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세베소는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주에 있는 도시입니다.
전통적으로 가구업이 발달한 이곳은 겉으로는 매우 소박해 보이지만 튼실한 도시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한국에 수출되는 이탈리아의 명품 가구들은 주로 밀라노의 북부에 위치한 소도시에서 대대로 가업을 이어받아 만들어집니다.
이 작은 도시가 ASDC Ba Se라는 축구팀도 가지고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필자는 TV를 시청하지 않지만, 우연히 인터넷에서 '비정상회담'이라는 프로그램을 본 기억이 납니다.
이탈리아인 알베르토가, 가족과 친구들의 축구 사랑에 대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이야기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축구공 하나로 22명의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쉴 새 없이 누비는 이 스포츠가 이탈리아를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축구 광신도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세베소의 지명은 이 지역을 흐르는 강 이름에서 유래됐다고 합니다.
B.C 3세기에 군사 요충지 역할을 한 세베소는 16세기에 기근과 페스트를 두 차례나 겪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76년 익메사(icmesa) 공장에서 다이옥신을 포함한 유독성 화학물질이 유출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지역 사회는 물론 이탈리아 전체가 충격에 휩싸이게 됩니다. 연구를 위한 인간의 탐욕과 부주의로 인해 소박한 사람들이 큰 피해를 당했습니다. 지금은 주요 오염지역에 공원을 조성해 관리하고 있어, 과거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깨끗한 공기와 녹지가 평화로움을 느끼게 하는 세베소의 첫인상 뒤에 이런 아픈 이야기가 있을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알프스에서부터 내려오는 꼬모의 호수 줄기에서 이어지는 세베소는 조용하고 평화롭습니다.
Scene 1# 오늘은 세베소에 숨어있는 커피 향기 가득한 카페 GRISO를 찾았습니다. 골목에 숨어있음에도, 손님들의 사랑을 받는 카페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카페 GRISO의 이름은 꼬모 지역의 역사와 함께 자연스레 태어났습니다. 이 지역에서 문인으로 명성이 자자한 작가명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 카페는 골목 귀퉁이에 있는 탓에 정보가 부족한 사람이거나 외지인이라면 이 매장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심마니가 울창한 숲 속에서 산삼을 찾는 것처럼, 빛을 발하는 매장들은 하나같이 어딘가에 숨어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내 누군가 그곳을 발견하고, 조금씩 입소문이 쌓입니다.
겨우 찾아가 처음 마주한 카페의 이미지는 초콜릿 빛깔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매장은 초콜릿과도 뗄 수 없는 인연이 있는 매장이었습니다.
‘Buon giorno’(좋은 하루)하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남자는 안토니오입니다. 이곳의 로스터이며 바리스타로 2001년부터 근무했습니다. 16년째 한 매장을 지키는 전문가이자 이 지역의 터줏대감입니다. 임대료의 압박 때문에, 또는 운영의 어려움으로 인해 계속해서 변하는 서울의 거리와 사뭇 대조적입니다.
카페 GRISO는 1991년에 처음 문을 열었습니다. 초반에는 소규모로 콩을 볶으며 주민들과 몇몇 납품처에 커피를 공급하는 일로 시작했는데, 2001년 안토니오와 그의 파트너 클라우디아가 영입되면서 전혀 다른 성격의 매장으로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Scene 2# 매장 안에 들어가면 심플한 메뉴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너무 심플한 나머지, 시력검사를 할 때 사용되는 텍스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메뉴판에는 두 종류의 에스프레소 블렌딩과 두 종류의 싱글 오리진 에스프레소가 적혀있습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작은 변화를 주면서, 고객을 흡수하는 영리한 가게들처럼 이곳의 커피 메뉴는 좋은 생두가 새로 들어 올 때마다 모습이 변합니다.
커피의 장점이 매일같이 마셔도 질리지 않는다는 점이지만, 새롭고 다채로운 맛은 분명 또 하나의 선물입니다.
매장의 입구에는 스탠딩으로 에스프레소를 마실 수 있는 바(bar)가 있습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무미건조하게 커피를 주문하고, 마신 후에 훌쩍 떠나버리지 않습니다. 커피가 준비되는 순간, 그리고 커피를 마시는 동안 바리스타와 훈훈하게 담소를 나눕니다. 매일같이 만나면서도 대화는 주로 유쾌하고 즐겁게 이뤄집니다. 카페에서의 소통은 청량제 그 자체입니다.
안쪽 좌석에서는 중년의 신사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유리 벽 너머 커피콩을 볶는 로스터가 눈에 들어옵니다. 카페 내부에 로스팅 시설이 갖춰진 모습은 이탈리아에서는 흔한 풍경이 아니기에, 더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20년 넘게 로스팅과 커피를 만드는 일을 해왔는데도 불구하고, 열정이 남다른 안토니오는 올해 이탈리아 바리스타 챔피언십 이브릭 커피 부분에 참가하여 2위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안토니오는 터키쉬 커피에 어울리는 커피콩의 볶음 정도와 분쇄도를 항상 고민하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모래를 사용해 열 조절을 하고 있습니다. 최대한 풍미 있는 맛을 연출하고자, 다양한 방식으로 커피를 만들어 본다는 안토니오의 말에서는 겸손함 이상의 열정이 드러납니다. 내부에 위치한 로스팅 룸에는 커피콩 30kg을 볶을 수 있는 로스터리 설비가 돼 있습니다.
운이 좋았다면 콩을 볶는 장면을 사진에 담고,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을 테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로스팅 금일 휴업’이랍니다. 콩을 볶는 신성한 작업은 사진에 담아내지 못했지만, 전문가가 내려주는 깊이 있는 커피의 맛과 향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Scene 3# 이곳에서는 소매로 커피를 사는 고객들이 제법 많습니다. 재미난 사실은 맛있는 커피인데도 불구하고 일반 매장보다 5~10% 정도 저렴하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 질에 이 가격이면 저렴하다 못해 싸고, 싸다 못해 거저라고 해도 괜찮을 겁니다. 한국 돈으로 1000원 정도면 맛있는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까닭을 묻자, 카페 griso는 커피를 직접 볶기에 원가 경쟁력이 있고, 필요한 만큼만 신선하게 공급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국에도 이런 로스터리 가게가 많이 생겨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 때문인지, 30분이나 떨어진 곳에서 매일 이곳을 찾는 고객들도 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루에 4번 방문하는 고객도 있는데 오전, 점심, 오후 매번 다른 커피를 마신다고 합니다.
새로운 커피가 들어오면 커피가 지닌 향과 맛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안토니오와 클라우디아는, 커피와 함께한 세월의 깊이만큼 숙련됐고 안정감이 있습니다.
두 개의 필터를 사용해 내린 드립 커피에는 다른 곳에서 맛볼 수 없던 특별한 맛과 향이 있었습니다. 커피의 과육을 말린 카스카라와 분쇄 커피를 동시에 사용해, 평면적인 커피의 느낌에 입체감을 더했다고 표현할 수 있겠네요. 카스카라 자체도 티처럼 즐기기 충분하지만, 두 가지의 공정을 하나로 묶어 꽃향기와 과일의 뉘앙스를 고스란히 품은 커피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
Scene 4# 매장 내부에는 판매되는 초콜릿과 다양한 프로모션 브로셔가 있습니다. 클라우디아는 고객과의 강한 유대감을 만들고, 이벤트를 기획하는 일에 뛰어납니다.
IIAC의 초콜릿 맛 평가 자격증도 취득하고 있는 그녀의 초콜릿 사랑은 유별납니다. 그녀는 초콜릿이 커피와 궁합이 좋을 뿐 아니라, 이벤트를 통해 지역 주민과의 커뮤니티를 이룰 수 있는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10월에 펼쳐지는 초콜릿 축제는 카페 GRISO가 직접 주관하는데, 이 작은 카페가 만든 행사에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룹니다. 다른 지역에서도 이를 즐기고자 가족 단위로 찾아온다니 실로 놀랍습니다. 문화 DNA의 저력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여담으로 이제는 편의점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초콜릿은 한때 ‘신의 음식’으로 불렸습니다. 왕가를 중심으로 유행한 초콜릿은 비싼 세금, 희소성 때문에 갖고 싶은 욕망의 대상, 착취의 대상이었죠. 부의 상징이자 신분을 대변하는 상품이기도 했습니다. 맛을 향한, 그리고 특별함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나 봅니다.
카페 GRISO가 개최하는 행사는 단순히 초콜릿을 보여주거나 판매하는 자리가 아니라, 초콜릿이 품은 가치를 공유하는 행사입니다. 행사 내용 역시 매우 창의적입니다. 예술성 있는 미용사가 초콜릿과 사탕을 이용한 모양의 헤어스타일을 연출해주는가 하면, 화가는 캐리커처를 그려줍니다. 또한, 소믈리에가 참가해 와인 시음도 이뤄집니다. 뿐만 아니라 초대된 뮤지션들이 축제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킵니다.
이렇게 버라이어티한 행사를 주관하는 카페 GRISO. 이러한 활동은 지역과의 유대로 이어집니다. 지역의 초등학생들에게 커피의 프로세스를 알려주는 현장학습을 할 뿐 아니라, 커피 애호가들을 위해, 드립 커피, 모카 포트, 에어로프레소와 같은 도구로 커피를 맛보는 방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Epilogue# 아침 출근길에 찾아오기 쉽지 않은 동선이지만, 차를 공용 주차장에 세우고 먼 걸음을 하면서까지 찾아오는 이들이 많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로지 유명 메이커를 찾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커피 한 잔을 통해 끊임없이 소통하며, 더 나은 품질을 만들고자 하는 열정이 고객과 GRISO를 하나로 연결해주고 있습니다.
세베소의 골목, 그곳에는 아름다운 사랑방 카페 GRISO가 있습니다.
전용(Jonny Jeon)
Dalla Corte S.R.L
한국에서 오랫동안 바리스타였던 전용 Pro는 각종 대회 수상, 유명 커피 프랜차이즈 론칭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다가 이태리로 건너가 세계 유명 커피 머신 회사인 Dalla Corte S.R.L에서 Pro로 일하고 있으며 회사의 주요 프로젝트로 육성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