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어제 본 자스민처럼 생긴 저 꽃은 무엇일까? 아카시아 나무인가?’달리는 차창 밖으로 펼쳐진 파노라마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가운데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수 십 km동안 펼쳐진 초록 잎과 하얀 꽃들은 아스팔트 위에 상쾌한 향기를 뿌리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검색해 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아카시아 나무였습니다. 봄과 여름의 사이. 그 미묘한 간극에서 피어나는 존재. 한 송이 내에서도 먼저 피고 지고 또 다시 피고 지다 강렬한 향기를 풍기며 절정을 맞이하는 꽃, 꿀벌들이 좋아하는 꽃 가운데 으뜸인 아카시아 말입니다. 꽃말에는 ‘숨겨진 사랑’, ‘나의 비밀스런 사랑’이란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합니다. 어제는 분명 밀라노에서 목적지인 피사(Pisa)까지 정해진 시간 안에 도착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쉴 새 없이 차선을 변경하며 도로의 질주자를 자처해야만 했는데, 집에 돌아가는 길은 경춘선 국도를 달릴 때 왠지 모를 낭만을 느끼는 것처럼 여유롭기만 합니다. 마음이 가벼운 것이 꼭 봄날의 흩날리는 꽃가루 같다고나 할까요.
라스패치아(La sprezia)에서 파르마(Parma)로 연결된 도로에는 자연 말고도 사람의 손이 빚어낸 고풍스러운 가옥들이 평온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누구에 의해 언제 지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풍화작용에 의해 깎이고 패인 듯 보이는 빛바랜 회색 벽돌. 오렌지 컬러, 테라코타의 색상으로 얹어진 지붕이 한층 멋스럽습니다.
Scene 1# 피사는 겉보기에는 매우 소박해 보이는 도시입니다. 하지만 10세기부터 12세기 까지 제노바, 베네치아와 함께 지중해 최고의 해상공화국 가운데 하나였으며 전성기 시절에는 아랍함대를 격파하고 동방무역을 장악하며 사르데냐와 이탈리아의 남부, 시칠리아 지역을 식민지로 지배할 정도로 번성했었습니다. 이 때 ‘두오모’를 착공하기 시작해 17세기에 이르러서야 완공하게 됩니다. 피사의 두오모는 로마네스크 양식을 기본으로 해 매우 화려합니다. 수 백 년에 이르러야 완성이 됐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 건축물 자체가 지닌 역사적 힘은 경이로움의 대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사는 사탑이 훨씬 유명합니다. 해가 지날수록 조금씩 기울어지는 사탑의 불가사의함 때문이지요. 1960년대 현지의 지하수 수요가 많아지면서 수위가 낮아지자, 경사의 진행도 빨라져 위기를 맞게 됐다고 합니다. 이에 1964년 2월 이탈리아 정부는 붕괴를 막기 위해 세계에 지원을 요청합니다. 안전상의 문제로 1990년부터 공개가 금지됐고, 2001년 6월까지 10년에 이르는 보수 작업을 거쳐 마침내 다시 일반인에게 공개됩니다. 불가사의한 것은 보수 공사는 사탑이 완전히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이뤄졌는데, 이제는 사탑이 자체적으로 균형을 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기묘함 때문에 기울어진 탑 주변에서 다양한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남기는 것을 기념품 이상의 전리품처럼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또한 피사는 문예의 중심지로, 유명한 갈릴레이도 이곳 대학에서 공부 했습니다. 이런 대학의 오랜 역사성 때문에 이탈리아의 각 지역은 물론 전 세계에서도 공부를 하기 위해 피사를 찾아옵니다. 학기 중에는 아르노 강의 다리 위에 앉아 대화를 나누며 로맨스를 즐기거나, 노래를 부르고 맥주나 와인을 즐기는 젊은 청춘들로 빼곡합니다.
Scene 2# 이번에 소개할 필터 커피 랩(Filter Coffee Lab)은 피사의 젊은이들에게 인기 만점인 커피숍입니다. 이탈리아의 전형적인 숍과는 외모부터가 매우 다른데, 마치 런던에 와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알고 보니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2년 전 처음으로 이곳에 커피숍을 연 사람은 발렌티나(Valentina)입니다. 체세나티코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녀에게도 피사는 역시 낯선 도시였습니다. 영국의 대학에서 5년 동안 공부할 때, 틈틈이 커피숍에서 바리스타로 일했던 것이 커피와 인연의 시작이었다고 하는군요. 당시 런던에서 만나게 된 발렌티나의 친구이자 동료가 피사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커피숍의 분위기가 반은 이탈리아, 반은 영국 스타일이 나는 듯합니다.
다양한 머핀을 비롯한 사이드 푸드가 전면에 구성돼 있고, 오전에는 팬케이크, 베이컨 잉글리쉬 브랙퍼스트를 만들어 제공합니다. 본인들이 영국에 거주할 당시 좋아했던 메뉴들로 구성했다고 하는데요. 이런 메뉴와 콘셉트가 이탈리아의 바에서 흔한 것은 아닙니다. 음료도 이탈리아에서 낯선 롱블랙, 플랫화이트 같은 메뉴가 눈에 띄고 밀크셰이크를 포함한 여러 가지 티도 준비됐습니다. 또한 이곳에는 일회용 컵을 들고 테이크아웃을 하는 손님들로 넘쳐납니다. 이들의 새로운 시도가 처음부터 쉬운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커피문화가 익숙한 시민들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간다는 부담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젊은 대학생들 또한 외국인 관광객들이 주변에 많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으리란 확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Scene 3# 영국 유학시절 발렌티나는 ‘투스카니’라는 훌륭한 커피숍을 발견하고 커피맛에 매료돼 바리스타에게 어떤 커피를 사용하는지 물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이탈리아의 스페셜티 커피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영국에서 만나는 토스카나와 이탈리아 커피라, 커피숍 이름에서도 미묘한 뉘앙스가 충분히 전달됩니다. 어쩌면 커피 필터 랩은 ‘투스카니’와 닮아 있는 듯 합니다.
이탈리아 안의 런던이라고나 할까요? 대개 이탈리아 커피숍의 판매비율이 에스프레소 70%, 카푸치노를 포함한 다른 메뉴가 30%라면 이곳은 반대로 에스프레소 30%, 베리에이션 메뉴 70% 가 판매됩니다. “커피숍을 운영
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더니, 그는 “밸런스”를 꼽았습다. 제품의 품질과 크리에이티브, 고객과의 유대가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발렌티나는 언젠가 매장을 정리하고 스페인에 가서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다고 합니다. 물론 어디에, 어떻게 오픈할 것인지에 따라 콘셉트도 달라지겠지요. 보통은 잘 되고 있는 매장은 남겨두고 새로운 매장을 오픈하는데 비해 무모하리 만큼 뛰어난 도전정신의 소유자입니다. 이유를 묻자, 오히려 “why not?”이라고 반문합니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는 과거의 것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입니다. 지금껏 해온 여정처럼 열정과 창작성을 쏟아낼 수 있는 무대가 필
요한 듯 보였습니다.
바에 들어가서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커피를 내리며, 향을 음미하는 모습이 사뭇 인상적이었습니다. 오렌지 향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에티오피아 커피, 투어멀린 보석처럼 자연스럽게 빛나는 투명의 갈색 커피는 코끝부터 목 넘김까지 잔잔한 여운을 선사했습니다. ‘새롭다. 그러나 없던 것은 아니다….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라 조금 다른 무엇….’ 혼자 중얼거립니다.
Epilogue# 피사의 사탑이 기울어지지 않았다면, 오늘날까지 전 세계의 수많은 이들이 이 건축물을 보기위해 피사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시선의 작은 변화가 미치는 영향은 참으로 커다란 것 같습니다. 동일한 길임에도 불구하고 어제는 그저 숨 가쁘게 달려야 할 잿빛 도로였는데 오늘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아카시아 숲을 발견해냈으니 말이죠.
전용(Jonny Jeon)
Dalla Corte S.R.L
한국에서 오랫동안 바리스타였던 전용 Pro는 각종 대회 수상,
유명 커피 프랜차이즈 론칭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다가
이태리로 건너가 세계 유명 커피 머신 회사인
Dalla Corte S.R.L에서 Pro로 일하고 있으며
회사의 주요 프로젝트로 육성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