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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

Prologue #
1만m 상공을 시속 870km로 비상하는 비행기는 오늘 따라 유독 심한 난기류와 만났습니다. 불안감을 달래보려고 애써 잠을 청해보지만, 기체가 흔들릴 때마다 느껴지는 오싹한 느낌은 놀이기구의 짜릿함과는 다른 무엇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것이 큰 위협이 아니란 사실을 이성적으로 직관한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유년시절에는 멋지게 푸른 창공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를 타는 것이 그렇게도 소원이었는데, 이토록 바라던 것이 현실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상상하던 것과 실재하는 것의 간극은 때로는 말하기 섭섭한 무엇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뜨거운 온탕에 들어가서 ‘시원하다~’라고 하는 아빠의 말에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탕에 따라 들어가 ‘지옥 불’ 같은 뜨거움을 맛보고 나서야 어른들이 사용하는 그 ‘시원함’이란 중의적 표현을 몸소 배우는 아이들의 여정처럼 말이죠.


Scene 1 #


한국에서 열리는 Coffee and Talks의 행사에 참여하기 위한 여정 중에 기내에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시선에는 ‘워커홀릭’처럼 비춰질 수 있겠지만, 시간을 쪼개야만 하는 처지, 한편으로는 열 한 시간 이상을 비좁은 공간에서 무료함과 사투를 버리는 과정 보다는 글을 쓰는 과정이 제법 위로가 됩니다.


“이것은 당신의 헤드폰인 것 같은데요?”라며 옆 좌석의 노신사가 말을 건네 왔습니다. 단순한 말 한마디가 인연이 돼 38번 좌석의 일본인 부부와 함께 여행을 하는 동안 소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8박 9일의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부부는 오사카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로마에서부터 시작해 아시시, 시에나, 산지미냐뇨, 피렌체, 산마리노, 파도바, 베네치아, 베르가모, 밀라노에 이르는 여정을 소화한 것이지요. 저도 격한 반응을 보이며 “작년에 아시시에 갔었어요. 그리고 산지미냐노의 성 입구 바로 오른편에 위치한 까페테리아가 제 이탈리아 친구가 운영하는 곳이에요.”라며 자랑을 늘어놓기도 했지요. 대화가 무르익을 즈음에 서로의 얼굴에는 함박 웃음꽃이 피어났습니다. 무의식을 지배하는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말이죠.


웃고 떠드는 사이에 친절한 승무원들이 식사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기내식 대란’이란 검색어가 톱10을 장식하며 이슈가 됐더군요. 에베레스트 산맥보다 높은 곳을 비행하는 이들에게 식사란 ‘단순한 끼니’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불편함과 불안감이 공존하는 공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여유라고나 할까요? 이러한 이유 때문에 최상의 서비스가 기내에서 이뤄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며칠 전 저는 베네치아를 포함한 베네토 지역에 다녀왔습니다. 스토리가 있는 훌륭한 커피숍을 찾아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깊고 험한 산 속을 타는 심마니의 심정이라고나 할까요? 독자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거룩한 부담감 때문이라고나 할까요?


Scene 2 #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일본인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극찬했던 주홍빛 베네치아는 변한 것이 없더군요. 오랜만에 안녕하며 미소를 건네는 이 도시의 빛깔은 볼수록 더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맙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시간이 지날수록 빛을 발하는 것 같습니다. 수십년만 지나도 촌스럽게 여겨지는 일시적 화려함과는 다르게 말이죠. 하나의 국가 형태로 500년 이상을 지속해 온 조선의 역사도 대단하게 여겨지는데, 1500년 이상을 공화국으로 존재했던 나라 베네치아, 세월이란 힘을 이겨낼 장수는 세상에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수천만 명의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쓰레기 투척, 무질서와 난동을 일으키는 관광객들, 그리고 외국인들의 투기로 인한 임대료 상승. ‘본섬에서 조용한 삶을 살아오던 소시민들의 삶은 파괴됐다.’란 문구가 과장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클레오파트라의 아름다움이 불러낸 참사처럼 예기치 못한 나비효과가 이곳에도 도달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꽃은 꺾이기 마련이니까요.


베네치아에서 45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비첸차에서 저는 장미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로운 카페를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비첸차는 고대에 비첸티아라고 불렸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이 된 베로나의 동쪽으로 11km, 파도바 북서쪽으로 84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을 관통하는 도로 위에서는 끊임없이 펼쳐지는 포도밭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눈에 뒤덮인 알프스의 절경도 눈에 들어옵니다. 포강 유역에 전개된 평야와 북부 산악지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 옛날부터 잦은 침입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결국에는 1404년 베네치아에 종속되면서 현재 베네토의 가장 주요한 5개 도시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현재는 식품가공, 섬유, 기계 등의 공업이 발달했는데요, 르네상스 후기의 건축가 A.팔라디오와 그 후계자 V.스카모치가 설계한 건물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15세기에는 하나의 파를 이룰 정도로 화풍이 발달해 비첸차의 문화는 상당한 번영을 이뤘습니다.


베네토의 시내로 진입하는 골목은 조용한 편입니다. 포강으로 이어지는 작은 시냇물이 도심을 가로지르고, 중간에 연결된 다리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평온하기 그지없습니다. 정작 다리는 바쁘게 움직일지언정 물 위에 고요히 앉아 두리번거리는 청둥오리의 여유로운 자태가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들과 이름 모를 풀들과 평화롭게 속삭입니다.


Scene 3 #
고요함의 끝과 마주할 무렵 진입로에서 발견한 하나의 이미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커피잔 위에 돛이 달린 배처럼 형상화 돼 ‘피가페따(Pigafetta)’라고 쓰여 진 커피숍은 요즘 유행하는 커피숍들처럼 화려하지 않습니다. 커피와 모카포트와 같은 커피 도구들이 진열된 장이 밖에서 손님들을 반기고 있었습니다. 풍화작용에 의해 세월의 아름다움으로 깎여진 자연석처럼 그것은 투박함 가운데 빛이 나고 있었습니다.



커피숍에 들어서자마자 10대 정도 돼 보이는 커피 분쇄기가 두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바를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와우, 어메이징!’ 속으로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신이 나는데도 표현할 길이 없어 어금니를 깨물었습니다. 메뉴를 둘러보는 동안 커진 동공 사이를 뚫고 들어온 25가지의 에스프레소 메뉴에 어린 시절 문방구의 쇼윈도에 진열된 멋진 장난감들의 행렬처럼, 그것은 동경의 대상이 됐습니다. 잠시 후 맛보았던 ‘갈라파고스’ 커피의 맛처럼 그것의 재배지를 상상하게 만드는 어떤 고혹함이 있었지요.



피가페따는 1491년에서 1534년 사이 이탈리아의 항해가 안토니오 피가페따의 이름을 빌린 것입니다. 그는 베네치아 공화국 비첸차 출신으로 귀족 가문에서 자라나 어릴 적부터 천문학, 지리학과 작도법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포르투갈 출신의 선장 페르디난도 마젤란과 함께 향신료를 찾기 위해 인도를 항해했으며, 1522년 240명의 선원 가운데 살아서 귀환한 18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 여행은 최초의 세계일주로 기록이 됐다고 합니다. 피가페따의 여행기(최초의 세계일주에 대한 보고서)는 그가 여행하는 동안 방문한 곳곳의 주민과 식생, 날씨, 지리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꼼꼼한 노트는 항해 정보와 언어 자료가 포함됐으며, 생생하고 자세한 형식으로 이후 탐험가들과 지도작성자, 사학자에게까지 미친 영향은 가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최초의 세계일주, 탐험가의 정신은 이들에게도 커피를 향한 열정에 불을 지폈나 봅니다.



커피를 향한 끊임없는 여정을 담아낸 피가페따. Carla와 Gigi 두 부부는 40년째 커피숍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30년 전부터 여러 대의 분쇄기를 사용해 다른 맛을 고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하는데요. 젊은 시절에는 미쳤다는 소리를 꽤나 들었을 법 합니다. 남들과 다른 길을 걸을 때 사람들은 종종 조소와 비아냥을 보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열정은 고객의 신뢰로 이어지게 됐고, 이 지역에서 이곳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메뉴에는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커피루왁, 갈라파고스, 파나마, 케냐 커피 등 다양한 커피가 준비돼 있습니다. 1유로 50센트부터 7유로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오로지 1유로 습관의 관성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에 말입니다. 때마침 이곳을 찾은 고객들과 함께 바에 서서 대화를 나눴습니다. “안녕 나는 조니라고 해. 한국인이고 현재는 밀라노에 살고 있어. 네가 지금 마신 에스프레소는 2유로 짜리야. 일반 에스프레소의 두 배 가격이지. 이걸 선택하는데 고민은 없었어? 밀라노에서도 1유로 짜리 커피에 익숙한 사람들은 10센트조차도 더 지불하길 꺼려하는데 말야.”낯선 이방인의 질문에 미소로 화답합니다.“매우 간단해, 맛있으니까.”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요. 우문현답 같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해 보이는 일들이 현실 속에선 어려움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Scene 4 #


이들은 커피를 만들면서도 바의 한편에서 주문에 맞춰 프로슈토를 썰어내 빵을 만들기도 하고 주스를 만들기도 하면서 분주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커피에만 잔뜩 힘을 줄만도 한데 그렇지 않습니다. 테이블 한 켠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는 신사, 카푸치노 빵 한 조각을 나누며 대화를 나누는 중년의 여인들, 바에 잠시 기대선 채 에스프레소 한 모금을 훌쩍 마시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사람들.


‘이들의 풍경을 샤갈이 바라보았다면 어떤 그림을 그려 냈을까?’벨라를 위해서 그림을 그려내던 남자의 모습처럼 그녀를 위해서 커피를 만드는 사람처럼 보이는 한 남자의 모습에서 샤갈을 떠올립니다.‘우리 인생에서 삶과 예술에 의미를 주는 하나의 색은 바로 사랑의 색이다.’란 샤갈의 말처럼 이방인의 눈에 비쳐진 이들의 모습은 사랑의 빛깔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저는 이 집의 커피 맛을 평가할 수 없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럴만한 자격이 없다는 표현이 적절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취향이란 다양한 이해의 복잡성을 넘어 진실성이 전달하는 감동이 있으니까요.



Epilogue #
커피 전문가라고 말하기엔 부끄럽지만 오랜 기간 다양한 커피를 마셔왔던 제게도 갈라파고스 커피는 처음 맛보는 생산지의 커피였습니다. 지구별에는 다양한 국가와 생산지가 존재합니다. 심지어 같은 농장에서도 나무나 경작지의 환경에 따라 품질과 맛은 천차만별이지요. 저의 수고로움 없이도 이러한 특별한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피가페따 선에 몸을 실었기에 가능한 것 아닐까요? 두 커피 항해사 부부의 모습이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만난 일본인 커플과 함께 묘하게 오버랩 됐습니다.‘낡은 것이 아니라 오래된 것이다.’란 표현은 단지 고급 위스키나 와인 앞에만 붙는 수식어는 아닐 테지요.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이곳을 다시 방문하길 원합니다. 아름다움은 볼수록 더욱 아름답기 마련이니까요. 커피숍을 방문한 샌디에고에 사는 한 블로거의 글을 인용하며 피가페따의 추억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전용(Jonny Jeon)
Dalla Corte S.R.L
한국에서 오랫동안 바리스타였던 전용 Pro는 각종 대회 수상, 유명 커피 프랜차이즈 론칭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다가 이태리로 건너가 세계 유명 커피 머신 회사인 Dalla Corte S.R.L에서 Pro로 일하고 있으며 회사의 주요 프로젝트로 육성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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