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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9 (금)

손진호

[명가의 와인] Paradigm

- 본 글의 외국어 표기는 기고자의 표기에 따릅니다.

 

2022년 들어와 세계는 패러다임의 대 전환기를 맞이 했다. 2년 전부터 창궐한 코로나19 감염병 사태, 한국의 20대 대통령 선거판에서 드러난 인식 변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신 냉전 구도 변화 등 굵직한 지구촌의 사건으로 거대한 인식 변화가 일어났다. 와인업계에도 와인 생산에 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한다. 특정 지역의 자연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갖게 되는 포도의 품질 특성과 와인의 성향을 연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 그 ‘이름값 하는’ 현장으로 가본다.

 

뉴월드 최고의 와인 산지, Napa Valley


20세기 중반까지 세계 와인업계에서는 불문율, 절대적인 패러다임이 존재했는데, 그것은 바로, 신성 불가침적 최고의 자연 조건 ‘테루아’를 가진 지구상 최고의 와인 산지는 프랑스라는 것이었다. 영국의 권위적 평론가인 휴 존슨(Hugh Johnson)은 그의 저서 <World Atlas of Wine (1971)>에서 “프랑스는 근접할 수 없는 와인의 여왕… 프랑스가 나머지 세계의 모든 지역들보다 훨씬 더 많은 종류의 위대한 와인들을 생산한다.”라고 평가하면서 그 우월적 지위의 방점을 찍었다. 그런데… 1976년 5월 봄날 오후 파리에서 개최된 한 우연한 시음회가 이 모든 진리를 180도 뒤집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와인숍과 와인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스티븐 스퍼리어라는 한 영국인은 자기 사업의 홍보를 위해 때마침 미국 독립선언 200주년을 계기로 한 와인 비교 시음 이벤트를 개최했다.

 

주최측 2명과 9명의 프랑스인 쟁쟁한 심사위원들이 신생 캘리포니아 와인들과 프랑스의 보르도와 부르고뉴의 그랑크뤼 대감댁 와인들을 블라인드 테이스팅 심사를 했는데, 결과는 예상을 깨고 레드 와인, 화이트 와인 모두에서 미국 와인이 1위를 차지했다. 이제 캘리포니아 와인은 더 이상 ‘촌뜨기’ 와인이 아니게 됐다. 프랑스와 유럽 와인 우위의 기존 패러다임이 무너진 날이었다. 패러다임은 ‘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이론적 틀이나 개념의 집합체’를 말하는 사회과학 용어인데, 이것을 필자가 와인에 접목시킨다면 “특정 지역, 특정 포도밭의 자연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갖게 되는 포도의 품질 특성과 와인의 성향과의 관계”라고 해석하고 싶다. 이러한 와인 패러다임을 와인 생산 철학으로 도입한 나파 밸리의 한 와이너리가 이 달의 주인공이다. 하물며 그 와이너리는 이름도 ‘패러다임’이다.

 

 

나파 밸리의 오랜 토박이 The Harris 가족 


패러다임 와이너리는 나파 밸리의 오랜 토박이인 랜과 매릴린 해리스(Ren & Marilyn Harris) 부부가 설립했다. 아내 매릴린의 조부모는 1890년대 이탈리아 리구리아 지방에서 나파 밸리로 이민 와서 농사를 짓고 있었던 집안이었다. 남편 랜의 선조는 미국이 독립선언을 하기도 전인 18세기 중반 스페인령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랜의 가족 대부분은 1800년대 후반 아일랜드의 리머릭 카운티로부터 이주해 왔지만, 그의 친할아버지는 스페인이 지금의 캘리포니아를 통치하던 1769년에 샌디에이고 요새를 건설한 목동들의 후손이었다.

 

둘은 1960년대에 나파 밸리로 들어와 지금의 패러다임 농장이 있는 인근에 정착했다. 초기에 랜은 포도밭 매매 관리 사업을 하면서, 나파 밸리의 다채로운 포도 재배 지역에 대한 이해를 깊이 가질 수 있었고, 와인에 관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마침내 자신들만의 포도밭을 구입하기로 결정했을 때, 현 오크빌(Oakville) 구역은 당연한 선택지였다. 그들은 1960년대 후반에 이곳의 자두 과수원을 구입했고, 70년대를 거치며 포도나무를 심어 포도밭으로 바꿨다. 1975년 새로운 포도밭을 구입했으며, 수년 후 1990년 양조장을 건조했는데, 곧 와인메이커로 합류할 하이디 배럿의 아버지인 딕 피터슨(Dick Peterson)이 양조장 설계와 건립을 도와줬다.

 

이렇게 해서 1991년 빈티지로 패러다임의 첫 와인 생산의 발걸음을 떼었다. 당시 랜과 마릴린은 젊고 재능 있는 양조가였던 하이디 배럿(Heidi Barrett)을 고용했는데, 그녀는 초기부터 현재까지 패러다임 와이너리와 함께 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훌륭한 와인을 만드는 것에 대한 공통의 열정을 느꼈고, 나파 밸리에 건설된 가족 소유의 소규모 와인 양조장을 보존하겠다는 결의를 공유했다. 

 

 

나파 밸리의 새로운 패러다임, Paradigm Winery 


패러다임 농장은 총 22ha 면적이다. 20여 ha의 포도밭은 4개의 연속된 필지로 구성됐었고,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 카베르네 프랑과, 진판델, 쁘띠 베르도가 식재됐다. 나머지 부지에는 양조장 건물과 두 채의 집, 창고, 헛간, 그리고 약간의 올리브 나무밭이 있는 자급자족형 농장이다. 


패러다임 양조장의 전 직원들은 한 팀을 이뤄 포도밭 재배 관리에서 와인 양조에 이르는 전 과정을 자체 내에서 해결하고 있다. 소비자가 마시는 모든 패러다임 와인은 농장 현장에서 재배되고, 으깨지고, 발효되고, 숙성되고 입병돼 보관된 와인들이다. 농장에서는 모든 것이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소유주 랜은 화상 인터뷰에서 “우리가 포도나무를 보살필 때, 가지를 칠 때, 우리 손이 포도나무에 닿습니다. 포도를 수확할 때 우리 손이 열매에 닿습니다. 와인을 만드는 전 과정에서 우리 손이 와인에 닿습니다. 가지칠 때 기계를 사용하지 않아요~! 수확할 때도 기계를 사용하지 않아요~! ‘광학 눈(Optic Eye)’으로 포도알을 분별해내지도 않습니다. 발효시 탱크의 자동 순환 모터 장치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수작업으로 껍질을 눌러 내립니다. 컴퓨터 탱크 모니터링 장치도 없어요~! 그냥 각 탱크 윗부분에 올라가서 신중하게 냄새를 맡으며 판단합니다.”라고 설명했다.

 

분명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랜은 1975년 이래 오크빌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오크빌에서의 삶은 매일 매일이 매혹적이고 결코 지루하지 않아요. 더 나은 품질의 와인 생산이 포도밭에서 시작되고, 새로운 고품질 카베르네 클론을 찾아내고, 우리 땅에 더욱 잘 적응할 대목을 개발하는 작업은 끝이 없죠. 저는 전 세계의 포도재배자들과 와인메이커들과 맛과 기록, 경험을 나누고 그들의 양조장을 방문합니다.” 인터뷰 내내 신이 난 랜은 필자에게 귀감이 될 명언을 선사하며 인터뷰를 맺었다.

 

“인생에서의 성공은 다른 사람의 어깨에 달려 있습니다(Success in life is built upon the shoulders of others)매릴린과 저는 지난 몇 년 동안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뛰어난 인재를 찾아내고 직원으로 둘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포도밭 관리자, 양조가, 홍보 담당자 등등 회사의 모든 직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내며 몇 년부터 함께 하고 있는지를 필자에게 나열해 줬다. 이런 따뜻하고 겸손한 마음의 소유자가 만든 와인이 무척 궁금해지지 않는가?

 

 

나파 밸리의 와인 여신, Heidi Barrett의 손길


마지막으로, 패러다임으로서는 ‘신의 한수’였던 와인메이커 하이디 배럿 과의 인연에 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하이디 배럿은 오늘날 캘리포니아의 가장 유명한 컬트급 와인들을 생산하는 최고의 와인 생산자 중 하나다. 그녀는 U. C. Davis 대학을 졸업하고 나파 밸리의 모든 화려한 양조장들을 거치며 경력을 닦았다. 그녀의 이름은 Screaming Eagle, Dalla Valle, Paradigm, Grace Family Vineyards, Amuse Bouche, Au Sommet 등 별과 같은 와인의 이름과 동일시된다.

 

그녀는 1991년 첫 빈티지부터 패러다임 양조장의 와인메이커로서 일하기 시작했고 여기에서부터 그녀의 커리어를 계속 성장시켰다.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하이디의 와인에 100점을 5번이나 수여했고, 그녀를 ‘The First Lady of Wine’이라고 불렀다. 하이디는 현존하는 나파 밸리 최고의 와인 여신이다. 그런데 패러다임을 위해 와인을 만드는 하이디의 철학은 간단하다. “수년 동안 완벽하게 가꾼 포도밭의 포도가 제 앞에 있어요~! 저는 최소한의 개입으로 그 포도의 품질과 포도밭의 고유한 특징이 잘 표현되도록 할 뿐이랍니다.” 미국 최초이자 최고의 컬트 와인인 달라발, 스크리밍 이글을 탄생시킨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 얼마나 겸손한 말인가~! “우리는 결코 우리만의 스타일의 와인을 정해놓고 만들지 않아요.”

 

하이디는 포도 안에 내재하는 특성과 품질을 지혜롭게 인정하고 잘 가꿔진 밭에서 자란 포도들이 매해마다 그 해의 특성을 잘 표현하도록 허용한다. 패러다임 와인의 맛과 향은 매해 포도밭과 양조장에서 좋은 오크빌 와인을 만들기 위한 적절한 인도와 배려 덕분인 듯하다. 패러다임의 모든 와인은 회사 소유 포도밭에서 직접 재배하는 5종의 포도로부터 생산된다. 패러다임의 5종 와인은 모두 프랑스산 오크통에서 20개월 숙성된다.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은 병입해 추가로 20개월 숙성시킨 후, 메를로, 까베르네 프랑, 진판델 와인은 병입해 추가로 14개월 숙성시킨 후 출시한다. 이 중 필자가 감명 깊게 시음한 와인 중, 국내에 수입되지 않고 있는 와인 2종을 간략히 본문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메를로 품종과 쁘띠 베르도 품종을 환상적으로 블렌딩한 독특한 레드 와인 패러바인즈(Paravines)다. 이름 그대로 깐부 짝꿍 와인이다. 짙은 루비와 갸닛색의 중간쯤 되는 색상에, 붉은 감초향, 말린 자두향, 크랜 베리와 올리브 타페나드 풍미가 인상적이다. 입에서는 부드럽고도 감칠맛 나는 미감을 내며, 바닐라 향이 미끈하게 드러나온다. 메를로의 달큰한 과일향과 매끈한 질감에 쁘띠 베르도의 강한 과일향과 향신료 터치가 가미됐다. 다소 낮설은 두 품종의 동거에는 프렌치 오크 숙성이 큰 역할을 한 듯하다. 패러다임 양조장에서만 나오는 매우 특별한 레드 와인으로 99상자만 극소량 생산된다. 다음은 2009년부터 메를로 품종으로부터 생산되는 ‘Vin Gris’ 스타일의 연한 로제 와인이다. 이름하여, ‘Rosé of Merlot’ 와인은 신비스런 연한 핑크 장미 꽃잎 색상에, 산딸기향과, 섬세한 장미향, 오렌지 껍질향이 깔끔하고, 입에서는 신선한 산도와 부드럽고 순하고 깨끗한 미감을 가진 사랑스런 로제다. 안타깝게도 한국 시장에는 수입이 되지 않고 있지만 숍에서 만나게 될 날을 고대한다. 


소유주 랜과 매릴린 부부는 오크빌 아펠라씨옹(AVA)과 생태 친화적 영농법, 그리고 환경 보호를 꾸준히 주창하고 실천해온 대표적인 생산자다. 그들은 2015년에 결혼 50주년 금혼식을 가진 잉꼬부부다. 잉코처럼 다정하고, 뜨겁고 맛깔나는 주인들이 만든 잉꼬 와인을 맛보자. 

 

패러다임, 까베르네 소비뇽  Oakville, Cabernet Sauvignon

 


미국 최고의 와인 산지인 나파 밸리 내에서도 가장 알짜배기 구역으로 알려진 오크빌 AVA 구역 포도로 생산된 와인이다. 오크빌 구역은 나파 밸리의 정 중앙부에 위치해, 나파 밸리 와인의 표준이라 여겨지고 있다. 필자가 시음한 2015년 빈티지는 까베르네 소비뇽 89%, 메를로 6%, 쁘띠 베르도 3%, 그리고 까베르네 프랑 2%의 블렌딩으로 탄생했다. 프랑스산 오크통에서 20개월 숙성시켰고, 테이스팅을 거친 후, 병입해 추가로 20개월 정도 숙성시킨 후 출시한다. 블랙커런트 껍질의 색깔을 그대로 받은 짙은 흑청색에 6년의 숙성을 거친 옅은 벽돌빛 적갈색 뉘앙스가 고급스러운 이 와인은 글라스에 따르자마자 고유한 블랙 커런트 향을 분출하며 나파 밸리 까베르네의 DNA를 보여 준다. 이어 블랙 체리와 말린 자두향이 등장하고, 피톤치드 숲의 향기와 바닐라, 개암 등 과하지 않은 부드러운 오크 향이 복합미를 돋운다. 아마도 100% 새 오크통이 아니라 약간의 비율을 중고 오크통에 할애한 듯하다. 향 부께의 말미에 등장하는 계피, 커리, 강황, 황토 흙내음은 신비스런 이국적 풍경을 떠올리게 해 더욱 매혹적이다. 이는 4가지 품종을 매우 영리하게 블렌딩한 결과라 여겨진다.

 

 

입안의 쫄깃한 질감, 산뜻한 산미, 터프한 타닌, 묵직한 농축미는 오크빌 까베르네의 전형을 보여 준다. 이 모든 것이 14.7%vol 의 준수한 알코올 파워 속에 녹아 있다. 여운은 1분 이상 지속되는 블록버스터급 와인이다. 힘과 섬세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으니 현재 시음 최적기나, 3~4년 정도 그 절정기를 유지할 듯하다. 2015년 빈티지의 생산량은 평소보다 적은 5544병이라니, 정말 귀하디 귀한 와인이다. 프랑스식 오리 꽁피 요리와 근사한 만찬을 이뤘다.

Price 40만 원대

 

패러다임, 메를로  Oakville, Merlot

 

까베르네 소비뇽이 나파 밸리의 황제 품종인 것은 맞지만, 몇몇 메를로 와인은 나파 밸리의 테루아에서 멋진 품질을 보여 주는데, 패러다임의 메를로 밭은 단연 오크빌 구역 최고의 단일 포도밭이다. 필자가 시음한 2016년 빈티지는 메를로 90&, 까베르네 소비뇽 10%의 최적 비율로 블렌딩됐다. 프랑스산 오크통에서 20개월 숙성시켰고, 테이스팅을 거친 후, 병입해 추가로 14개월 정도 숙성시킨 후 출시한다. 이러한 병입 숙성 철학은 매우 존중받을 만 한데, 와인의 보관과 숙성에 부족한 인식을 가진 소비자들을 위한 완벽한 서비스라고도 생각된다. 최고의 보관 장소는 결국 와인이 생산된 현지 양조장의 지하 셀러가 아니런가~! 글라스 안에서 싱그런 자두향과 말린 자두향, 체리잼 향이 기묘하게 엇갈리며 메를로 와인 양조 기술의 절정을 느끼게 하는 가운데, 쿠바 시가, 토스트, 다크 초콜릿, 카카오, 카푸치노 커피 향이 이국미의 절정을 이룬다. 100% 새 오크통을 사용해 눅진한 메를로의 특성을 우아하게 고양시킨 면이 있지 않았을까 판단해 본다. 입안에서는 매끈한 타닌과 찰진 조직감, 둥그런 구조감이 멋진 밸런스를 이뤘으며, 메를로의 순수한 과일 풍미도 감미롭게 살아있다.

 

 

14.4%vol의 풀바디 알코올은 향과 미감의 전달체 역할을 하며 1분 이상 지속되는 긴 피니시를 만들어준다. 화려하고 고급스럽고 맛깔나는 매혹적인 이 와인은, 사실 고백하지만, 메를로 와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필자를 매료시킨 몇 안되는 메를로 중의 하나며, 캘리포니아 메를로 와인로서는 당연 원픽, 메를로다. 샤토브리앙 안심 스테이크, 어린 양갈비 구이 음식과의 조화를 추천하며, 아내와의 금혼식을 축하하는 만찬을 위해 구입해 두고 싶다.  

Price 40만 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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