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값
‘사람이 중하냐 돈이 중하냐’의 문제는 철지난 논의다. 우리 사회가 사람에게 값을 매기기 때문이다. 인명이 돈으로 환산돼 거래되는 사회에서 중요한 건 돈으로 매기는지 여부가 아니라 얼마를 매길 것인가다.
이 문제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부터 부딪힌다. 모든 인명의 값은 같은가. 살기 싫어하는 청년과 삶에 대한 애착이 넘치는 중년의 목숨값은 같을까. 모든 조건이 같되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노인과 창창한 초등학생의 목숨값은 같은가. 그렇다면 흉악범과 평생을 남을 도우며 살아온 테레사 수녀의 목숨값은....
언뜻 쉬워 보이면서 복잡한 이 문제가 대대적으로 도전 받은 것은 9.11. 테러 시기다. 미 정부는 각 희생자의 기대수명, 연봉, 피부양자 수 등을 고려해 목숨값을 환산했다. 이 환산식보다 더 불평등한 건 왜 9.11. 테러만 국가가 보상해 주는가였다. 앞서 일어난 트럭 폭탄 테러나 이후의 보스턴마라톤 테러의 희생자들은 국가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했는데 말이다.
목숨의 가치를 정하는 문제는 불편하지만 일상에 생각보다 쉽게 스며든다. 기업이 발생가능한 모든 사고에 대한 100퍼센트 안전장치를 만들고 회사를 운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사고 확률과 그에 따른 희생자의 목숨값을 산술해 의사결정을 내린다. 사적 영역뿐 아니라 공적 영역도 그렇다. 모든 오염 물질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적당히 감당 가능할 수준까지 기준치를 만든다. 그 적당한 선 안에 들지 못하는 이들이 소수의 희생자이고 그들은 오늘도 소스배합기에 말려들어가거나 토사에 매몰돼 뉴스를 장식한다. “○○세 청년노동자의 죽음, 정부와 기업은 무엇을 했나”를 진단하는 뉴스가 나오고, 전문가 인터뷰가 등장하며 기업의 사죄가 이어지면, 적당한 시점에 국회의원의 꾸짖음이 나오고 정부의 보상안 대책이 나온다. 이 모든 과정에 하나도 위로받지 못할 희생자 영혼의 가족들은 급조된 ‘중대재해처벌법등에관한법률(이하 중대재해처벌법)’의 효능도 느낄 새 없이 눈으로 피를 흘려야한다.
노동현장은, 너무나 위험하다. 그래서 사업주들에게 ‘이윤’ 보다 ‘안전’ 조치 의무를 부과해, 위반할 경우 강하게 처벌하겠다는 것이 새로이 입법된 중대재해처벌법이지만 효과는 없다. 사실 대기업 현장은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재해는 가난한자들만 골라 살인해 나간다. 열악한 조건 하에서, 한 푼 더 벌려고 원가 절감하고 2인 1조는 꿈도 못 꾸는 소규모 사업장은 애초부터 중대재해처벌법 적용대상에서 제외됐다. 처벌도 약하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후 3분기까지 적용된 재해 사고는 141건이다. 사망자는 얼마나 될 것 같은가. 2건 빼고 모두 사망자가 나왔다. 하지만 기소된 사건은 단 1건에 불과하다.
중대재해처벌등에관한법률 제1조(목적) 이 법은 사업 또는 사업장, 공중이용시설 및 공중교통수단을 운영하거나 인체에 해로운 원료나 제조물을 취급하면서 안전ㆍ보건 조치의무를 위반하여 인명피해를 발생하게 한 사업주, 경영책임자, 공무원 및 법인의 처벌 등을 규정함으로써 중대재해를 예방하고 시민과 종사자의 생명과 신체를 보호함을 목적으로 한다. |
노동자의 목숨값이 노동자의 목숨을 위협하는 현실
목숨값은 단어 자체로 불편하지만, 위의 산업재해 현실에서 어떻게 편한 질문이 가능하겠는가. 노동자가 산재로 사망을 한 경우 책임주체의 한 사람당 평균 벌금 액수는 450만 원에 그쳤다. 지금의 사고들은, 노동자의 목숨값이 낮게 책정됐기에 일어나고 있고, 그렇게 저렴히 책정된 가격은 칼날이 돼 노동자를 위협한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계기를 생각해본다. 구의역 스크린 도어에, 태안화력발전소의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서 사라진 젊은 목숨을 계기로, 노동자의 목숨을 담보로 돈을 버는 기업주를 가중 처벌해야 한다는 뜻이 모인 것이 기본 정신이었다. 그런데 이윤추구가 지상과제인 사업주 입장에서, 목숨값보다 비싼 스크린도어를 설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 모두 비행기를 타다 사고 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지만, 나의 비행만은 별일 없을 것이라 믿고 타는 것처럼 사업주들은 아직도 사고 나지 않을 확률에 베팅하는 것이다. 그리고 재수 없게 걸린 몇 사업주만 교도소에 보내면, 그러면 이 사회는 할 일을 다한 것일까.
그래서 나는 노동자의 목숨값이 다시 다른 차원에서 논의돼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의 생명이 스크린도어보다, 보호장구보다 낮게 매겨진다는 것은 그 목숨값은 물건보다 가치가 낮다는 뜻이다. 소규모 사업장이 아닌 태안화력발전소의 사례를 보라. 2인 1조 교대근무 수칙을 지킬 수 없었던 20대 청년이 핸드폰을 키며 근무하다 벨트와 함께 스러져갔을 때 사회는 평온했다. 여야를 막론하고 국회에서, 정부에서 권력을 잡은 누군가는 노동운동을 했고 누군가는 시민운동을 했으며 누군가는 사정(司正)기관의 경력을 팔아 시민/노동친화적인 프로파간다로 우리들의 표를 모았다.
대학생 때 고작해야 학력고사뿐인 지적자본으로 조악스레 번역된 사상서들을 통해 유럽 자유주의 브로커 역할을 하며 평등한 세상을 논했고 학벌-사상을 매개로 카르텔을 만들어 사회 지층을 장악했다. 고문의 추억, 노동의 추억, 파업의 추억, 사정의 추억 등을 팔아 국회, 정부, 지자체에 입성해 권력을 잡아 탄생된 중대재해처벌법이 전혀 기능하지 못함을 본다. 모든 것을 정치유일주의로 환원시켜 표 값을 계산하는 저들에게 맡길 것이 아니다. 우린 다시 노동자의 목숨값을 정해야 한다.
여기에 그칠 수 없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 소중해서 값이 매겨진다. 그래서 불편하더라도, 질문을 조금 다르게 던져야 한다.
당신의 목숨값은, 얼마가 돼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