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그러운 과일이 가득한 아름다운 농장에서 와인을 직접 담가보고, 제조한 술을 맛보며 구매까지 가능하다. 여기에 와인과 찰떡궁합인 메뉴를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까지. 외국의 유명 와이너리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다. 무려 150여 곳의 국내 와이너리들이 직접 농사부터 와인 양조, 파생 관광상품 개발까지 진행하며 주류 소비자들은 물론 내외국인 관광객에게 한국와인의 매력을 뽐내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또한 농민이자 한국와인생산자, 한 병의 와인에 농장 전체를 담아 작품을 만드는 장인들이 속한 협회가 있다. 바로 10년 동안 끊임없이 성장하며 소비자들의 삶 속에 녹아들 준비를 마친 한국와인생산협회다.
올해 창립 12주년인 한국와인생산협회는 그동안 한국와인생산자들을 위해 상호협력을 위한 교류를 주선하며 기술과 경험을 공유하고 한국와인을 홍보하는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창립 당시부터 협회와 동고동락한 한국와인생산협회의 정제민 회장을 만나 협회, 그리고 한국와인의 현황과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상호협력을 통해 성장하고 있는 한국와인생산협회
2009년에 설립된 한국와인생산협회는 와인과 와인업계를 연구하는 연구원들, 교수, 와인 유통 업자, 와인 전문 기자, 생산자들이 모여 ‘한국와인 발전에 기여하고 싶은 사람들의 학술적 모임’으로 출발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며 한국와인생산자들이 한국와인 저변확대와 기술 교류를 위해 모임의 필요성을 느끼고 협회의 정체성을 ‘한국에서 생산되는 각 지역의 과일들을 발효시켜 술을 만드는 사람’, 즉 한국와인생산자들의 모임으로 두며 구성원이 자연스럽게 바뀌게 됐다. 현재의 한국와인생산협회 회원의 대부분은 각 지역에서 과일 농사를 짓는 농민임과 동시에 와인생산자들이며 80여 개의 회원사가 소속돼 있다. 한국와인생산협회 정제민 회장은 “회원사의 대부분이 영세하고 열악한 1인 기업, 2인 기업이다. 지금은 씨앗을 뿌리는 단계”라고 협회를 설명했다.
한국와인생산협회는 회원사들이 힘을 합쳐 한국와인의 대중화와 저변 확대를 위해 홍보, 마케팅을 진행하며 한국와인을 소비자들에게 알리고, 서로의 경험을 나누며 상호 협력과 기술 교류, 친목 도모를 하고 있다. 또한 연구자들을 초빙해 기본적인 양조 과정에서의 품질을 안정시킬 수 있는 세심한 품질관리와 제조 방법을 중심으로 다양한 교 육과 훈련도 실시하고 있으며 세미나와 워크숍을 진행하기도 한다. 협회가 주최한 대표 행사로는 레스토랑과 협업해 한국와인과 레스토랑의 메뉴를 마리아주 패키지로 구성, 판매하는 ‘한국와인고메위크’ 가 있다. 코로나 사태로 미뤄지게 됐지만, ‘땡스기빙데이’처럼 생산자들이 1년에 한 번 모여 서로의 고생을 위로함과 동시에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만날 수 있는 장도 따로 마련해 한국와인을 홍보할 예정이다. 곧 온라인에 한국와인을 체계적으로 소개하는 홈페이지와 한국와인 쇼핑몰을 개설할 계획도 있다고. 여기에 정부의 시책이나 제도, 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을 때 공동으로 힘을 모으고 있다.
한국 농산물을 발효시켜 만든 술, 한국와인
일반적으로 와인은 ‘포도를 발효시켜 만든 술’을 칭한다. 미국, 캐나다의 경우 포도가 아닌 다른 과일을 발효시켜 양조를 하면, 블루베리 와인, 스트로베리 와인, 애플 와인, 이렇게 부르기도 하지만, 와인이라는 용어 자체가 ‘포도 발효주’다.
하지만 한국와인은 한국에서 한국 농산물을 발효해 만든 과실발효 주를 뜻하며, 포도만으로 국한되지 않았다. 한국와인의 원료는 우리 땅에서 자란 머루, 사과, 매실, 복분자, 딸기 등 다양한 종류의 과일들이며 이를 발효시켜 만든 와인을 한국와인이라 칭한다. 아직 우리나라 주세법 상에는 과실주에 혼성주와 발효주가 함께 포함돼 있어 한국와인에 대한 구분이 명확히 정의돼 있지 않지만 한국와인으로 불리려면 와이너리에 발효 시설을 갖추고, 과실만으로 알코올 발효 및 숙성의 단계를 거쳐야만 한다.
한편 국산와인과 한국와인 역시 명칭이 비슷해 쉽게 혼용되지만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 국산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모든 것들을 총칭하기에 해외에서 수입한 원액으로 만든 와인도 포함되지만, 한국 와인은 ‘우리 땅에서 자란 원료를 사용해 직접 양조한 술’을 칭하기 때문이다.
관광산업으로의 기능을 갖춘 전통 있는 와이너리를 위해
기업을 중심으로 주류산업이 발전된 한국과는 달리 외국의 주류들은 어느 지역, 어떤 원료를 썼느냐가 소비자 선택의 기준이 된다. 유명한 포도주인 프랑스 보르도 지역의 샤토(Chateau) 와인은 거대한 포도밭의 소유주가 밭에서 나온 포도로 와인을 생산하는 등 와인 생산의 모든 과정이 한곳에서 끝난다. 농민이 생산한 원료로 술을 만들고, 대를 이어 전통을 지키며, 포도밭에 체험 관광을 결합시킨 와이너리의 형태가 백 년 넘게 지속돼오고 있다. 외국의 와이너리 들은 술 ‘공장’이 아닌 관광산업에 가까운 형태다.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와이너리 투어를 하는 등 소비자들이 와인을 맛보면서 체험하고, 제조과정을 직접 지켜본 와인을 곧바로 구매하는 등 관광적인 요소들을 함께 갖추고 있다.
반면 한국의 와이너리 역사는 15년 남짓으로, 아직 외국처럼 오랜 전통이 있는 와이너리는 없다. 게다가 우리나라 전체 와인 소비량 중 한국와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0.1%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SNS가 활성화되며 소비자들이 상품을 찾을 때 대기업이 제공 하는 정보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제품의 원료, 생산되는 지역, 담고 있는 스토리텔링은 어떻게 되는지 꼼꼼히 따지는 소비가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산식품유통 공사에서 지역의 우수 양조장을 선정해 제조에서 관광, 체험까지 경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찾아가는 양조장’ 사업 역시 활발하게 운영하고 있어 현재 46개의 와이너리가 찾아가는 양조장 시설로 등록 돼 와이너리의 특색에 맞는 투어 프로그램들을 기획, 운영 중이다. 이처럼 한국와인은 인지도나 품질이 매년 성장하고 있다. 와인생산자들의 꾸준한 노력과 소비자들의 지속적인 관심이 함께 한다면 100년 뒤에는 한국와인을 양조하는 농장들이 외국의 와이너리처럼 뿌리가 튼튼한 와이너리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와인은 이제 시작이다.
“생산자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한국와인에 대한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
한국와인생산협회 정제민 회장
한국와인생산회장으로서의 이력과 와인생산자로서 하고 있는 일이 궁금하다.
한국와인생산회장으로는 2019년에 4대 회장으로 취임했으며 임기가 3년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올해가 회장으로서의 마지막인 해다. 그전에는 협회의 부회장으로 있었고, 협회 창립 멤버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협회와 동고동락했다.
캐나다에서 생활할 때 그 지역 와이너리들을 돌아보니 술 공장이 아닌 관광산업에 가까워 부러움을 느낀 것이 와인에 몸담게 된 계기가 됐다. 본래는 포도로 와인을 만들려 마음먹고 한국에 돌아오니 대부분 양조용 포도가 아닌 식용 포도를 재배하고 있 었다. 마침 장인어른이 예산에 사과농장을 가꾸고 있어, 우리나라 상황에 맞게 사과로 와인을 만드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사과와인은 상큼하고 깔끔한 매력이 있다. 해산물, 혹은 삼겹살처럼 느끼한 음식과도 궁합이 잘 맞다.
현재는 예산에서 9000평 정도의 사과 농장을 운영하며, 대표적으로 사과와인 브랜드 추사와 증류주인 소서노의 꿈, 추사40 등 의 전통주를 생산하고 있다. 코로나19 이전에는 농장에서 수확철인 가을에 사과를 따, 애플파이와 잼을 만들고, 바비큐에 와인 축제를 진행하기도 했다. 매년 2만 5000여 명의 사람들이 방문 하던 행사였는데 코로나19로 잠시 중단돼 아쉬울 따름이다.
한국와인생산협회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가장 큰 목표는 한국와인의 저변을 넓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와인 소비가 늘고 있는 추세라고 해도, 한국에서 생산된 과일을 발효시켜 만든 주류시장은 전체 와인 소비 시장의 0.1%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다. 한국와인의 파이가 커지면 와인생산자 개인으로서의 이득도 높아진다. 그렇기에 한국와인생산자들은 경쟁 관계임과 동시에 한국와인 전체의 판을 키워야 하는 공동 운명체이기도 하다. 외국에서 다양한 와인이 수입되고 있기 때문에, 외부의 강력한 적에게 맞서 버티려면 우리끼리라도 서로 단합해야 하는 상황이다.
외국의 수백 년 역사를 가진 와이너리와 협회에 비해 우리는 큰 기술과 경험이 부족한 상태다. 그렇기에 더욱 서로의 기술과 경 험들을 공유하고 상호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협회 활동 중에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인 것이 있다면?
어느덧 한국 와이너리의 역사도 15년이 흘러 기술과 경험이 축적되는 중이다. 따라서 와이너리 운영 과정에서의 시행착오들이 많이 줄었으며 새로 생기는 양조장들도 과거의 양조장들이 했던 실수를 답습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와인을 생산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 원료인데, 협회 구성원의 대부분이 직접 농사를 짓는 농민이기에 특정 품종이 술을 빚는데 더 낫다는 것을 알면 곧바로 실행에 옮기기 쉽다. 예를 들어 ‘청수’라는 포도 품종이 있는데, 그 품종으로 화이트와인을 양조했을 때 향이나 맛 등이 뛰어난 측면을 보였다. 이에 청수를 사용했던 와이너리의 경험과 기술이 공유, 확산됐고, 그 결과로 현재는 여러 곳에서 청수를 활용한 좋은 와인들을 출시하고 있다.
한편 최근 가벼운 스파클링와인이 주목을 받음에 따라 충주의 와이너리 ‘작은 알자스’는 레돔 시드르, 홍천 너브내에서 샤르망 방식으로 제조하는 스파클링 사과와인을 제조하고 있다. 협회 내에서는 기술과 경험들이 공유되면서 어떤 원재료가 좋고 우리 의 양조방식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함께 고민해가며 상승 효과를 누리고 있다.
와이너리들의 관광지화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소비자가 와이너리에 방문해야만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은 무엇인가?
와인제조자에게 직접 제조 철학을 비롯해 어떤 원료를 어떻게 생산하는지 직접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참이슬, 처음처럼 같은 대중적인 희석식 소주는 전분질이 많은 카사바라는 원료를 발효시켜 주종을 뽑은 후 95%의 알코올에 물과 감미료를 타서 만든다. 반면 안동 소주, 화요는 쌀로 술을 빚은 후 그것을 증류해 증류 소주를 만든다. 이렇게 처음처럼, 참이슬, 안동소주, 화요는 똑같이 소주라 불리지만 원료나 제조 방법에 차이에 따라 근본적으로 다른 술이 완성된다.
과실주 역시 마찬가지로 다양한 제조법이 있는데, 발효시켜 만든 술은 약간의 시큼한 맛과 함께 발효되는 과정에서 굉장히 복합적인 맛과 향이 난다. 이에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은 맛과 향이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양조장을 방문해 원료와 제조과정을 보고, 장인의 손, 그리고 혼에 의해 만들어진 술이라는 걸 느끼면 술에 담긴 스토리를 알게 돼 똑같은 술이지만 완전히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협회의 구성원들은 단순히 ‘술 공장’을 운영하는 것이 아닌 농민이자 생산자다.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인 것 이다.
회장으로 활동하며 느낀 국내외 주류시장의 차이는?
한국의 주류시장은 대기업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대량생산하는 공산품 술을 중심으로 발전돼 왔다. 이 경우 어느 회사에서 제작했는지만 알 수 있고, 술이 어느 지역에서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반면 외국의 술들은 어느 마을, 누구네 포도밭에서 어떤 포도 품종으로 만들었는가를 핵심으로 본다. 일본의 경우, 전체 와인시장에서 자국와인을 소비하는 비율이 30%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은 와이너리 개념을 갖춘 와인생산 역사가 100년이 넘었으며 자국에 적합한 양조용 포도를 심고, 연구하고 개발한 역사가 길다. 소비자들도 자국에서 생산된 와인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또한 과일발효주를 만드는 사람들이 광범 위하게 모였다는 점도 외국의 와인협회와 비교되는 한국와인생산협회만의 차별점이다. 사실 와인의 정의라 함은 포도를 발 효시켜 만든 술이다. 특히 유럽에서는 과일 와인에 ‘와인’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한국에서 재배하는 포도는 주로 먹는 용도고, 그러니 양조하기에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어 복분자, 사과, 머루 등 다른 과일로 발효시켜 만든 술들이 많다. 국제적 행사에 나가 프랑스의 보르도 와인협회, 독일의 모젤 와인협회의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도중 한국와인생산협회의 회장이라는 사실을 밝히면, 어떤 품종으로 술을 만드냐는 질문을 받는다. 사과로 술을 만든다고 대답을 하면 ‘사과로 만든 술은 와 인이 아닌데.’라는 눈빛을 던진다(웃음). 향후 한국와인이 발전하면 협회가 포도와인과 과일와인으로 분과돼 별도의 조직으로 나눠질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회장으로서 최근 주목하고 있는 주류 트렌드는 어떤 것들이 있나?
요즘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기 전 사진부터 찍는다. 그렇기에 비주얼이 중요해져 색깔이 불그스름하고 예뻐 사진에 잘 나오는 로제와인에 주목하고 있다. 또한 최근의 주류 소비는 한식 주점, 전통 주점에서 한국 술들이 많이 소비되고 있다. 이러한 공간을 주로 이용하는 소비자들의 특징은 한 번에 여러 가지의 술을 맛보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용량이 너무 크면 이것저것 마시기가 부담스럽기에 용량 자체가 작아진다. 와인 한 병이 아니라. 375ml, 200ml 등을 선호한다. 한국와인 역시 작은 용량이 나와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온라인을 통해 제품을 구매해 혼술, 혼밥을 하는 흐름도 있다. 이러한 문화가 젊은 층들에게 급격히 확산돼 지역과 원료를 잘 알 수 있는 한국와인의 매출이 늘어나기도 했다. 예산사과와인의 매출액은 작년에 비해 두 배가 늘었고, 판매량의 80%가 온라인 판매로 이뤄졌다.
한국와인생산협회의 앞으로의 계획과 비전이 궁금하다.
한국와인들은 영세하기에 와이너리마다 2억, 3억 원 상당의 병입시설을 갖출 수 없다. 게다가 병입시설은 1년에 가동하는 시간이 며칠이 안되기 때문에 업체마다 다 갖추고 있을 필요가 없다. 캐나다의 경우 웬만한 와이너리에는 탱크만 있고 술을 완성해 병입할 시점에 병입시설이 설치된 트레일러가 농장으로 와, 병을 포장하고 다른 와이너리로 이동한다. 협회가 조금 더 발전한다면, 이러한 시스템을 갖추고 싶다. 거기에 더해 자조금 사업에 참여하려 한다. 자조금 사업에 참여하면 협회 에서 1억 원을 모으면 국가에서 추가로 1억 원이 지원돼 한국와인의 발전을 위해 지원금을 활용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기술 연구, 저변 확대, 홍보 마케팅 부문에 조금 더 체계적인 투자를 할 계획이다.
또한 대형 행사들은 할 수 없겠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 식으로 대중들 속에 녹아들 수 있는 행사들을 자주 기획할 예정이다. 행사에 찾아와 한국와인의 맛도 보고 생산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술을 마시고 고객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