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 흥정하는 사람들 변호사들은 주로 손으로 들고 다니는 서류가방을 애용한다. 설정 자체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도, 천원짜리 변호사 천지훈도, 동네에서 찾아볼 수 없는 조들호도 그랬다. 백팩은 있지만 드물다. 서류가 많은 경우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변호사도 봤는데 관심 받기엔 좋다. 서류가방을 사러 사무실 인근 가게에 들렀다. 펠트 원단의 남색 가방을 고른 뒤 사장님과 약간의 흥정 후에 샀다. 사장님은 “요즘 시국이 시국이라 어쩔 수 없이 이 가격에 파는 것”이라며 “이렇게 팔아봐야 남는 거 없다.”고 하셨다. 나는 순간 나에게 남는 것 없이 물욕을 뒤로 한 수많은 선인(善人)들을 떠올렸다. 이 가격으론 인건비도 안 나온다며 회원권을 팔았던 두피 케어 사장님, 노트북 가격이 원가 이하라며 자신이 사면 안 되겠냐고 바람을 잡았던 전자상가 옆집 사장님, 이런 조건으로 차를 파는 것을 알면 자신이 시말서를 쓸 수도 있다며 처음 본 나를 위해 직(職)까지 걸며 헌신했던 어느 자동차 딜러를 떠올렸다. 물론 믿지 않았다. 그렇다고 저들이 사기를 쳤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재화를 사며 지불할 돈과 내 행복의 총량증가를 적절히 비교한 뒤 비용을 치렀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
법원 앞 피켓드는 사람들 세상에서 중요한 사안을 다룰수록 쾌적함이 중요하지만 법정은 예외다. 재판의 중요성이야 말할 필요도 없지만 법정 안은 덥고 뭘 마시기도 어렵다. 증거기록 10만 페이지가 넘는 사건에서 수 시간째 계속되는 증인신문은 머리 뿐 아니라 몸으로도 버텨내야 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그 무더위에도 피켓을 들고 법원 근처에 서 있는 트렌치코트 중장년들이 많다. 법원 정문 앞은 몇 달째 ‘모 재판부의 농간’으로 재산을 빼앗긴 할머니가 확성기를 들고 있다. 그 뒤엔 “모 검사가 범죄자와 유착했다.”는 내용을 호소하는 어느 아주머니가 말없이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법원 앞엔 이렇게 시위하는 분들이 대상만 달라질 뿐 항상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상상을 했다. 이 길을 수없이 지나다녔을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라도, 그들에게 무슨 사정인지 이야기라도 듣고 싶다며 말을 걸어본 이가 있을까? 판사는? 변호사는? 그랬다면 저 분들 주장의 논리적 정합성과는 관계없이 기분은 좀 나아질까? 살천스런 생각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가 곧 있을 재판 생각에 나 역시 다른 이들처럼 서둘러 발걸음을 뗐다. 직업상 매일 보는 사람들이 소송 당사
호텔직원의 정의 호텔에는 여러 업무를 하는 직원들이 있다. 우리가 흔히 보게 되는 객실부, 식음료부 직원에서부터 가끔 방에 문제가 생기면 보게 되는 시설부 직원들까지. 이들 한 명 한 명은 호텔 브랜드의 프로퍼티가 돼 호텔을 대표하고, 그들 나름의 프로페셔널함을 대외에 공표한다. 그렇게 형성된 호텔에 대한 이미지는 브랜드를 형성하고 고객은 이를 바탕으로 브랜드 로열티를 쌓게 된다. 그런데 호텔을 구성하는 인적자원은 호텔 직원뿐일까. 수많은 호텔들이 사라지고 리모델링되고 신축되는 현장에서, 호텔 건물을 구축, 건축하는 것은 또 다른 이들의 몫이다. 이들은 ‘호텔리어’는 아니지만, 분명 오늘날 호텔을 있게 한 부분으로서 ‘노동자’의 지위를 갖는다. 호텔이 탄생하기 위해선 너무나 당연하게도 ‘건축’이 필요하다. 설계도면, 현장개설, 인력발령을 아우르는 공사계획이 설립되면 가설도로 수도 및 전기 인입 등 가설공사가 진행된다. 이후 건축물의 기초 및 터를 팔 것이고 문화재라도 발견되면 공기(工期)는 길어진다. 그리고 건축물의 윤곽을 드러내는 골조공사가 필요하고 가장 중요한 외부 및 내부 마감공사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관할 관청의 준공허가를 받는다. 이런 건설 현장에
변화를 거부하는 ‘클래식 음악’ 우리가 흔히 말하는 ’클래식 음악‘은 대략 1700년에서 1900년대 초까지의 고전음악을 지칭한다. 사실 1700년 이전에도 북스테후데, 퍼셀 등 불후의 음악가가 있었고 2000년대에도 교향곡, 오페라를 넘나들며 음악의 지평을 연 쇠렌 닐스 아이버그가 있지만 이들은 잘 연주되지 않는다. 까닭은 고전음악의 레퍼토리는 약 200여 년의 기간인 황금기(1700년대 초~1900년대 초) 안에 멈춰있기 때문이다. 50년 전에도 우리는 베토벤, 쇼팽, 브람스를 들었고 50년 뒤에도 베토벤, 쇼팽, 브람스를 들을 것이다. K-Pop은 말할 것도 없고 문학, 무용, 시각디자인 모두 진화한다. 사진의 등장으로 끝났다는 선고를 받았던 시각 미술은, 20세기에도 사실주의, 입체주의, 인상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으로 변화해 대중의 지지를 받았고 무용 역시 마사 그레이엄, 제롬 로빈스, 애그니스 데밀, 폴 테일러, 저스틴 펙 등의 수려한 작품이 쏟아졌다. 록음악 역시 비틀즈의 브리티시 뮤직, 지미핸드릭스, 핑크 플로이드의 사이키델릭을 거쳐 소프트록, 헤비메탈, 얼터너티브 등 여러 사조를 창출해 서로가 역진하며 대중의 선택을 받았다. 그런데 클래식은
서비스산업 지형의 변화 영화 <우아한 세계>에서 중년의 의사는 강인구(송강호)를 향해 말한다. “술 좋아하시죠? 혈압도 안 좋아서 2주 정도 약처방해 드릴게요.” 그러고는 눈도 쳐다보지 않은채 당뇨병 진단을 내린다. 강인구는 “다 끝난 겁니까?”라고 묻는다. 끄덕이며 끝났으니 나가라는 의사에게 강인구는 소리친다. “이 양반아 아니, 뭘 먹으면 안 되는지, 얘기를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당뇨가 감기야?” 위 장면은 클립으로 편집됐고 많은 호응을 받았다. 까닭은 병원은 대중에게 권위적이고 불친절한 공간으로 각인된 탓이다. 이 중에서도 상급 종합병원인 대학병원은 권위적, 불친절의 대명사였다. 물론 사명감을 가진, 친절한 의사가 훨씬 더 많다. 그럼에도 1번의 불친절은 9번의 친절을 쉽게 덮는다. 배달 플랫폼 자영업자들이 악평 하나에 매달리는 것처럼. 그런데 최근 발표된 국가고객만족도(NCSI) 조사의 1위 기관이 어딘지 아는가. 대학병원이다. 세브란스 병원은 입원생활에 불만을 제기하는 환자 목소리를 복음이라 부른다. ‘설명간호사’를 배치했고 엘리베이터에 환자용 의자를 설치했으며 의사라 해도 동의 없이 ‘함부로’ 입원 공간에 들어가지 않는다. 병원의 만
Plastic Straws Aren’t the Problem 스타벅스를 기점으로 많은 커피전문점들이 플라스틱 빨대를 종이 빨대로 교체했다. 종이 빨대로 교체하는 것은 많은 용기가 필요한 작업인데 이게 가능한 곳은 선두주자인 스타벅스 정도다. 2018년 첫 종이빨대를 도입한 스타벅스는 종이 빨대 사용을 통해 연간 126t, 1억 800만 개 이상의 플라스틱 빨대가 절감됐다고 홍보했다. 많은 국가에서 플리스틱 빨대 사용을 금지한다. 영국은 2021년부터 플라스틱 빨대가 전면 금지됐다. 그런데, 커피의 본령(本領)이 무엇인가. 맛이다. 어떻게 마시나. 컵으로 마시거나, 빨대로 마신다. 그런데 종이 빨대는 음료와 함께 담긴 채 몇 분만 지나도 흐물흐물해지고, 맛까지 변화시킨다. 적어도 종이 빨대는 환경이 아닌 커피 자체에 충실한 아이템은 아니다. 그럼에도 환경을 위해서라면 인내할 수 있겠다. 단기적 미각 희생으로 생태계를 살릴 수만 있다면. 플라스틱 폐기물로 죽는 바다거북이 얼마나 될 것 같은가. 연간 1000마리다. 그런데 이에 대한 제대로 된 사실 검증, 없다. 어느 전문가가 말하고 그걸 단체가 공표해 언론사가 받아쓰면 그런가 보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노동자의 값 ‘사람이 중하냐 돈이 중하냐’의 문제는 철지난 논의다. 우리 사회가 사람에게 값을 매기기 때문이다. 인명이 돈으로 환산돼 거래되는 사회에서 중요한 건 돈으로 매기는지 여부가 아니라 얼마를 매길 것인가다. 이 문제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부터 부딪힌다. 모든 인명의 값은 같은가. 살기 싫어하는 청년과 삶에 대한 애착이 넘치는 중년의 목숨값은 같을까. 모든 조건이 같되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노인과 창창한 초등학생의 목숨값은 같은가. 그렇다면 흉악범과 평생을 남을 도우며 살아온 테레사 수녀의 목숨값은.... 언뜻 쉬워 보이면서 복잡한 이 문제가 대대적으로 도전 받은 것은 9.11. 테러 시기다. 미 정부는 각 희생자의 기대수명, 연봉, 피부양자 수 등을 고려해 목숨값을 환산했다. 이 환산식보다 더 불평등한 건 왜 9.11. 테러만 국가가 보상해 주는가였다. 앞서 일어난 트럭 폭탄 테러나 이후의 보스턴마라톤 테러의 희생자들은 국가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했는데 말이다. 목숨의 가치를 정하는 문제는 불편하지만 일상에 생각보다 쉽게 스며든다. 기업이 발생가능한 모든 사고에 대한 100퍼센트 안전장치를 만들고 회사를 운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사고 확률과
법정 안, Winner takes it all 법은 따뜻하지 않다. 차갑지도 않다.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하되, 기계적으로 적용된다. 따뜻한 가슴으로 내린 따스한 판결은 반대편 당사자를 잔인하게 말려 죽인다. 얼마 전, “한 번도 고통 받은 적 없는 사람이 아닌 인간미가 있는, 상처받은 적 있는 이의 판결을 받고 싶다.”라는 모 유명인사의 칼럼을 봤다. 위험한 발상이다. 상처는 관점을 바꾸고 그게 판결에 투영되면 또 다른 이에게 상처가 된다. 법은 우리 생각만큼 합리적이지도 않다. A가 B에게 약정금 1억 원을 달라는 소를 제기하고 B가 여기에 줄 이유 없다고 항변하면, 판결은 1억 원을 주느냐 마느냐로 나온다. 중간에 A와 B의 관계에 따라 40%만 줘도 되겠다 등 여러 사정이 나올 법도 하지만 그런 것은 반영될 수 없다. 성추행도 마찬가지다. 추행이냐 아니냐에 대한 결론만 나올 뿐, 범죄는 아니지만 위자료 정도는 줘야 할 추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대통령 탄핵 역시 탄핵이냐 아니냐이지, “당장 탄핵시키긴 좀 그러므로 임기 1/2만 하는 것으로 하시죠.” 따위의 결론은 불가능하다. 수많은 의사면허 취소, 건축허가 취소, 그외 여러 정치적 사건까지
친절해야만 하는 직업의 애로 누군가에게 친절하기란 쉽다. 그런데 친절해야만 하는 것은 어렵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비스업은 힘들다. 직업장에서 나의 애티튜드와 레퍼런스를 일치시켜야 하기 때문. 그럼에도 이게 업무에 도움이 된다. 의뢰인이 아무리 했던 질문을 또 하고, 쓸데없는 걱정에 의한 가설에 근거한 염려스러운 시나리오를 많이 말해도, 당사자가 처한 상황이 돼보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변호사는 듣는 직업이다. 의뢰인과의 관계에서는. 법정에선, 말하는 직업이다. 구술이든, 서면이든 침묵하지 않는다. 초년차 때부터 지금까지 법정의 무거운 침묵을 깨고 이의를 제기하거나, 재판 절차에 의견을 얘기하는 일은 긴장되지만 그래도 항상 했다. 법정에서 좀 더 말할 걸 후회했던 적은 있어도 말했던 것을 후회한 적은 없다. 그렇지만 내(대리인)가 하는 말이 곧 당사자(본인)의 말이 되는 것, 이건 생각보다 압박이 크다. 그래도 대부분의 시간을 클라이언트를 만나거나 법정에 가기보단 홀로 방에 앉아 서면을 쓰는 변호사와 달리, 호텔리어는 대부분의 시간을 고객을 만나는 데 쓴다. 그래서 친절해야만 하는 시간이 더 길다. 용모도 단정해야 하고, 서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이직이 잦은 호텔업계 ‘호텔’의 이미지가 지금보다 더 공고했던 그 옛날, ‘호텔경영학과’ 인기는 높았다. 호텔 컨시어지가 주는 단정한 이미지를 소비하고, 세련된 구조와 커다란 건물, 그것을 갖춘 호텔을 장래에 경영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실상은 다르지만 수준 높은 호텔리어에게는 높은 역량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훌륭한 인적 자원 확보는 호텔에게는 지상과제다. 필자가 아는 훌륭한 호텔리어란, 한국 뿐 아니라 어느 나라 어느 호텔에 가도 수준급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결국 호텔업의 본령이란 고객을 위한 진심일진대 외국어 능력, 적응력, 애티튜드를 갖춘 이들은 미국에서도 유럽에서도 동남아에서도 모두 필요로 하는 인재들이다. 국경 장벽이 낮은 호텔업계 특성상, 인턴 모집, 이직 역시 전방위적이다. 메리어트 인터내셔널은 관광학 계열 학생들을 뽑아 비자를 주며 해외 호텔에서 근무시키기도 하고, 힐튼 역시 미국 곳곳에서 한국 학생들을 채용한다. 이것이 가능한 까닭은 기본적인 영어 소통 능력만 있으면 그 외에 요구되는 서비스 역량은 어느 국가라도 다를 게 없는 덕이다. 기회가 많다는 말은 턴오버도 많다는 뜻. 그래서 이직이 잦다. 국가의 장벽도 없는데
좋은 호텔, 나쁜 호텔의 선택기준 살다보니 좋다고 하는 건 실제 해보니 효과가 없기도 하고 때론 더 나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운동을 매우 좋아하는데 무엇이 좋은 스쿼트 자세인지는 운동하는 사람들마다 다르다. 누군가에겐 하체 건강을 위해 필수적인 동작이 누군가에겐 무릎을 닳게 하는 치명적인 동작이 된다. 그래서 좋다고 하는 것은, 나의 것으로 소화하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 발품을 팔고, 책을 읽으며, 주변에 묻는다. 그래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나는 독서, 음악의 영역에서 그런 사람을 찾았고 내가 존경하는 그 사람이 권하는 책, 음악은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읽고 듣는다. 그런데 나쁘다고 하는 건 대개 나쁘더라. 예컨대 우리가 가장 관심 있는 건강만 하더라도 영양제는 뭐가 좋고, 음식은 뭐가 좋고 또 미라클 모닝이니 올빼미의 기적이니 하며 따라하지만 그게 실제 좋은지는 잘 모른다. 그런데 과음을 하지 않거나 과자를 줄이거나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은 그것을 하는 것보다 더 건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언가 좋게 만들고 싶다면 무엇을 해야 할지 찾기보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찾는 것이 베스트다. 그렇다면 가지 말아야
좋은 호텔이라는 착각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용어 하나에 인생이 바뀌는 재판 전장에 있으면 말의 의미에 집중하게 되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은 어려운 정치수사를 위 말로 쉽게 풀어냈다. 정치란 그런 것이다. 무엇이 옳으냐 이전에, 무엇이 문제인지를 쉽게 설명하는 것, 어차피 국민 뜻대로 하지 않을 것인데 뭘 하는지는 알아야 한다. 좀 더 어려운 다른 정치인의 말들 가운데에는 이런 말이 있다. “비록 재판은 이러하지만, 진실은 밝혀질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발견되는 것도 아니다. 발견은 존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아주 뻔한 문제조차 사실 정답을 모른다. 누군가에게 구름을 그리라 했는데 꽃을 그렸다면 그것은 구름이 아니다. 하지만 구름을 그릴 때 어떻게 그려야 참인가? 내가 그린 구름과 당신이 그린 구름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 다른 구름 중 무엇이 구름에 가까운지 선택하는 것. 그것이 구름 속 진실이자 명명백백한 구름 위의 진실이다. 이렇듯 진실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선택하는 것이다. 예술뿐 아니라 판결조차 (대부분의 경우) 기실 ‘상대적’이다. A는 했다 하고 B는 안 했다
와인과 호텔의 셀링포인트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 사이에는 요즘 이런 말이 돈다. “오늘 사는 와인이 가장 싸다.” 와인이 점점 대중화되고 자본이 몰리면서 와인 가격은 하루가 다르게 상승한다. 처음엔 5대 샤또니 슈퍼투스칸이니 하는 유명제품에 골몰하다 포므롤, 부르고뉴 와인을 거쳐 미국 컬트와인에 이르다 보면 병당 수백 만 원은 우습다. 좀 유명하다는 와인의 히스토리를 보면 무슨 표트르 대제가 수입을 지시했다느니 루이 14세가 사랑했다느니 하는 따위의 복잡한 서사를 셀링포인트로 하는데 큰 의미가 있는지는 글쎄다. 우리가 먹는 이천 쌀도 임금에게 진상되던 것인데[금양잡록(1491), 중보산림경제(1776) 참조]... 그런데 호텔 관련 히스토리는 생각보다 드물다. 역사가 와인보다 짧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공간의 특수성 탓도 있을 것이다. 어느 호텔에 얽인 일화가 있을 때마다 ‘한가로이’, ‘누구랑’, ‘그렇게 사치했는지’ 의문부호가 따라붙거니와 호텔은 순간을 선물할 뿐, 낭만으로 전승(傳承)되는 공간은 아닌 것이다. 그래도 찾아보면 제법 많다. 마이클 잭슨이 투숙했던 서울신라호텔, 한미정상회담이 열린 롯데 뉴욕 팰리스, 그리고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이 열린 카펠라 싱
우리는 시간개념에 집착한다. 시간을 이해하고 측정하고 경험한다. 재판에서 중요한 것도 시간이다. 결국 모든 죄는 ‘시간’으로 환산된다. 돈 문제 역시 마찬가지. 액수 이상으로 시간이 중요하다. 복잡한 민사사건의 경우 1심, 2심을 거쳐 3심으로 확정되기까지 3~4년은 족히 걸리는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지연손해금 이율은 무려 연 20%에 달했다. 만약 10억 원을 청구하고 승소판결을 4년 뒤 받았다면 이자가 10억 7000만 원에 달해 원금 10억 원보다 많게 된다. 이런 큰 사건이 아니어도 시간은 언제나 중요한 화두다. 내가 지금 쓰는 이 원고도 며칠 늦는 것만으로 편집자님이 엄청난 고통을 직간접적으로 호소하시니,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시간은 우리에게 수수께끼다. 자연 현상일까 아니면 편의적 도구(발명품)일까. 유럽의 지성이라 불리는 알렉산더 데트만은 저서 <시간의 탄생>에서 “시간은 초침의 움직임으로 측정되고 초침의 움직임은 시간이 흘러야 비로소 가능하다.”며 둘이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논증했다. 리하르트 바그너가 1882년 작곡한 오페라 ‘파르지팔’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더 극적이다. 늙은 기사가 전설의 성배를 사수하고 있었는데 어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