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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0 (토)

칼럼

[전용의 Coffee Break] 나빌리오의 자존심 'Taglio'


Prologue# 눈부신 햇살이 비춰오네요. 태양은 귀찮게도 따라다닙니다. 간질이기도 어루만지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자전거 위에서 펼쳐지는 도로 위의 풍경이 오늘은 왠지 더욱 로맨틱합니다. 선글라스를 착용한 탓일까요? 렌즈 사이로 들어온 빛이 모든 풍경을 흑백 사진처럼 만들어버렸습니다. 하얀색 셔츠의 소매를 약간 걷어 올린 신사부터, 화사한 원피스를 입고 자전거 페달을 밟는 구릿빛 피부의 여인, 이런 모습은 이곳에서 낯설지 않습니다.
유럽에서는 선글라스를 낀 사람을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홍채가 푸른 백인종은, 홍채가 검은 인종보다 멜라닌 색소가 적어 눈부심에 민감하다고 합니다. 유럽에서는 계절을 떠나 선글라스는 필수 아이템입니다. 뒤집어 이야기해보면 한국인의 눈은 외부의 빛에 강한 적응력을 가진 셈입니다.
스포르체스코 성안으로 자전거 핸들 방향을 바꾸고 페달 속도를 늦춰 생동감 넘치는 사람들을 관찰합니다. 초록색 잔디 위에 누워 다정하게 스킨십을 나누는 연인들부터 태양을 온몸으로 받으며 태닝하는 사람들,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 꼬랑지를 연신 흔들며 공을 던져 달라 짖어대는 강아지... 자전거 바퀴는 계속 굴러갑니다.
몇 초 단위로 펼쳐지는 풍경들은 가슴 어딘가 무형의 감정으로 저장됩니다.
깃발을 중심으로 모인 수십 명의 관광객, 분주하게 악기들을 설치하는 음악인을 뒤로한 채 성 밖으로 빠져나옵니다.
스포르체스코 성은 밀라노의 중심에 있습니다. 지금은 도시 박물관과 예술품 전시장, 그리고 공원의 형태로 자리 잡고 있지만, 14세기부터 공사를 시작해 1450년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개축한 역사적인 유물입니다. 19세기 이탈리아 통일 이후에 밀라노를 점령한 군대가 도시의 권리를 양도받고 난 후 성채 복구 작업이 이뤄졌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때 폭격으로 심하게 피해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복원해내려는 이들의 노력은 놀랍습니다.
몇 분 사이로 두오모 광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순백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두오모는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돌이 빛을 발합니다. 제게 두오모 성당을 마주하는 것은 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매번 경외감이 듭니다. 500년에 걸쳐 지어진 역사의 힘일까요? 대성당은 말 그대로 밀라노의 상징입니다.


Scene 1# 여전히 옛 모습을 간직한 울퉁불퉁한 도로를 달리다 보니 어느덧 ‘나빌리오’에 도착했습니다. 나빌리오는 무역과 군사적 필요, 바다와 연결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무엇보다 밀라노 대성당 건축을 위한 대리석을 운반하는 ‘그란데 나빌리오’로 이용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곳의 지하철역은 Porta Genova인데, 직역하자면 ‘제노바를 향한 문’이란 뜻입니다. 옛 한양에 사대문이 있었듯 이곳은 밀라노의 서대문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해상왕국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제노바를 향해 펼쳐진 문이란 의미를 알고 나니 왠지 장엄하게 느껴집니다. 특히 길게 펼쳐진 수로를 걷다 보면 ‘끝까지 걸어가면 바다가 있는 제노바가 나올까?’, ‘언제 한 번 도전해 볼까?’란 허무맹랑한 상상에 잠기기도 합니다. 아직 그럴 만한 용기가 없음에도 말이죠.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습니다. 저녁이 되면 아페리티보aperitivo를 즐기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밀라노 전체가 이 ‘식전주’로 유명하지만, 나빌리오는 특히 유명합니다. 10유로 정도면 다양한 종류의 칵테일, 샴페인과 같은 음료와 함께 다양한 음식들이 뷔페 형식으로 제공됩니다. 도심 속에서 여유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아페리티보는 하나의 의식 같은 절차입니다. 최소한 두 시간 이상을 차로 이동해야만 바다 구경을 할 수 있는 대도시, 이곳에 있는 작은 수로는 이들에게 큰 위안이 됩니다.
매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열리는 앤티크 마켓은 밀라노에서도 유명합니다. 빈티지한 중고 제품은 물론 예술가들의 작품성이 담긴 액세서리, 의류, 가구, 인테리어 소품, 책, 음반 등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Scene 2# 이 로맨틱한 거리의 터줏대감으로 빛을 발하고 있는 커피& 키친 Taglio를 방문했습니다. 이곳은 밀라노에서 맛있는 커피를 제공하는 10대 숍 가운데 하나로 지명되기도 했습니다. 이 유명한 곳의 주인장과는 일면식도 없지만, 커피 애호가라는 공통분모 덕분인지 금세 오랜 친구처럼 가까워졌습니다.
커피를 마셨습니다. 1유로만 내면 어디서나 마실 수 있는 그런 커피가 아닙니다. 이들은 직접 콩을 볶고, 세계에서 가장 비싼 커피 가운데 하나인 파나마 게이샤도 소량씩 볶아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데, 관광객들도 입소문을 듣고 이곳을 방문합니다. 그뿐 아니라 밀라노의 멋쟁이들이 Taglio만의 새로운 시도를 즐기고 있습니다.
Taglio는 경이로운 이탈리아의 음식을 보다 새롭게 선보이기 위해 매일 3가지 정도의 메뉴만을 직접 선택하고 구성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훌륭한 재료인 프로슈토, 살라미, 치즈와 파스타, 올리브, 곡류 등의 식료품을 직접 살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습니다. 최고의 커피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직접 로스팅을 하는 실험적인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 이들의 꿈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꿈을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자전거의 페달과 함께 쉴 새 없이 움직인 두 다리, 지친 목을 위해 생맥주 한 잔을 주문했습니다. 오렌지 향이 기분 좋게 전달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아직 마시지도 않은 커피에 대한 확신까지 들었습니다. 이곳에서 주문할 때마다 살라미salumi가 함께 제공됐는데, 시중에서 가장 비싼 것을 사더라도 맛볼 수 없는 풍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매장의 이름 ‘Taglio’는 ‘잘라내다’라는 뜻입니다. 가게 곳곳에서 이 이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프로슈토, 치즈 등 모든 것은 주문과 동시에 필요한 만큼 잘라냅니다. 신선하고 믿음이 갑니다.


Scene 3# 갈증을 해결하고 나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했습니다. 바리스타가 퇴근하고 난 직후라 이곳의 공동 운영자가 직접 커피를 뽑아줬습니다. 직업의 특성상 매일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게 제 일이지만, 오늘 제가 마신 커피는 특별했습니다. 2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이미 삼켜버린 커피. 설탕이 없어도 충분히 기분 좋은 단맛과 풍부한 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부드러운 여운이 10분 정도 지속되는 최고의 에스프레소를 마셨습니다.
전문가들은 보통 장점보다는 결함을 본능적으로 발견하게 되는데, 오늘 제가 마신 커피는 군더더기 하나 없는 그런 맛이었습니다.
식사는 다음 기회에 하려고 생각했으나, 이미 맛본 살라미와 맥주, 커피에 반해버린 저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열차처럼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하고 메뉴판을 요청했습니다. 3개의 안띠파스타, 3개의 쁘리모와 세콘도가 전부입니다. 재료를 항상 신선하게 관리하고, 자신들만의 새로운 메뉴를 그날 회의를 통해서 결정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요. 메뉴에는 단순화와 집중이란 이들만의 철학이 담겨 있었습니다. 다양한 치즈가 한 접시에 나오는 모둠 치즈와 와인, 새우를 곁들인 애피타이저, 메인으로는 문어를 부드럽게 조리한 요리를 택했습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맛있었습니다. 제가 미쉐린 평가자도 아닌데, 맛있는 음식 앞에 무슨 비평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냥 감사할 따름이지요.



Scene 4# 첫 방문임에도 불구하고, 세심하게 설명해주며 챙기는 마음이 고마웠습니다. 2주 전 휴가로 다녀온 페자로Pesaro 지역 인근의 작은 호텔이 오버랩됐습니다. 수십 년 동안 주방을 지켜온 부모님과 전직 프로 레이싱 선수인 마르코가 홀을 책임지는 작은 레스토랑이 있는 공간이죠. 이탈리아 친구들과 며칠을 머물며 매일같이 이 식당에서 음식을 먹을 만큼 요리도 훌륭했고, 무엇보다 친절 이상의 인간미를 느꼈습니다.
잦은 해외 출장으로 인해 호텔에 갈 때마다 형식적인 서비스를 받으면 그들이 전문가란 생각은 하지만, 그 이상의 느낌은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마르코 가족이 운영하는 이곳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우리를 친구이자 가족으로 대해줬습니다. 우리는 마르코와 친구가 됐고, 밀라노에 오면 함께 식사하고 시간을 보낼 것을 약속하며 아쉬운 작별을 했습니다.


Epilogue# 무엇이 이런 맛과 서비스를 만들어 냈을까?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Taglio는 최고가 되기 위해 만든 곳이 아니라, 열정으로 탄생한 공간입니다. 소통을 통해 스스로 행복을 찾아가는 곳이죠. 로맨틱한 공간이란 결국 사람들의 미소, 인간미 물씬 풍기는 향기로 채워질 때 빛이 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마음의 Porta는 어디로 향해 있나요? 피곤하고 지칠 때, 풍미 가득한 에스프레소 한잔 하며 문을 활짝 열어보는 건 어떨까요?


전용(Jonny Jeon)
Dalla Corte S.R.L
한국에서 오랫동안 바리스타였던 전용 Pro는 각종 대회 수상, 유명 커피 프랜차이즈 론칭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다가 이태리로 건너가 세계 유명 커피 머신 회사인 Dalla Corte S.R.L에서 Pro로 일하고 있으며 회사의 주요 프로젝트로 육성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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