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이왕에 새로운 시설을 만드는 것이라면, 카도카와가 중기 계획으로 추진하고 있는 프로젝트인 ‘쿨재팬 포레스트 계획(Cool Japan Forest Plan)’, 즉 생산 및 물류, 도서관, 미술관, 박물관을 융합한 문화 시설을 만드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부지를 찾던 가운데 카도카와는 도코로자와가 시의 정화조 설비 시설 토지를 매각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도코로자와에 자사가 추진하고 있는 쿨 재팬 포레스트 계획을 설명, 도코로자와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카도카와는 문화 콘텐츠와 출판 서적들을 집합시킨 복합 문화 시설을 구현시켜 나갔고 그 결과물로 완성된 것이 ‘도코로자와 사쿠라 타운’이다.
복합문화공간 - 도코로자와 사쿠라 타운
도코로자와 사쿠라 타운은 어떤 곳일까? 먼저, 도코로자와 사쿠라 타운에서 가장 주목할 곳은 바로 ‘카도카와 무사시노 뮤지엄(角川武蔵野ミュージアム)’이다. 카도카와 무사시노 뮤지엄은 미술관과 박물관, 도서관으로서의 기능을 모두 수용하면서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새로운 형태의 뮤지엄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 쿠마켄고(隈研吾)의 작품답게 우선 건물의 외관부터 상당한 아우라를 드러낸다. 성벽 같기도 하고 형태를 예측하기 힘든 운석 덩어리 같기도 한 거대한 건물의 외부를 감상한 뒤 내부에 들어섰다면, 우선 4층으로 올라가 이곳의 가장 상징적인 높이 8m의 거대한 책장으로 둘러싸인 공간 즉 ‘혼다나 게키조(本棚劇場、 책장 극장)’를 둘러 볼 것을 권한다. 책이 주인공인 이 책장 극장에는 카도카와에서 출판된 서적 및 잡지뿐만 아니라 저명한 작가들의 장서 등 약 3만 권이 진열돼 있다. 실제로 이 공간의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이 곳은 책장의 영역을 넘어 예술 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 곳에서 책을 골라 읽기도 하고, 또는 독특한 공간이 주는 즐거움을 즐긴 후에는 박물관 안의 박물관으로 불리는 ‘EJ 애니메이션 박물관’을 둘러보는 것도 좋다. EJ는 ‘Entertainment Japan’의 약자로, 카도카와가 일본의 자부심인 애니메이션을 ‘쿨 재팬(Cool Japan)’ 전략의 하나로 활용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만들었다. 이 박물관에서는 풍부한 창의력을 바탕으로 제작된 다양한 애니메이션 작품을 볼 수 있어서 그야말로 애니메이션 매니아 층에게 인기가 많은 공간이다.
카도카와는 ‘책’을 주제로 한 뮤지엄의 연장선상에서 직영으로 ‘다빈치 스토어’라는 서점도 운영하고 있다. 이 서점은 ‘발견과 연상’이라는 콘셉트를 기반으로 약 4만 권의 장서를 판매하고 있으며, 작은 전시들과 체험이 어우러진 미래형 서점이다.
애니메이션 세상 - EJ아니메 호텔
도코로자와 사쿠라 타운에는 호텔 역시 특이하다. ‘EJ아니메(애니메이션) 호텔’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의 스토리 속에서 잠을 잔다는 콘셉트 아래에, 애니메이션, 게임, 만화, 영화, 특수 촬영 등 다양한 콘텐츠를 기반으로 연출한 호텔이다. 객실은 모두 작품들과 컬래버레이션으로 만들어졌다. 총 33실의 모든 객실에는 애니메이션 콘텐츠를 즐길 수 있도록 150인치의 대형 화면 프로젝터 및 3D 고음질의 사운드, 다양한 색상과 밝기로 빛을 발하는 Hue 조명이 설치돼 있어, 숙박하는 고객들은 자신이 원하는 영상의 세계에 몰입할 수 있다. 또한 객실의 종류는 스탠다드 타입 외에도, 일본식 다다미 타입의 방, 세미 스위트와 스위트 룸 등이 있다.
호텔의 로비에는 대형 스크린이 설치돼 있어, 숙박객들은 카도카와의 최신 작품을 즐길 수 있고,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는 팬들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분장하고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색상과 질감이 다른 소재로 인테리어가 돼 있다. 호텔 내의 레스토랑인 티암(Tiam)은 애니메이션 작품과 협업한 메뉴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활용한 파티와 웨딩 행사 서비스 메뉴도 제공한다.
엘리베이터의 안내 방송을 애니메이션 인기 성우인 오자키 유우키(梶裕貴)에게 부탁했다는 점도 특이하다. 애니메이션 마니아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오자키의 목소리를 엘리베이터 방송에 담아 투숙객들이 엘리베이터에 타는 순간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세계에 빠져 드는 즐거운 서프라이즈를 제공한다.
쿨 재팬 이미지를 담은 신사
일본에서 가장 신성시 되는 공간을 꼽으라면 단연 신사를 들 수 있다. 그리고 그 신사의 모습은 기와지붕, 오래된 나무 기둥 등 대게 비슷한 형태를 띄고 있다. 그러나 도코로자와 사쿠라 타운에 건립된 ‘무사시노 레이와 신사’는 필자가 일본에서 본 곳 중 가장 쿨한 신사였다. 현대적이다 못해 미래에서 온 듯한 세련된 건축 형태를 하고 있지만, 신사 입구인 도리이, 손을 씻는 테미즈야(手水舎)부터 기도를 올리는 혼덴(本殿)까지 신사의 형식은 모두 갖추고 있었다.
알고 보니 현재 일본의 연호인 레이와를 고안한 국문학자, 나카니시 스스무(中西進)가 신사의 이름을 지었고, 역시 쿠마켄고가 건축 설계를 담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신사 앞에 흐르는 물을 연출한 것은 이 곳이 원래 정수처리장이었던 점을 고려한 것이라고 하니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잊는 시도가 잘 어우러진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쿄 도심에서 이곳까지는 자동차로 1시간 남짓 소요된다. 고속도로에서 내려서 도착하기 전까지 이어지는 마을길을 통과하다 보면 이곳에 세련되고 쿨한 복합 문화 공간이 있을 것이라는 상상이 어려울 정도로 도코로자와 사쿠라 타운의 주변은 아주 평범하고 작은 마을이다. 하지만 바로 이 곳에 쿨 재팬(Cool Japan)이라는 국가 문화전략, 출판사의 소멸 위기라는 시대의 변화에 대처하는 기업의 생존전략, 그리고 인구 감소로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지역의 재생전략까지, 이 세 가지를 동시에 구현하고자하는 원대한 목표를 가진 공간이 펼쳐졌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선 무수한 지역들과 기업들에게 이곳이 또 다른 희망이 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사진 출처_ https://tokorozawa-sakuratown.jp
전복선 Tokyo Correspondent 럭셔리 매거진 ‘HAUTE 오뜨’ 기자, KBS 작가 호텔 농심 마케팅 파트장을 지낸 바 있으며 현재 도쿄에 거주 중으로 다양한 매체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