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필자는 서울의 어떤 저명한 호텔 클라이언트에게 “한국의 전통이 담긴 호텔을 만들고 싶다.”는 의뢰를 받았다. 그는 필자가 만난 클라이언트 중 가장 젊은 Z세대였기 때문에, 누구보다 세련되고 트렌디한 디자인을 의뢰할 줄 알았는데 예상 외로 한국적 디자인에 대해 관심이 무척 많았고, 한국의 대표색을 호텔에 반영하고 싶어 했다. 사실 기존 한국적인 디자인은 한옥, 처마, 오방색, 사방탁자, 백자 등 한국의 대표적 아이템들을 표면적으로만 응용해 다소 뻔한 콘셉트와 고리타분한 스토리들이 녹아있는 경우가 허다한데, 그만큼 ‘한국적 디자인’을 해결하는 것은 디자이너로서 어려운 주제며, 이는 필자에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언젠가는 한국의 디자이너로서 한번쯤 깊게 고민이 필요한 주제임은 분명하기에 이번 기회를 통해 깊이 있게 한국의 오리지널리티, 한국 DNA, 한국의 미, 한국적 풍류가 담긴 한국의 로컬리티 호텔을 디자인 하고자 마음 먹었다. 그 뒤 디자인 관련 세미나에 참가했는데 때마침 한국적 아이덴티티에 대한 패널 토의가 있었다. 그중 동감하는 몇 개의 키워드를 적어보면 적응/적용(Adaptation/Application), 작지만 거대한 복잡함(Small but Big-complicated), 중국과 일본 사이(Between China and Japan), 변화와 적응, 그리고 스피드(Change, Adaptation and Speed), 근면한 미국사람(Diligent And Americanized)과 같은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다. 특히 요즘 일본과 경제 무역 문제로 이슈가 많은 상황에서 그중 ‘중국와 일본 사이가’ 참 와 닿는 문구다. 지나치게 매끄럽고 정교하면서도 도식화된 인위적 특징을 지닌 일본과, 자연과 같은 극사실성을 추구하며 과장되고 커다란 스케일을 강조하는 중국 사이에 한국은 단순하고 절제된 미(美) 안에 에너지를 응축하고 있는 느낌이 있다. 또한 간소한 형태 가운데 정신적인 풍요를 누리며 그 안에 자연과 소통을 중시한다.
한국의 미(美)에 대한 정의
한국적 디자인을 진행할 때 많은 디자이너들은 전통을 생각한다. 전통은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로부터 전해오는 사상, 관습, 행동 양식이다. 전통이란 물리적, 사회문화적 등의 특성을 포함하고 시대 흐름에 변화, 대응하며 연속되는 공존의 개념이다.
일본의 미술 평론가, 야니기 무네요시(柳宗悦, Yanagi Muneyoshi)는 “한국의 미(美)는 눈물이 타고 흐르는 애상의 선”이라고 말했다. 미국인 학자,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은 “한국의 미는 한·중·일 3국 가운데 가장 따뜻하고 친근감을 느끼게 하며 바람직한 중도의 입장에서 균형을 취하는 한국적 미학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했다. 그 외, 기존의 많은 학자들, 디자이너들은 한국성을 자연성, 소박성, 미완성으로 정의했고 자연주의, 순수성, 담백, 단순, 절제, 백색, 여백, 곡선, 견고한 수법, 질적 미, 청초한 색감, 정명한 조형, 선비정신과 정직성, 정숙과 온아의 미, 고담, 청아, 깊음, 담담함으로 한국의 미를 표현했다. 또한 한국적 정서가 담긴 색상은 다채로움보다는 부드럽고 자연스런 단채(單彩)의 정서적 특징을 반영해 담백하고 은근한 품위를 지닌 색으로 나타난다. 차가움이 강한 백색, 원색적인 적·녹·청색의 사용보다는 여과되고 익은 느낌의 온백색, 미색과 같은 자연스레 뒤섞인 조명색으로 표현되며 자연환경과 공간을 조화시킴으로써 단순히 빛을 비춰짐으로써 밝음이 아닌, 빛을 담아 가지고 있는 공간으로 나타난다.
한국 최고 미(美)의 경지
한국의 미를 이야기할 때 자연 즉, 도교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자연을 인간이 정복할 대상으로 삼았던 서구식 사고에 반해 우리네 공간은 자연과 어우러지고 자연과 상호조화 관계로 바라보며 소통을 중시한다. 사방탁자와 같이 기둥만 남아있는 독특한 구조와 소박성과 단순성을 지향하고 있으며 본질적인 내용과 소재의 자연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해 기교를 최소한 억제한다.
도교를 대표하는 노자는 한국의 미를 미무미(味無味)라 정의했다. 미무미 개념은 ‘맛이 없는 것이 가장 맛이 있는 것’이며 최고 미의 경지라 했다. 이는 백자의 백색은 색이 없는 것이 아니며, 한국의 미는 마치 빈 것 같지만, 그 안에 무한한 무언가가 있는 듯한 느낌이다. 즉, 빈 것 같음을 조형적으로 성취시킨 것, 비어 있는 담백한 공간은 빈틈없이 채워져 있는 공간을 압도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 압도감은 기교나 문양 등으로 채워진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음으로부터 오는 채워짐이다. 비어 있는 것은 항시 열려있고 자연을 향한다. 비어 있음의 사고는 채우려는 의식으로 살아온 한국인의 기질과 성향이며 비어 있는 사상은 한국적 미학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미무미는 공간의 재료에 있어서 본 재료의 재질과 원래의 형태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물성에 충실하고 형태적, 조형적인 면에서 자연스럽고 담백함 추구한다. 이는 무기교의 기교, 민예적인 것, 비정제성, 무관심성, 구수한 큰 맛, 은유와 비워진 것, 여유와 담백한 것, 깊음과 무심한 것으로 정의된다.
은은하고 부드러운 반사의 빛을 가진 한국
우리의 옛 공간은 한지로 투과된 자연광을 방안에서 하루 종일 느낄 수 있는 자연과 함께하는 라이프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한국은 무엇보다 빛을 중시하는 미를 추구한다. 한국의 빛은 부드러운 반사(反射), 절제하는 여과(濾過), 자연스러운 확산(擴散)을 통해 빛의 다양성을 추구하고 이러한 빛의 활용이 오래전부터 한국인의 정서를 형성하고 있다. 한국의 마당은 반사율이 좋은 백색토로 돼 있어 빛을 반사시켜 한지를 투과해 실내에 고르고 자연스러운 빛을 확산시킨다. 이는 절제되고 순화된 빛으로 눈의 피로를 덜어주며 차분하고 잔잔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빛과 한지가 이루어내는 은은하고 정감어린 분위기는 한국의 또 다른 멋스러움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빛이 들면 양산을 쓰는데, 서양인들은 빛을 그대로 즐긴다. 눈부신 직사광선이 아닌 은은한 빛을 선호하고 반사하는 아른거리는 겸손함이 있는 자연스러운 빛, 즉 밝히기 위한 조명으로서의 빛이기 보다는 감동으로서의 빛을 중시한다. 이는 한국인이 구름 속에 가린 은은한 달빛을 더 선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국인은 어둠을 부정적인 요소로 생각하지 않으며 낮에 자연광에 순응하는 것과 함께 밤의 어둠에 순응하며 어둠으로 하여금 감상할 수 있는 달빛을 보고 소원을 비는 정서는 빛을 통해 상상의 감수성을 풍부하게 해준다.
한국적 미를 담은 호텔
오월호텔은 한국의 청빈한 멋과 풍류를 담은 호텔로 가장 한국적인 오리지널리티를 나타내려했다. 오월호텔은 환대라는 콘셉트를 바탕으로 한국적 미에 관한 스토리가 많은 전라도 담양의 아이덴티티를 담았다. 외관은 유리 안에 천으로 마감해 한복에서 느낄 수 있는 부드럽고 온화한 질감을 구현했고 거실, 안방, 화장실까지 한옥의 채의 개념을 도입했다. 공간의 목적에 따라 분리됐지만, 공간이 중첩된 디자인으로 깊이 있는 공간감을 표현하고 시각의 연속된 시퀀스를 형성한다. 또한 곳곳에 위치한 중정은 한국의 차경(借景)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반외부 공간으로 자연요소를 실내유입을 시도한 사잇 공간이다. 눈앞에 담양이 펼쳐지는 대나무 숲에 오랜 시간 한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돌이 놓여있는데, 공간의 어느 위치를 가도 풍경이 그대로 보인다. 오월호텔은 커다란 창으로 통해 한국의 4계절과 눈, 비, 바람, 소리를 느낄 수 있고 자연이 하나의 멋진 그림이 되는 공간이다. 이는 자연을 배척하는 것이 아닌 향유의 요소로 이용하고 한국적 스토리와 정서를 잘 반영해 현대적인 감각으로 실현시킨 곳임에 틀림이 없다.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의 리뉴얼한 스위트룸은 ‘문’이라는 주제로 전통을 시각화했다. 디딤, 여밈, 문이라는 3개 언어를 통해 한국 전통 공간의 높낮이를 공간에 적용했고 무엇보다 이 호텔은 공간에서 창이 차지하는 비중은 꽤 크게 디자인해 한국의 빛의 감성인 부드러운 반사(反射), 절제하는 여과(濾過), 자연스러운 확산(擴散)을 잘 표현했다. 빛을 품은 창호지는 단순한 종이의 차원을 넘어 한지의 아름다움 덕분에 전통적이지만 현대적인 미감에도 잘 어울리게 연출됐다.
현 시대의 진정한 한국적 콘텐츠가 담긴 호텔 디자인이 필요한 시점
필자는 이번 호텔 디자인 제안을 통해 한국의 디자인의 정체성에 대해 그동안 서구 중심의 디자인 생각과 한국의 미를 표면적 접목에서 진일보해 한국의 문화 정체성과 한국적 호텔 디자인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진보적인 방향성에 대해 연구할 가치를 느꼈다.
이제 호텔은 단지 숙박시설에 그치는 것이 아닌 도시, 더 나아가 한 나라의 문화를 체험하는 목적지가 되고 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란 말이 있다. 전 세계가 열광하고 있는 K-pop이 이 말을 입증했다. 이제는 K-Pop을 넘어 K-Architecture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전 세계가 한국에 대한 건축, 공간. 디자인에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기존에 많은 학자, 디자이너들이 한국 교유의 전통 및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한국적 디자인에 대한 다양한 담론 및 연구들이 많이 진행해 왔으나, 한국은 상대적으로 디자인 선진 국가들에 비해 디자인의 개념을 서구를 통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근, 현대 디자인의 역사가 약하고 한국 디자인 방법론에 있어서 서구적 가치관에 입각한 연구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디자인 연구에 있어 피상적인 문화 해석력과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하지 못해 단기적 서구 트렌드를 따라가는 주체성 없는 디자인을 양산, 국적 불명의 정체성 없는 디자인이 범람하고 있는 예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디자이너로서 우리도 파악 못한 한국적 디자인을 단순히 전통에서 찾고 있다.
이제는 디자인, 건축계에서는 더욱더 ‘한국 DNA’ 찾기에 고심하면서 K-Architecture를 위해 한국의 빛, 색, 공간의 의미를 어떻게 적응, 변형, 확장해 현대적 공간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더욱더 연구해야한다. 또한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국인이 바라보는 한국의 이미지 접목도 매우 필요하다. 단순히 한국의 미를 담으려 노력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외국인들이 한국에 대해 기대하고 예상하는 것을 만족시켜 줘야한다.
어느 출장길에 만난 콜롬비아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서로 상대방 나라를 방문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는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물었다. 그 친구의 대답은 명료했다. “한국은 길거리에 로봇이 즐비할 것 같다.” 저 머나먼 남미 사람이 한국은 IT강국으로 세련되고 최첨단의 도시로 전 세계 중 가장 미래적이고 트렌디한 곳으로 상상하고 있었다. 외국인들은 더 이상 한국을 한옥에 단청이 있는 오방색의 나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의 멋지고 세련된 이미지 바탕으로 중국, 일본과는 차별화된 한국의 진정한 공간미를 제공해 전 세계가 K-Architecture에 열광하는 그날까지 한국적 오리지널리티가 담긴 호텔 디자인 개발에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규홍
ASC Studio 대표
지난 13년 동안 LG하우시스에서 공간디자인 컨설팅 등 책임연구원을 맡아오다 올 4월 독립해 ASC Studio를 설립하고 현재 국민대학교 겸임교수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