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유럽에서 가장 큰 나라로,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총 1700만㎡의 영토를 가지고 있고 이 중 3/4 정도는 경작지로 이용이 가능한 국가다. 이는 미국의 두 배에 해당하는 크기다. 러시아는 보드카와 캐비아 외에도, 세계 2위의 산유국이고, 전 세계 면적의 9%를 자치하는 대국이다.
러시아, 풍부한 음식문화 형성
러시아 음식문화의 오랜 역사는 동서양의 여러 문화들과 접촉하면서 변화와 발전을 지속해왔고,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음식문화 중의 하나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프랑스 요리를 비롯한 서양요리에 많은 영향을 준 것도 러시아 음식문화다. 흔히 스웨덴이 원조로 알려진 뷔페 요리와 서양식 정찬에서 나오는 코스 요리 라는 개념도 러시아 요리문화에서 기원한 것이며 간단한 음식을 파는 ‘비스트로’의 기원도 나폴레옹 이후에 파리에 진주한 러시아 군인들로 인해 생긴 것이라고 한다.
원래, 러시아인들의 평소 식사는 매우 소박했다. 러시아인들은 곡물, 뿌리채소, 양배추처럼 러시아의 혹한을 이겨낼 작물들을 생선, 돼지고기, 가금류, 캐비어, 버섯, 장과류, 꿀 등과 곁들여 먹었다. 바다와 접근이 어려운 지리적 역사적 특수성으로, 오래전 러시아 요리들은 철갑상어, 강꼬치고기, 장어, 잉어 같은 민물고기들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우하’라는 민물생선이 들어간 맑은 수프는 엄밀히 말해 정식 생선 수프 요리로 볼 수가 없다. 이러한 상황들은, 러시아인들이 혹독한 자연환경에서 용이하게 음식 또는 재료들을 구하지 못할 것을 고려해 상대적으로 보관과 유지가 쉬운 재료들로 요리를 하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러시아 요리의 주재료들은 단백질보다는 지방이나 탄수화물을 제공하는 것들이 주를 이뤘다. 반면, 신선한 과일이나 채소는 거의 쓰이지 않았던 것.
특권층의 등장이 두드러지면서, 러시아 음식은 점차 사회적 계급에 따라 각자의 특징을 지니게 됐다. 러시아 요리는 크게 궁중요리와 민간요리의 두 카테고리로 나눌 수 있다. 당연히 궁중요리는 민간요리에 비해 훨씬 다양하고 화려했다. 20세기까지 러시아 음식문화의 핵심이자 중추는 오히려 간단하고 맛이 좋은 서민들의 요리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 요리문화 9세기부터 시작
러시아 요리문화는 사실상 10세기부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지만, 이미 9세기부터 스키타이인들로부터 빵을 발효하는 기술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빵은 러시아 음식문화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러시아 전통의 검은 호밀빵이다. 이 발효빵은 일반적인 러시아인이라면 하루에 1kg 정도 소비한다고 할 정도로 대체불가한 러시아 전통음식이다. 주로 지금의 러시아의 강기슭이나 평원에서 농경과 수렵을 하던 스키타이인들은 10세기부터 러시아 음식문화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초기의 음식들은 스키타이인들의 영향으로 말 젖을 이용하는 요리가 대부분이었다. 자주 사용되는 재료로는 무, 순무, 양배추, 콩, 양상추 등이 있었다. 그들은 이런 재료들을 날로 먹거나, 찌거나, 굽거나, 소금 간을 하거나, 양념을 해서 섭취했다. 러시아 음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수프 문화도 이때부터 형성됐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의 가장 전통적인 수프라고 할 수 있는 ‘스치야’는 비잔틴제국으로부터 전래된 양배추로 만들어졌다. 양배추나 고기는 요리에 첨가될 때, 항상 따로 요리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고기가 들어가지 않는 수프에는 ‘보르시’가 있다. 보르시의 주재료는 비트의 뿌리인데, 이는 보르시가 특유의 붉은 색을 띠게 만들어준다.
다양한 육류 재료, 향신료 들여와
11세기에는 러시아 북부에 사는 핀 족에 의해 러시아에 사슴, 바닷고기, 토종버섯 등이 들어오게 된다. 러시아 전통 음식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다양한 육류 재료 역시 이즈음부터 러시아 음식문화의 일부가 됐는데, 귀족층이나 부유층은 주로 꿩이나 백조를, 일반인들은 거위, 닭, 오리, 비둘기, 학 등을 먹기 시작했다. 기근이 닥칠 때에는 토끼, 사슴, 다람쥐, 야생돼지, 말 등도 러시아인들의 식량이 됐다. 러시아요리의 육류 재료는 그 종류가 다양해, 곰을 빼고는 다 먹는다고 전해질 정도다.
13세기에 들어서 몽고의 침략을 받은 러시아는 250년이라는 세월 동안 통치를 당했다. 이런 엄청난 민족적 피해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요리는 몽고의 영향을 받아 여러 방면으로 더욱 발전했다. 몽고인들을 통해 샤프란이나 계피 같은 향신료들이 들어왔고, 양배추를 발효시키는 법도 소개됐다. 러시아인들은 오래전부터 양배추를 먹어왔지만, 이전에는 독일의 사워크라우트처럼 소금물에 절여서 보존하는 법을 몰랐다. 양배추를 절이는 법이 소개된 이후, 절인 채소와 과일은 러시아 음식에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됐다. 몽고인들에 의해 러시아에 전해진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러시아식 전통만두 ‘펠메니’가 있다. 펠메니는 우리가 흔히 아는 덜플링과 매우 비슷한데, 차이가 있다면 펠메니는 좀 더 둥글고, 절대 속에 단 것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술, 차 등의 교역을 통해 식문화 보다 다양해져
러시아 요리는 15세기에 들어서 다양성을 얻게 됐다. 당시 이반 3세는 다수의 이탈리아 장인들을 공공건물을 짓기 위해 초빙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에 파스타, 페이스트리, 아이스크림 같은 디저트들이 소개됐다. 이는 밀이 교역을 통해 들어오면서 가능한 일이었다. 밀이나 감자를 통해 만드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술, 보드카 역시 이탈리아와의 교역을 통해 이때 들어오게 된다. 보드카는 16세기까지 금지됐지만, ‘폭군’이라고도 불렸던 이반 4세 때 다시 음주가 허용됐다. ‘작은 물’이라는 뜻의 보드카는 오늘날 1인당 매년 60병씩 소비될 정도로 사랑받는 음료가 됐다.
차는 16세기에 러시아에 소개됐다. 중국에 의해 차가 전해져 생겼던 여느 차 문화와는 달리, 러시아의 경우 네덜란드와 영국의 영향을 받아 차 문화가 형성됐다. 러시아의 차문화는 우유, 크림, 버터 등이 점차 보편화되던 당시의 상황과 맞물려 꽃을 피웠다. 차와 유제품이 늘어남에 따라, 이에 어울리는 캐비아, 소금 간을 하거나 젤리 형태로 조리한 생선요리 같은 러시아의 별미들 역시 16세기에 탄생했다. 16세기는 러시아가 영토를 확장하던 황금기였던 만큼 건포도, 말린 살구, 무화과, 멜론, 수박, 레몬 같은 다양한 과일들 역시 소개됐다. 15세기에 이어 16세기에도 러시아 음식의 재료와 종류는 더욱 다양해졌지만, 이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오직 귀족들과 특권층들이었다. 귀족들은 여러 외국음식들과 다양한 요리를 맛보며 점심식사를 밤늦게 하는 호화로운 식생활을 누린 반면, 서민들과 하층민들은 이전보다 더욱 소박한 식생활을 했다.
코스 요리 문화 발생
18세기는 표트르와 예카테리나의 시대라고 불렸다. 이 시기에 러시아 사회는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다. 표트르 1세는 수도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겼다. 서유럽과 더 가까운 상트페테르부르크로의 수도 이전은 당시 러시아가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로부터 받아들인 여러 문물을 받아들인 것을 설명해준다. 에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 1세의 이런 개혁 정책을 이어받았다. 러시아의 식사문화도 이 시기에 급변하게 된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기존의 여성 요리사 대신 외국 요리사를 부르는 것이 유행했다. 모든 요리가 한꺼번에 나오던 기존의 식사문화와는 달리 메뉴판에 순서가 적혀서 나오는 코스 요리 문화가 생긴 것도 이때였다. 당시 프랑스 요리사들은 육류를 잘게 잘라서 걸쭉한 수프나 커틀릿을 만들고, 지방이나 밀을 덜 사용하는 가벼운 요리들을 많이 만들었는데, 이는 큰 덩이의 육류를 소금에 절여서 보관하던 기존의 방식과는 전혀 달랐다. 이런 새로운 조리법 역시 18세기 러시아에 소개돼 러시아의 우리가 아는 수프 형태의 음식이 보편화됐다. 원래 러시아의 모든 국물요리나 죽은 국수, 곡물, 채소와 같이 나오는 첫 요리라는 의미의 ‘Pokhlyobka’라고 불렸다. 맑은 장국과 퓨레로 만든 수프는 서유럽에서 들어왔다. 감자, 와인, 페이스트리 요리는 18세기에 이르러서 러시아에 들어온 음식들이다.
러시아의 국민 디저트, Pyraniki 탄생
19세기는 러시아 요리 역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요리 시대라고 불린다. 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리적 위치와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은 특징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9세기에 들어온 대표적인 음식 재료들에는 토마토와 샐러드용 녹색 채소 등이 있다.
러시아 음식문화는 다른 여러 문화들과 마찬가지로 디저트 문화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다. 심지어, 하층민들과 일반인들도 꿀(한때 정부의 규제를 받는 품목이었다)이나 베리를 이용한 여러 디저트들을 즐겼다. 꿀이나 베리는 그대로 먹기도 했지만, 잼이나 시럽으로 만들어 먹기도 했다. 잼이나 시럽으로 쓰일 때에는 밀가루, 버터, 계란과 함께 섞여서 하나의 디저트를 만드는데 이용되기도 하는데, 이것이 러시아의 국민 디저트인 ‘Pyraniki’다. 블리니는 페치카라고 불리는 러시아 전통오븐에서 메밀을 구워 만드는 팬케이크의 일종이다. 현 문명에서는, 블리니는 달콤한 속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디저트라기보다는 발효식품에 가깝다. 실제 러시아인들은 블리니를 짭짤한 양념을 해 먹는다.
러시아 음식문화라고 하면 호화롭고 귀족적인 느낌이 강하지만, 사실 다양한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문화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 전통음식이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아직도 러시아 전통음식은 현재까지도 러시아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150개가 넘는 민족이 살고 있는 러시아에서 어쩌면, 러시아 음식이라는 것은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 일지도 모르겠다.
미셸 이경란
MPS 스마트쿠키 연구소 대표
Univ. of Massachusetts에서 호텔 경영학을 전공했으며, 오랫동안 제과 분야에서 일해 왔다. 대한민국 최초 쿠키아티스트이자 음식문화평론가로서 활동 중이며 현재 MPS 스마트쿠키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