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태양과 라틴 문화이다. 따뜻한 지중해의 태양을 쬐고 열정적인 라틴족이 만들어낸 문화와 유적이 이탈리아 거리 곳곳에 가득하다. 그런데, 알프스를 머리에 이고 있는 북부 이탈리아 지방은 아주 다르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특별한 곳이고, 여러 면에서 가장 이탈리아 같지 않은 곳이다. 우선 언어가 그렇다. 알토 아디제 지방(Alto Adige)에서는 독일어가 더 많이 쓰이며, 프리울리 베네치아 줄리아 지방(Friuli-Venezia Giulia)에서는 세르비아 - 크로아티아 - 슬로베니아 악센트의 언어가 지역어로 사용된다. 역사적으로 봐도, 중세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속해 있었고, 동부 국경지대는 1차 대전 전까지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에 속해 있었다. 와인 스타일에서도 그렇다. 대부분의 다른 지방들은 레드 와인이 강세를 보이는데, 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의 영향을 받은 서늘한 이 지역에서는 화이트 와인이 대세를 이룬다.
이번 달 우리는 가장 슬라브적인 이탈리아로 떠나 보자~! 베로나에서 차를 몰아 동쪽으로 3시간을 달리면 슬로베니아 국경지대에 이르며, 알프스의 준봉들이 살짝 낮아지는 곳에 프리울리 지방이 있다. 뒤쪽의 높은 구릉이 알프스의 찬바람을 막아주며, 앞에는 아드리아 해의 따스한 해풍이 불어준다. 토양은 사토성 이회암(Marl)으로 지역 포도 품종 재배에 매우 유익하다. 이 지역을 특별히 ‘꼴리오(Collio)’ 라고 부르는데, 이탈리아 최고의 화이트 와인 명산지이며, 양적으로도 레드보다 5배나 많은 화이트 와인을 생산하는 곳이다. 이탈리아의 화이트 와인 하면 본질적으로 레드 와인보다 품질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애호가들이 많은데, 이곳의 몇몇 화이트 와인은 정통 레드 와인과 비교해도 조금도 떨어지지 않을 화이트들이다. 이들 생산자들은 이탈리아 최고의 고품격 화이트 와인을 생산하는 사람들로서, 그들의 철학이 생산 기술에 반영된 와인을 생산한다. 이들은 포도에 담긴 ‘궁극’을 뽑아내기 위해 끝까지 간 사람들이다. 역설적으로, 이탈리아 와인의 주 무대가 아니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어느 지역보다도 먼저 현대적 양조기술을 도입한 곳이며, 또한 외국 품종을 실험 재배했던 곳이다. 저온 침용 발효 기술이나 프랑스산 작은 오크통에 의한 품질 개선 효과를 추구하는 등 가장 역동적인 와인 산업 지역이다.
이탈리아 ‘슈퍼 화이트’의 최강자, 실비오 예르만~!
예르만(Jermann) 가문은 1881년 오스트리아에서 슬로베니아를 거 프리울리의 빌라노바(Villanova)로 이주했다. 처음에 그들은 계약 소작인이었으나 곧 소유주가 됐고, 세기 말로 접어들면서 와인 산업이 그들의 주 업무가 됐다. 1930년대에 현 92세인 안젤로(Angelo Jermann)가 계승했다. 이들은 그들이 이어온 전통의 작은 부분도 바꾸려 들지 않았고, 결점을 허락하지 않는 고집 센 농부들이었다. 작은 가족 농장은 1971년 코넬랴노 양조 대학을 졸업한 실비오(Silvio Jermann)가 합류하면서 비약적으로 변모되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려는 굳은 결심을 안고 돌아와서, 현대적 장비를 이용하지만 전통을 존중하는 가운데, 더 이상 무겁고 둔한 와인이 아닌, 당대의 입맛을 충족시킬 수 있는 아로마가 풍부하고 조화가 잘 이루어진 와인을 만들기를 추구했다. 그는 학교에서 화이트 와인 양조 과정과 카보닉 마세레이션 기법에 대해 배웠고, 여기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양조 기술을 더해 기존에 형성되지 않았던 맛까지 완벽하게 표현해 낼 수 있게 됐다. 실비오는 이탈리아 북동부 토착 품종이 가진 가능성에 주목했고, 말바지아(Malvasia), 리볼라(Ribolla), 피콜릿(Picolit)을 주력으로 블렌딩했다. 예르만 농장은 DOC의 규정에 벗어난 새로운 스타일의 스케일 크고 과일향이 풍부하며, 오랜 숙성이 가능한 개성 있는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빈티지 뚜니나’는 가장 주목받는 와인이며, 까포 마르띠노(Capo Martino)와 더블유 드림스 역시 예르만을 차별화시키는 이탈리아의 가장 뛰어나고 잘 알려진 화이트 와인들 중 하나이다. 2007년 실비오는 슬로베니아 국경 근방의 루타르(Ruttars)에 두 번째 양조장을 건립했으며, 이곳에서 더블유 드림스나 빈티지 뚜니나 같은 예르만의 아이콘 와인들을 주로 생산한다. 인공 호수를 끼고 있는 양조장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꿈의 낙원 같다~!!
1999년부터 새로운 친환경 농경 관리법 ‘BJO(Bio+Jermann)’을 주창하며, 퇴비 등 자연 비료만 사용하고,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아 피복 작물과 혼작하며, 그 결과 지렁이나 달팽이, 거미 등이 존재하는 유기적 생물 환경을 마련했다. 친 환경적 철학 가치관을 지향한 예르만 농장은 2013년 공식적으로 ‘CasaClima Wine’ 증명서를 받았다. 이 증명서는 생태 환경 친화적이며, 사회 · 문화 · 경제 모든 면에서 고도의 지속 가능한 개혁과 진보를 이뤄 낸 양조장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이탈리아에서는 예르만이 처음이었다. 이러한 예르만 와이너리의 비전은 이제 그 아들 미켈레(Michele)에게 이어져 북동부 와인 생산의 맹주로서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화이트 와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소비가 많아져서 더욱 다양한 예르만 와인이 수입되기를 고대해 본다.
빈티지 뚜니나 Vintage Tunina
은은한 망고와 잘 익은 메론 같은 열대 과일 내음이, 드러난 첫 유혹이라면, 수려한 백도와 향긋한 자두 그리고 묵직한 아몬드의 향이 저변에 잔잔히 깔린다. 다시, 시원한 레몬과 자몽의 쌉싸래한 금속성 풍미가 이 와인의 정기를 세워 준다. 향의 복합미는 소비뇽 블랑과 세미용으로 이루어진 고급 뻬싹 레오냥 화이트 와인의 연장선상에 있는 듯하다. 높은 천연 산도와 깔깔한 미네랄이 매끄러운 타닌감을 형성하며, 쨍쨍한 산미와 함께 이 화이트 와인의 골격을 잡아주고 있다. 미끈하게 빠져 군더더기 없는 세련된 바디감, 그러면서 라인을 살려 주는 볼륨의 자극도 잊지 않았다. 차갑지만 잡고 싶은 예쁜 손…이다. 겨울 호수와 같은 명상의 와인이다. 당신을 명상에 빠지게 할 와인이다.
국제 품종인 소비뇽 블랑과 샤르도네를 주축으로 지역 품종인 리볼라 지알라, 말바시아 이스트리아나, 피콜릿이 블렌딩 되었다. 사실 의도한 것은 아니고, 한 밭에 심어진 여러 품종들을 자연스럽게 함께 담은 것이다. ‘뚜니나(Tunina)’라는 이름은 할머니의 친구이자 이 포도밭의 예전 소유주였던 사람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우연히도, 동일한 이름은 인근 베네치아의 전설적인 한량 카사노바 이야기에도 등장한다. 카사노바는 가난한 애인이자 가정 교사였던 안토니아를 ‘뚜니나’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한다. 론코 마을(Ronco del Fortino)에 위치한 약 16ha의 뚜니나 포도밭은 귀요-카푸치나 방식으로 가지치기 했고, 헥타르 당 7000주를 식재했으며, 적은 소출로 열매를 농축시켰다. 수확도 다른 포도보다 2주나 늦게 해 최상의 완숙도를 추구했다. 실비오가 이 포도밭에 혼재돼 있는 여러 품종들을 가리지 않고 그대로 한꺼번에 수확해 양조하는 필드 블렌딩 방식으로 와인을 만들어 보기로 시작한 것이 1973년이었다. 그리고 2년 후인 1975년에 공식적으로 상품화 했다. 출시 그 다음 해, 와인 평론가 루이지 베로넬리(Luigi Veronelli)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 출전한 육상 선수 삐에트로 메네아처럼 탄탄하다 해서, 이 와인을 ‘메네아 같은 와인’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이후, 감베로 로쏘에서 수차례 ‘3 글래스’를 수상했으며, 1998년에는 이탈리아 소믈리에협회로부터 ‘와인 오스카’ 상을 받기도 했다.
가격 17만 원 대
더블유 드림스 W... Dreams... ...
빈티지 뚜니나보다 짙은 밀짚색을 띤 와인이다. 싱싱한 버터와 바닐라, 피스타치오와 토스트 향이 미려하면서도 흐뭇하게 번져 오는 따뜻한 와인이다. 향긋한 생나무 향 같은 숲의 발삼 풍미가 ‘빈티지 투니나’와 차별화시켜주며, 아카시아와 후박의 농밀함이 행복한 미소를 머금게 한다. 귀요 가지치기 법으로 헥타르당 약 8000주로 조밀하게 심어진 샤르도네 포도밭에서 엄선한 포도로 생산했다. 샤르도네 97%에 산도와 개성을 더하기 위해 리볼라 지알라와 피노 비앙코를 약간량 블렌딩했다. 300ℓ들이 프랑스 오크통에서 11개월만 숙성시켰다니, 오크 숙성을 절제한 향의 미학이 이해되는 부분이다. 이탈리아 북동부에서 만나는 캘리포니아 릿지(Ridge) 샤르도네 같은 느낌이랄까?
와인 이름 치고는 무척 특이한… ‘더블유 드림스(W... Dreams... ...)’는 U2 라는 아일랜드 록 그룹의 다섯 번째 앨범인 ‘The Joshua Tree’(1987)에 수록된 ‘Where the streets have no name’ 에서 영감을 받아 지어진 이름이다. 이 와인은 1987년에 출시된 이후, 초기에는 레이블에 그려진 붓꽃의 7가지 색상으로 매년 캡슐 색상을 바꾸곤 했다. 그리고 첫 9년 동안은 ‘W... Dreams... ...’를 ‘Where the Dreams have no end..(끝 모를 듯 펼쳐지는 꿈의 세계…)’라는 뜻으로 해석했다고 한다. 그 후 1996년부터 7년간은 별똥별이 그려진 스타일리쉬한 푸른 빛 캡슐 디자인으로 7년을 출시했다. 드디어 2003년부터는 레이블에 문자로 빈티지를 표시하고, 캡슐에는 화성을 그려 넣었다. 레이블에 있는 9가지 색상과 달의 4가지 모양을 그린 동화적인 일러스트는 실비오 자신의 작품이다. 그러면 ‘W... Dreams... ...’의 해석도 바뀌었을까? 예르만 측에서는 ‘꿈이 어디에서나 이루어지기를..(Where Dreams can happen)’이라는 문장을 제시하는데 사실 정답은 없다. 여러분도 이 와인을 마시면서 문장을 완성해 보시라~!
가격 17만 원 대
피노 그리죠 Pinot Grigio
현 포도품종 중 가장 야생종에 가까워 유전학적으로 불안정한 품종인 피노는 변종이 많다. 돌연변이 현상은 주로 색상으로 나타나는데, 적포도인 피노 누아와 청포도인 피노 블랑 그리고 회색톤에 연한 벽돌색을 띤 피노 그리가 있다. 피노 그리의 이탈리아 호칭이 피노 그리죠다. 피노의 기본 특성을 그대로 유지하기에, 서늘한 이 곳 북동부 구릉지에 잘 적응하고 있다. 오래 전 바다였던 이 곳의 토양은 석회성 이회암 질이며, 사암의 일종인 폰카(ponca)가 많이 분포돼 있다. 바로 이런 호조건이 꼴리오 지역 화이트 와인의 품질과 개성을 한껏 드높여준다.
부드럽고 맑은 볏짚색에 은빛 뉘앙스가 천연한 멋진 색상을 보인다. 부드러운 과일 향에 살짝 흰 후추와 회향이 깃든 스파이시함이 이 화이트 와인의 남다른 매력이다. 그래서 인도 요리나 중국 요리와 잘 아울린다. 토양의 광물질에서 오는 스모키한 터치는 생선 구이나 꼬치 구이 등과도 잘 어울릴 듯하니, 그야말로 팔방미인 격 쓰임새다. 13%vol의 충분한 알코올이 뒷받침해 주는 힘과 넉넉함이 있으니, 흥겨운 취기는 덤이다.
가격 7만 원 대
구입정보 에노테카숍(02-3442-3305)
손진호
중앙대학교 와인과정 교수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역사학 박사를 했고, 그 과정에서 발견한 와인의 매력에 빠져, 와인의 길에 들어섰다. 1999년 이후 중앙대학교에서 와인 소믈리에 과정을 개설하고, 이후 17년간 한국와인교육의 기초를 다져왔다. 현재 <손진호와인연구소>를 설립, 와인교육 콘텐츠를 생산하며, 여러 대학과 교육 기관에 출강하고 있다. 인류의 문화 유산이라는 인문학적 코드로 와인을 교육하고 전파하는 그의 강의는 평판이 높으며, 와인 출판물 저자로서, 칼럼니스트, 컨설턴트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sonwine @ 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