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의 외식 문화에서 ‘페어링’이 주목받고 있다. 음식에 술을, 혹은 술에 음식을 곁들이는 것을 넘어, 각각의 풍미를 극대화하는 전문적인 음식 문화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적게 마시더라도 제대로 마시자.’는 주류 소비 형태가 트렌드로 떠오르며, 음식과 술의 조화를 통해 새로운 미식 경험을 추구하는 푸디(foodie)가 증가했고, 이들이 SNS를 통해 다양한 페어링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하며 페어링 문화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호텔앤레스토랑> 매거진에서는 연말을 맞이해 국내 주류전문가들을 초대해 술과 음식에 대한 좌담회를 열었다. 특별히 지난 6월호 <국내 미식 문화의 성장과 지속가능한 파인다이닝의 발전>에 참여한 ‘강지영 미식 아카데미’의 강지영 원장이 좌장으로 함께 해 논의의 격을 높였다.
사진 조무경 팀장
좌담회 참석자 강지영 미식 아카데미 강지영 원장(좌장) |
반갑습니다. 저는 오늘의 진행을 맡은 강지영입니다. 다양한 일을 하고 있지만 술과 음식 분야에서 32년째 활동하고 있습니다. 원래 전공은 언어학이지만, 외국에서 살면서 요리나 술에 관해 배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쪽 업계로 넘어오게 됐죠. 귀국 후에는 푸드 디렉터로 활동하며 음식문화를 주로 다뤘습니다.
‘페어링’이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불과 10년 전만 해도 아이스 스케이팅을 떠올리거나, ‘믹스 앤 매치’ 정도로만 인식했습니다. 저는 주로 와인 수입 업체나 소믈리에를 대상으로 페어링 교육을 진행했고, 지난 2018년부터는 우리술에도 관심을 가져 전통주와 음식의 페어링 쪽으로도 컨설팅을 하고 있습니다. 몇 개의 팀과 함께 협업해서 이런 내용을 담은 책을 내년에 발간할 예정이에요.
요즘에 들어서야 페어링이 조금씩 유행처럼 번져 여기저기서 거론되고 있는 것을 체감하고 있는데요. 이런 변화에 대해 주류 전문가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합니다. 우선은 한 분씩 소개를 부탁 드립니다.
김성국 저는 조선호텔앤리조트에서 총괄 소믈리에로 있는 김성국입니다. 2007년 일본에서 바텐더가 되고자 입문했습니다. 이후 호텔에서 인턴십을 하는데 정말로 멋있는 소믈리에를 만나게 됐습니다. 당시 바에는 업무를 끝내고 오시는 손님들이 많았는데, 매일 웃으면서 손님들 이야기를 들어 주고 샴페인을 따서 축하해 주는 모습들이 상당히 멋있어 보였습니다. 그때부터 와인을 배우게 됐습니다. 도쿄에서의 근무를 시작으로, 2011년부터 줄곧 호텔업계에서 경력을 이어가고 있는데요. 콘래드 서울과 아코르 그룹 페어몬트 호텔의 오픈 준비를 했고, 조선팰리스에 합류해 손종원 셰프가 가진 비전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방향을 다듬고 있습니다. 2년 전부터 글로벌한 수준으로의 업계 성장을 목표로 하는 젊은 소믈리에 크루 ‘쏨즈’의 공동 창립자로 있으며, 다양한 해외 시장과 문화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스토리가 있는 와인페어링, 새로운 베버리지 전략 및 프로모션 기획을 주특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인기 저는 원래 하던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정리하고 인사동에서 맥주 펍(Pub)을 운영하게 되면서 업계 경력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맥주를 공부하려고 보니 관련된 국내도서는 수필집 딱 한 권만 있었죠. 원서를 구해다가 직원들과 함께 읽으며 공부했고, 맥주에 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지식을 나누고자 2015년 ‘비어포스트’라는 매거진을 창간하게 됐는데요. 같은 이름을 사용해, 전 세계 탑티어 맥주를 모아 서브를 하는 ‘비어포스트 바’를 운영 중입니다.
초반에는 소믈리에의 역할만 하다가 맥주의 원형이 궁금해졌고, 영등포 문래동에서 ‘비어바나’라는 맥주 양조장을 시작했습니다. ‘비어바나’는 ‘비어(beer)’와 ‘너바나(nirvana)’의 합성어로, “맥주 한잔으로 열반의 세계로 가자.”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작년에는 한국수제맥주협회장으로 선출돼 여러 맥주축제를 준비하고 있는데요. 최근에는 요코하마에서 일본 맥주협회와 함께 한·일 크래프트비어 페스티벌을 개최해, 맥주문화를 넓혀나가기 위한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윤철중 저는 공학도 출신으로, 반도체 메모리 개발 연구를 하면서 취미로 와인이나 전통주 등의 술을 배웠습니다. 그러다가 사케에 빠지게 돼 온라인 사케 동호회의 운영자까지 하게 됐는데요. 양조장 찾아다니는 것도 좋아해 200여 곳 이상의 양조장을 다녀보기도 했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2년 정도는 세계여행을 하며 각 나라의 음식과 술을 맛봤고, 돌아와서 ‘슈토’라는 니혼슈(日本酒) 전문점을 열어 10년째 운영하고 있습니다. 마니아들 사이에서 유명해져 매장 수를 4개까지 늘렸고, 소규모 양조장도 손님들에게 소개하고 싶어 약 32곳 정도의 양조장과 계약해 수입하고 있습니다. 특히 나마자케(生酒)라고, 열처리를 안 하는 술을 위주로 들여오고 있고요. <미쉐린 가이드>에 선정된 ‘시오(siio)’라는 일본 스타일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함께 운영 중입니다.
이승훈 저는 올해 4월까지 ‘백곰막걸리’라는 전통주 전문점을 8년 동안 운영했습니다. 그보다 훨씬 전인 2010년도, 한 마디로 전통주 업계 기반이 덜 갖춰져 있을 때 처음으로 업계에 뛰어들어 개척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백곰막걸리는 그것의 최종판이었죠. 처음에는 130여 종에 달하는 전국의 다양한 전통주를 갖춰 놓았는데, 8년 후에는 약 380종까지 리스트를 확장했습니다. 서울에서 유일하게 취급하는 술도 여러 개였고, 백곰막걸리에서 아예 처음 출시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죠. 현재는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전통적 교육 기관이나 여러 곳에서 꽤 많은 강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언론에도 꾸준히 글을 연재하고 있어요. 저 역시 전 세계로 여행을 많이 다니는데요, 주로 전통주에 포커싱을 맞춰 다양한 문화권에서 만들어지는 막걸리를 찾아 다닙니다.
외국에서는 페어링, 정확한 용어로는 ‘마리아주’라고 하죠. 앞서 말했지만 20년 전에는 국내에서는 페어링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유튜브에서 한 콘텐츠를 시청하는데, 애주가로 유명한 연예인이 와인 PPL을 하면서 페어링에 관해 이야기를 하더라는 겁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미 대중들도 어느 정도는 페어링이라는 개념에 대해 익숙해지고 있다는 뜻일 텐데요. 왜 갑자기 우리나라에 술과 음식에 대한 페어링 바람이 불었을까, 이런 유행이 특히 작년부터 올해까지 이어지고 있는 원인이 무엇인지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윤철중 저희 매장에서는 캐주얼한 코스 요리도 함께 판매하고 있는데요. 코스 중 3잔은 사케로 페어링을 하고 있습니다. 이걸 10년 전부터 해 오고 있는데, 처음에는 상당히 낯선 문화였죠. 제 경험상으로는 갑자기 부는 바람이기보다, 소비자들이 점차 경제적 여유가 생기며 미식을 추구하게 된 변화의 일환이라 생각합니다.
이인기 우리나라는 유통 구조상 특정 브랜드의 맥주만 소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수제맥주를 접하고 이렇게나 다양한 술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흔히 맥주에는 땅콩과 마른오징어 안주를 곁들이는데, 이것은 마케팅적으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합니다. 전문가들이 조금씩 생겨나면서 제대로 된 페어링을 꾸준하게 제시하고, 여기에 팔로워들이 붙으며 점차 문화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승훈 5년~10년 전까지는 저 또한 페어링이라는 개념에 상당히 낯설었습니다. 그동안에 강의를 해 오며 가장 많이 의뢰를 받는 콘텐츠가 페어링 관련이었는데요. 전통주의 경우 와인이나 사케에 비해 학술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페어링을 함께 논하기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반대로 한식은 페어링의 가장 큰 규모를 차지합니다. 국내 외식산업에서 한식 업장의 비율이 제일 높으니까요. 특히 최근에는 한식 파인다이닝들이 굉장히 많이 생겨나고 있는데요. 이런 곳에서도 와인을 판매해야 하는 비즈니스적 요인들이 있어 전통주의 페어링 입지는 아직 좁은 편입니다. 전통주를 전진 배치하는 곳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기는 하지만, 전통주가 지금보다 더 일반화돼야 페어링 대열에 합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김성국 저는 와인 업계에서 다양한 요리와의 페어링을 경험해 왔습니다. 중식, 일식부터 고급 다이닝까지 다루며, 음식 사이의 대기 시간까지 고려한 페어링을 연구했죠. 특히 한국에 돌아와서는 반찬이라는 독특한 식문화를 발견하고, 이에 맞는 페어링도 시도해 봤습니다.
한국의 페어링 문화가 성장할 것을 예측하고 준비해 왔는데요. 최근 요리사들의 인기 상승과 함께 그 시기가 왔다고 봅니다. 게다가 한식은 와인뿐만 아니라 전통차 등 다양한 음료와의 페어링 가능성이 무궁무진해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또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전 세대보다 확실히 술을 덜 마십니다. 대신 이왕 조금 마시는 것을 맛있게 마시자는 주읜데요. 이와 같은 음주 문화 변화가 페어링 트렌드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시나요?
김성국 과거 세대는 현실 도피나 노동 후 스트레스 해소 수단으로 술을 마셨다면, 요즘 세대에게 술은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선택지 중 하나입니다. 젊은 층은 굳이 술이 아니더라도 행복을 찾을 방법이 많거든요. 따라서 우리 소믈리에들의 과제는 술이 주는 특별한 경험과 가치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달콤한 소테른(Sauternes) 와인과 푸아그라의 페어링처럼 새로운 맛의 발견을 제공하는 것이죠. 특히 지금처럼 한식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시기에, 이러한 특별한 경험을 어떻게 잘 콘텐츠화하고 전달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젊은 세대의 새로운 음주 문화를 만들어갈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승훈 전통주는 2016년부터 지금까지 8~9년간 지속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데, 특히 흥미로운 점은 소비 계층이 MZ세대라는 것입니다. 10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현상이었죠. 최근에는 전통주 전문점뿐만 아니라, 와인, 맥주 등 다양한 주류와 전통주를 함께 취급하는 업장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가 가능했던 핵심 요인은 젊은 세대의 ‘편견 없는 태도’입니다. 과거에는 전통주, 특히 막걸리를 ‘싸구려 술’ 또는 ‘서민의 술’로 여겼지만, MZ세대에게는 이런 고정관념이 없습니다. 이런 수용적인 태도가 기반이 돼, 모든 연령층에서 즐기는 술로 자리 잡아가고 있습니다.
이인기 젊은 세대의 푸드 페어링 문화는 다양성이 특징인데요. 물론 여기에는 장단점이 있습니다. 저는 현재 우리나라에서의 페어링 문화가 롱테일 시장에 있다고 보는데요. 젊은 세대 사이에서 형성되는 관심사가 특히 소셜미디어의 영향으로 자신의 의지보다는 타인의 경험을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고 봅니다. 한 곳에 몰렸다가 곧 다른 트렌드로 옮겨가는 현상이 자주 발생하죠.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진성 덕후’를 만드는 것입니다. 한 명의 덕후가 주변 10명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유행이 아닌 지속가능한 문화로 만들어 가는 것이 핵심입니다. 특히 젊은 세대의 가처분 소득이 적은 현실을 고려할 때, 푸드 페어링을 너무 어렵게 접근하면 안 됩니다. 주변에서 쉽게 시도해 볼 수 있는 페어링부터 시작해, 점진적으로 관심을 높여가는 것이 중요한 것 같고요. 결국 젊은 세대가 이를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취향과 개성을 표현할 수 있게 되면, 단순한 트렌드가 아닌 문화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윤철중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젊은 층의 음주 감소 문제로 업계에선 고민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전통적인 사케보다는 처음 접하기 쉬운 주류를 제안하는 추세입니다. 낮은 도수에 과일 향이 나고 약간의 탄산이 있는, 화이트 와인과 비슷한 느낌의 술들이 그 예시죠. 실제로 제가 매장에서도 젊은 고객들에게 페어링을 추천할 때, 음식과의 조화도 중요하지만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려 합니다. 이런 임팩트 있는 첫 경험이 있어야 다음에도 찾아오고, 점차 전통적인 술까지 즐기게 되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최근 다이닝 레스토랑들은 와인 페어링뿐만 아니라 전통주, 니혼슈, 맥주 등 다양한 주류를 페어링 코스에 포함하고 있죠. 가령 7가지 페어링 중 4~5가지는 와인으로, 나머지는 다른 주류로 구성하는 방식을 사용하곤 합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전통주나 니혼슈 같은 특정 국가의 술을 그 나라 음식에만 국한시키지 않는다는 겁니다. 젊은 세대가 마라탕이나 피자처럼 다양한 나라의 음식을 즐기듯, 술과 음식의 페어링도 더 자유롭고 폭넓게 시도되고 있는데요. 저는 요리를 먼저 전공하고 나중에 술을 공부했기 때문에, 보통 음식을 먼저 선정하고 거기에 맞는 술을 매칭하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특별한 술을 중심으로 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음식이 주가 되고 술이 이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페어링을 구성하는데, 다른 분들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이승훈 여기에 관해 제가 항상 하는 말은 외식 업장을 운영하고 지속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음식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평범한 주류 구성(소주, 맥주, 막걸리 정도)에도 음식이 뛰어난 곳들은 오랫동안 성업하는 반면, 아무리 훌륭한 전통주 리스트를 보유해도 음식이 평범하다면 일시적인 인기에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2000년대 초반, 와인이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많은 와인바가 생겼는데, 당시에는 고가의 와인을 판매하면서도 안주는 매우 기본적인 수준에 그쳤습니다. 반면 레스토랑들은 와인 리스트가 그리 특별하지 않았죠. 시간이 지나자, 와인 시장이 성장했음에도 와인바의 수는 오히려 줄어들었습니다. 대신 와인을 구매할 수 있는 채널(대형마트, 편의점 등)이 다양해졌고, 소비자들은 집에서 혼자 즐기거나 음식이 맛있으면서 동시에 괜찮은 와인 리스트를 보유한 레스토랑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전통주 전문점들도 지금은 늘어나는 추세지만, 일부는 이미 업종 전환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전통주의 온라인 판매가 가능해지고 구매 채널이 다양화되면서, 단순히 특별한 전통주 리스트만으로는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인데요. 장기적으로는 훌륭한 음식을 기본으로 하면서 전통주를 잘 다루는 곳들이 살아남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윤철중 술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술을 우선으로 고려하는 때가 많지만, 그날의 기분에 따라 선택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제 경우 일본에서는 보통 1차로 좋은 음식을 주로 하는 곳을 가고, 2차로 술 전문점을 가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반면 한국은 제대로 된 주류 전문점이 부족한 실정이라, 대신 콜키지가 가능한 맛집을 찾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일본술의 경우, 제대로 된 구성을 갖춘 곳을 찾기가 매우 어렵죠. 실제로 술과 음식 모두를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매장에서 200종 이상의 주류를 관리하다가 100종으로 줄였는데도 직원들이 힘들어합니다. 주류를 제대로 관리하려면 전문 인력이 필요한데, 이는 곧 비용 상승으로 이어져 대중성을 잃을 수 있다는 딜레마가 있죠.
이인기 맥주의 경우, 양조장 투어를 하다 보면 보통 그곳의 특색 있는 맥주를 먼저 고려합니다. IPA, 페일에일, 사워비어 등 각 양조장의 특징적인 맥주를 찾아다니며 즐기는 방식이죠.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다르게 접근합니다. 저는 집에 맥주를 스타일별로 구비해 뒀는데, 그날 음식을 보고 어울리는 맥주를 꺼내 마시기를 선호합니다. 요즘은 편의점에서도 다양한 맥주를 구할 수 있는데, 잘 찾으면 보석이 있습니다. 몇 가지만 집에 사다 놓아도 집에서 음식에 따라 적절한 맥주를 선택할 수 있게 됐죠. 초콜릿케이크에는 스타우트를 매칭하는 식으로요.
흥미로운 점 하나는 우리에게 이미 몸에 배어 있는 ‘페어링 본능’입니다. 비 오는 날 부침개에 막걸리가 떠오르는 것처럼, 페어링 문화는 미각의 진화 방식과 연관이 있습니다. 인류의 미각은 생존을 위해 진화해 왔고, 이런 자연스러운 페어링 감각도 함께 발달했죠. 이러한 본능적인 매칭을 바탕으로,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 새로운 페어링을 발견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김성국 와인은 독특한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데요. 특정 와인의 보유 여부, 적절한 글라스의 구비, 그리고 와인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전문성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80년대 보르도 와인처럼 특별한 취급이 필요한 와인들은 전문성 있는 특정 매장이나 전문가를 찾게 되죠. 그래서 손님들 중에도 저한테 와인을 가져오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저만이 잘 컨트롤할 수 있는 와인이 있는 것이죠.
하지만 젊은 세대의 경우, 술을 선택하는 기준이 좀 다릅니다. 자리의 의미와 목적을 먼저 고려해서 술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친목 도모라면 소맥을, 힘든 하루를 위로하는 자리라면 샴페인으로 시작해서 진한 술로 이어가는 식입니다. 술의 종류에 따라 자리의 분위기도 달라지는데, 전통주는 프렌들리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맥주는 활기찬 분위기를, 와인은 격식 있는 자리나 계약 시에, 샴페인은 특별한 순간을 기념할 때 주로 선택됩니다. 이처럼 술은 단순한 음료를 넘어 자리의 성격과 분위기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저는 확실히 술을 먼저 고르기를 선호합니다.
음식을 평가할 때처럼 페어링도 비슷한 관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셰프는 각각의 요리는 뛰어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지루할 수 있고, 반대로 개별 요리는 완벽하지 않아도 전체적인 구성이 뛰어난 경우가 있죠. 페어링 또한 마치 음악 플레이리스트처럼, 개별적인 매칭도 중요하지만 전체적인 흐름과 밸런스가 더 중요합니다.
과거에는 각 주류 전문가들이 자신의 분야만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와인 전문가들은 와인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다른 술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죠. 하지만 실제로 유명한 와인 양조자들도 일과 후에는 맥주를 즐기고, 그다음 와인, 위스키 등 다양한 주류를 즐기는 것을 보면서 인식이 바뀌게 됐습니다. 현재는 다행히도 이런 편견이 많이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다양한 주류 전문가들이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고 경험을 교환하는 문화가 형성되고 있어, 페어링 문화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요. 이번에는 각자 한 분씩 가장 특별했던 페어링 조합과, 어떤 업장에서도 쉽게 시도해 볼 수 있는 “실패하지 않는 페어링”에 대해 공유해 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김성국 예전에 일본의 이자카야에서 일을 할 때 ‘모찌리도후(찹쌀떡두부)’와 ‘무로겐슈(고도수 사케)’의 조합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쫀득한 식감의 음식과 높은 도수의 술이 만나 만들어내는 매끄러운 조화가 인상적이었죠. 이 경험을 바탕으로, 최근 손종원 셰프가 만든 잔다리 전두부 요리와 페어링을 기획했습니다. 원래는 일본의 겐슈를 사용하고 싶었지만, 한국 레스토랑의 정체성을 고려해 대안을 찾았습니다. 전 세계에서 겐슈와 가장 비슷한 특성을 가진 술을 찾다가 포르투갈의 화이트 포트와인을 선택했고, 이는 제게 있어 매우 성공적인 페어링 중 하나가 됐습니다. 실제로 프렌치 런드리에서 10년 넘도록 세계 최고의 소믈리에라고 불렸던 데니스 켈리(Dennis Kelly)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할 정도로 혁신적이었습니다.
사실 와인에는 절대 실패하지 않는 페어링 방법이 있습니다. 와인은 색깔이 다 다른데요. 음식 색깔에 와인 색깔을 맞추면 무조건 맞습니다. 연두색이면 소비뇽 블랑, 붉은 및의 정도에 따라 피노누아나 까베르네 소비뇽 이런 식으로요. 그것이 최상의 페어링 조합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페어링에 익숙하지 않다면 그것부터 시작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저는 최근 비어포스트 바에서 진행한 ‘스몰 옥토버페스트’에서 선뵌 메르첸(Märzen) 맥주와 프레첼 빵의 조합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3월에 담그고 9월에 마시는 메르첸 맥주는 몰티한 특성이 강한 독일식 라거인데요. 맛있게 숙성된 맥주와 로컬 베이커리에서 특별 주문한 겉바속촉 프레첼의 조합이 훌륭한 페어링을 만들어냅니다. 이는 옥토버페스트의 전통적인 조합을 재현한 것이죠.
제가 지금껏 해 왔던 것 중 가장 익스트림했던 페어링 시도는 홍어와 벨기에 괴즈(Gueuze) 맥주의 조합이었습니다. 천연발효 맥주인 괴즈는 강한 신맛과 특유의 ‘쿰쿰한’ 맛이 특징인데, 홍어의 강렬한 맛과 만나면 전혀 새로운 맛이 탄생합니다. 홍어를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이 조합으로 먹으면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죠. 특히 괴즈의 강한 신맛과 홍어가 만나면서 의외로 단맛이 느껴지는 독특한 페어링이 만들어집니다.
윤철중 매장에서 페어링을 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는 비슷한 걸 매칭하거나 질감 페어링이 제일 좋고,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곁들이는 음식을 활용하는 겁니다. 복어(회)를 먹을 때 산미 있는 폰즈 소스에 찍어 먹듯이, 경쾌하고 산미가 있는 사케를 복어와 함께 먹으면 맛이 잘 어울립니다. 또 일본 사람들이 야키니쿠를 먹을 때 양념한 고기와 밥을 같이 먹는 것처럼, 곡물 감을 잘 살린 사케와 매칭하면 또 잘 맞습니다.
지역성을 활용한 매칭도 재미있는데요. 일례로 나가노 지역에는 사과를 먹고 자란 돼지가 있습니다. 그 지역에서 나는 사과산 많은 사케와 나가노산 돼지고기 요리를 매칭하면 잘 어울립니다. 그 지역 양조장들이 그런 음식에 맞춰 발전해 왔기 때문입니다. 사케는 특히나 다른 술에 비해 아미노산이 5배, 글루타민산이 10배 많아 음식과 잘 맞습니다. 깔끔하고 드라이하면서 적당한 감칠맛이 있어 웬만한 일본음식과 다 어울리죠. 직원들한테도 항상 얘기하는 게, 손님보다 많이 아는 직원은 없으니까 그냥 자신감을 가지라고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걸 자신 있게 추천하면 손님들이 웬만하면 다 좋아하는데요. 업장에서도 이편이 제일 쉽게 페어링을 시도하는 방법일 겁니다.
이승훈 페어링에는 실제 맛의 조화도 중요하지만, 상업적인 측면에서는 손님들의 이해와 기대를 잘 활용하는 게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막걸리와 한식은 사실 안 맞기가 힘들죠. 우리 술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발전해 온 겁니다. 하지만 요즘 손님들은 더 특별한 페어링을 원합니다. 이때 중요한 건 손님들이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활용하는 겁니다. 제가 2016년에 ‘풍정사계 춘’이라는 약주로 페어링을 할 때, 손님들에게 이 술을 ‘화이트 와인 같은 느낌’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달고기구이와 매칭을 했죠. ‘화이트 와인과 흰살생선의 페어링’으로 설명했고요. 달고기는 고등어처럼 대중적이지 않은 한편, 가자미처럼 흔하지도 않아 고급스러운 느낌이 있는 생선인데요. 이런 조합을 설명할 때 손님들이 이미 알고 있는 페어링 지식을 활용하니 훨씬 더 잘 받아들였습니다. 같은 음식과 술을 내더라도, 설명 없이 제공할 때보다 설명을 곁들였을 때 손님들의 만족도가 훨씬 높았습니다. 아직 대다수 전통주 양조장들이 페어링까지 연구할 여력은 없지만, 이런 식으로 손님들의 기존 지식을 활용해 설명하면 훨씬 더 효과적인 것 같습니다.
이처럼 재미있는 페어링 경험들을 나누자면, 의외로 파스타와 막걸리가 잘 어울립니다. 특히 쫄깃한 뇨끼와는 찰떡궁합이죠. 막걸리를 꼭 파전이나 김치전하고만 먹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면 새로운 조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최악의 페어링 경험도 있는데요. 크리스마스 때 자주 먹는 생크림 과일 케이크와 타닌 강한 레드 와인의 조합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는 장면이지만, 실제로는 정말 안 어울리죠. 달콤하고 섬세한 생크림 케이크에는 오히려 새콤달콤한 와인이나 샤토 디켐(Chateau d'Yquem) 같은 스위트 와인과 오히려 더 잘 어울릴 것입니다.
평생 잊지 못할 완벽한 페어링도 있습니다. 2015~2016년쯤 피에몬테에서 경험한 화이트 트러플을 얹은 구운 메추리와 안젤로 가야(Angelo Gaja)의 바롤로(Barolo) 와인 조합이었는데, 지역의 제철 음식과 와인이 만나니 정말 환상적이었습니다. ‘피에몬테에 살아야 되나’ 싶을 정도로요.
대화가 정말 즐거운데, 시간이 한정돼 있다는 것이 아쉽기만 합니다. 계속해서 한국의 소믈리에 교육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볼 텐데요. 국내의 경우 너무 자격증 따기에 치중해 있는 것 같습니다만, 각 분야 전문가들이 보기에 문제점과 개선 방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윤철중 국내의 경우 키키자케시(사케 소믈리에) 과정이 현재 숭실대학교에서 6주 과정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일본은 이보다 더 짧습니다. 현재 교육 시스템의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인데요. 첫째는 교육받는 사람들이 실제 실력 향상보다는 자격증 취득 자체에만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레벨 3를 공부하면서도 느꼈는데, 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시험 합격을 위한 공식을 배우는 것에 더 포커스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교육 제공자들도 자격증 발급 사업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경우 키키자케시 교육 기간이 점점 줄어들어 6주에서 1주, 이틀, 하루, 심지어 온라인 교육까지 생겼는데요. 이처럼 교육기관들이 수익을 위해 자격증을 남발하다 보니, 교육의 질이 떨어지는 것이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인기 주류 교육에서 기초 과정은 꼭 필요합니다. 짧은 기간이라도 엔트리급 교육을 통해 이 분야에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커피 분야는 바리스타 자격증이 있어서 국가 지원도 받고, 카페 창업할 때 기본 자격으로 인정받지 않습니까? 하지만 와인이나 맥주는 아직 그런 체계가 부족합니다. 맥주는 특히나 더 생소한데, 독일 같은 경우 비어 소믈리에 과정이 상당히 잘 갖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비어포스트에서 ‘비어 가이드’라는 민간 자격증을 만들었습니다. 대학교와 협력해 방학 때 4~6주 과정으로 운영하는데요. 맥주업계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 많이 참여를 합니다. 실제로 이 과정을 거쳐 맥주업계에 취직한 학생들도 있고요. 중요한 건 시험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흥미를 끌어내고 다음 단계로 발전할 수 있게 견인하는 겁니다. 아직 한국은 역사가 짧아서 깊이가 부족하지만, 해외 교육기관과 제휴해 함께 발전시켜 나간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성국 자격증에 대해서는 우리가 좀 더 가볍게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자격증이든 마음만 먹으면 다 딸 수 있는데요. 이미 합격하기 위한 커트가 다 나와 있고, 그걸 외우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소믈리에한테 진짜 중요한 건 다른 것들입니다. 손님 대할 때는 역사도 알아야 하고, 추론도 할 줄 알아야 하고, 상상력도 있어야 하고, 말도 잘해야 하고요. 퍼포먼스도 상당히 중요하죠.
고용주 입장에서 보면 또 다른데요. 회계도 할 줄 알아야 되고, 외국어도 해야 되고, 컴퓨터도 다룰 줄 알아야 되고, 매출도 신경 써야 됩니다. 이렇게 실전에서 필요한 능력을 자격증만으로는 알 수가 없죠. 그래서 자격증은 입문할 때 거치는 관문 정도로만 봐야 합니다. “우리 업계로 한번 들어와 보세요.”하고 전하는 초대장 같은 것이랄까요?
이승훈 전통주 소믈리에 자격증도 숙제가 참 많습니다. 생긴 지는 오래됐는데, 따기가 너무 쉬운 것이 문제입니다. 심지어 코로나 때는 실기시험도 안 치렀는데요.
물론 좋은 점도 있습니다. 전통주에 관심 있는 마니아층을 만드는 데는 도움이 됐죠. 문제는 이걸 너무 쉽게 따서 ‘전통주 소믈리에’라고 누구나 말하고 다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제가 이 교육 초기부터 강사로 참여했는데도 ‘자격증이 없느냐’고 놀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큰 문제는 이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이 실제 업장에서 일하는 경우가 현저하게 적다는 것이죠. 국가대표 소믈리에 대회도 10년 넘게 했는데, 현직 소믈리에가 수상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대신 전통주 업계로의 등용문이 돼 버렸어요. 진짜 소믈리에는 업장 경험과 음식에 관한 지식을 모두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밖에도 개선해야 할 문제들은 아직 많습니다.
맞습니다. 지금은 자격증이 전문성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냥 종이 한 장으로만 존재하는 게 좀 슬픈 현실이죠. 앞으로는 이것을 좋은 방향으로 바꿔나가야 할 텐데요. 협회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렇게 전문가들이 모여 모임도 하고, 비전문가들한테 제대로 된 지식을 전파하고, 계속 강의도 하며 알리는 활동들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겠는데요. 페어링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 다른 분들은 어떤 것들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이승훈 전통주는 우리나라 술이니까, 기본적으로는 한식이랑 페어링이 메인이 돼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 문제들이 있죠. 첫 번째로는 와인이나 사케의 경우 음식 페어링에 대한 연구나 논문, 책이 많은데 전통주와 한식 페어링은 관련 전문가나 자료가 거의 없습니다. 교육과정에서도 음식 파트는 한 번 강의하고 끝나버립니다. 또 요즘 젊은 친구들이 전통주 전문점을 차리는데, 정작 제대로 된 한식을 경험해 보지 못한 탓에 비슷비슷한 퓨전 음식만 내놓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술안주, 예를 들어 제대로 된 전이나 김치찌개, 수육 등을 잘하는 전통주 집은 거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제일 큰 문제는, 교육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식은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아카데미가 있는데, 한식은 그런 게 없습니다. 대학에서도 한식을 배우려는 학생이 줄어들고 있고, 전통주 페어링 관련 석박사 논문은 없다시피 하죠. 결국 미각 교육부터 시작해서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인기 저는 푸드페어링을 가능한 쉽게 접근하고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균형을 맞추려고 하는 것이 페어링이죠. 짠 음식을 먹으면 달달한 것을 찾게 되고, 전을 먹으면 자연스럽게 막걸리가 생각나고, 이런 식으로요. 좋은 술도, 좋은 음식도 결국은 밸런스가 핵심입니다. 학술적으로 전문적으로 탐구하면 그 깊이가 무궁무진하지만 시작은 어렵지 않게 페어링에 대한 인식은 하면서 소비자 스스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치맥이나 피맥이라는 말이 마케팅 용어를 넘어서 치킨과 어울리는 맥주 스타일이 무엇인지 피자와 어울리는 맥주가 무엇인지 알아가면서 푸드페어링이 확대되고 시장에서 자리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수많은 삼겹살집에는 특정 브랜드의 맥주만 있는데, 소비자들의 다양한 니즈가 반영되면 삼겹살집에서도 삼겹살에 어울리는 수제맥주를 준비할 수 있겠죠. 요즘 젊은 친구들은 해외도 많이 다니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인식이 넓어졌는데요. 일회성 관심에 서 그치지 않고, 작은 시장들이 꾸준히 형성될 수 있게 문화를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전통주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와인은 원래 위에서부터 페어링 문화가 형성됐지만, 전통주는 달라야 한다고 봅니다. 기존 식당들에 좋은 전통주가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죠. 삼겹살집만 봐도 특정 브랜드의 맥주만 있는데, 수제 맥주는 더더욱 판로를 넓히기 쉽지 않죠. 다행히 요즘 젊은 친구들은 해외도 많이 다니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인식이 넓어졌는데요. 일회성 관심에서 그치지 않고, 작은 시장들이 꾸준히 형성될 수 있게 문화를 만들어가면 좋겠습니다.
윤철중 사실 성장은 소비자와 공급자가 같이 발맞춰 가야 하는데, 이게 쉽지가 않습니다. 제가 10년 전에 일본에 가 보니 조지아 와인 전문점도 있고, 사케를 파는 태국 음식점도 있었는데요. 우리나라는 그런 다양한 시도를 했을 때 소비자들이 잘 안 찾아옵니다. 반대로 소비자들이 너무 앞서가도 문제죠. 매장이 그 수준을 못 따라가면 실망하고 다른 데로 가 버리니까요. 그래서 서로 조금씩 성장해야 하는데 이게 참 어렵습니다. 저도 이런 것들을 많이 알리기 위해 양조장 사장님들을 초대해 페어링 디너를 20회 정도 했습니다. 최근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사케 페어링도 해 봤는데, 양조장 사장님이 자기 술이 이탈리안 음식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줄 몰랐다고 놀라시더라고요. 이렇게 만드는 사람도 발전하고, 즐기는 사람도 발전하고, 다 같이 성장해야 하는데 말처럼 쉽지는 않죠.
김성국 페어링은 제게 정말 중요한 비즈니스인데요. 제 궁극적인 목표가 뭐냐면, 맥도날드 버거의 프렌치프라이와 같은 와인을 찾는 겁니다. ‘이 음식을 먹을 때는 무조건 이 와인!’이라는 조합을 발견하고 싶습니다. 디즈니랜드에 가면 맛없어도 꼭 먹어야 하는 칠면조 다리처럼, 에버랜드에서만 팔았던 구슬 아이스크림처럼, 페어링도 충분히 어트랙션 요소를 지닌 콘텐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음식과 분위기가 일종의 메인 콘텐츠라면, 그걸 완성해 주는 것이 페어링인데요. 이걸 그냥 ‘맛있다’고 느끼게 할 게 아니라, 전략적이고 계산적으로 잘 기획해야 합니다. 우리 전문가들이 더 연구해서 당연하게 느껴질 수 있는 조합을 만들어내면, 그게 진짜 문화가 되는 거죠. 좀 더 계산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처음 시작할 때도 언급했지만 페어링을 원래는 ‘마리아주’라고 합니다. 마리아주라는 단어는 ‘결혼’이라는 뜻이고요. 사랑하니까 결혼을 하게 되는데, 서로에게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페어링도 밸런스를 찾아가는 여정이죠. 오늘 나온 이야기처럼 너무 전문적으로 접근을 하려고 하면 저변 확대가 어려울 겁니다. 그렇기에 각기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더욱 열심히 알리고 가이드를 제시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끝으로, 2024년을 마무리하고, 2025년을 새롭게 시작하며 즐길 수 있는 페어링 조합을 하나씩 말해보겠습니다.
윤철중 저는 의미 있는 술을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라이후쿠(来福)’라는 사케가 있는데요. 복이 온다는 뜻입니다. 국내에서는 제가 수입을 하고 있는데, 쌀의 92%를 깎아내고 8%만 남긴 초정미 사케입니다. 많이 정미해서 깔끔하긴 한데 쌀 맛이 잘 살아있어서 음식이랑도 잘 어울리죠. 이 ‘8’이라는 숫자는 중국에서 ‘돈을 많이 번다.’는 뜻인 한편, 일본에서는 ‘쭉쭉 뻗어 나간다.’는 의미라 성장을 상징합니다. 올해 다들 힘들었기 때문에, 내년에는 복이 오고 성장하자는 의미로 이 술을 골라 봤습니다. 여기에 어울릴 음식을 고르다가, 의미를 같이 가져가 보고 싶어서 일본식 방어 무조림을 매칭해 봤습니다. 방어는 일본에서 ‘출세어(出世魚)’로 불립니다. 또 성장함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바뀌는데, 80cm 이상까지 성장한 방어만을 ‘부리(ぶり)’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완전한 성어(成魚)를 뜻하죠. 그래서 복을 상징하는 8% 초정미 사케와 출세를 상징하는 방어를 매칭해 봤습니다. 의미도 좋고 맛도 잘 어울리니까요.
김성국 와인은 아시다시피 빈티지라는 게 굉장히 중요한 술입니다. 그런데 참 흥미롭게도 10년마다 비슷한 상황이 거의 되풀이되는데요, 2024년은 식음업계에 참 힘든 해였는데 포도 농작도 무척이나 어려웠습니다. 딱 10년 전인 2015년은 그와 반대로 정말 좋았던 해였죠. 2015년 샴페인도 정말 맛이 좋습니다. 2025년을 맞이하면서 2015년 샴페인을 오픈하면, 2025년은 매우 좋은 빈티지가 되리라는 기대를 걸어봅니다. 카운트다운을 하며 자정에 딱 맞춰 2015년산 샴페인을 터뜨리면 아마도 2015년처럼 좋은 해가 기다리고 있지 않겠냐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페어링은 감자칩이면 충분하지만, 새해 첫날은 특별한 날이니까요, ‘트러플 감자칩’을 준비해 크림치즈를 올려 먹어보면 좋을듯 합니다.
이승훈 전통주 중에 ‘초야’라는 술을 소개하고 싶은데요. 한국전통주연구소 박록담 소장님 제자가 만든 백화주입니다. 백화주는 여러 종류의 꽃으로 만든 술입니다. ‘백(百)’이 많다는 뜻이라, 약 22종류의 꽃을 넣어서 만든다고 합니다. 사실 꽃마다 피는 시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철마다 꽃을 따서, 수술도 정리하고, 상한 것도 골라내고, 그 와중에는 식용 가능한 꽃이어야 하고, 맛이나 향도 밸런스가 맞아야 해서 정말로 손이 많이 가는 술입니다. 현재는 김제에 있는 ‘지애의 봄향기’라는 양조장에서 이런 백화주를 만들고 있는데요. 단번에 꽃향이 확 느껴지진 않지만, 잘 숙성됐을 때 먹으면 단일 꽃으로 만든 술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이런 게 우리 전통주의 매력입니다. 막걸리만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정성 들여 만든 고급스러운 술들도 많죠. 이 술과 페어링할 음식으로는, 돼지고기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김제 특산물 중 하나가 돼지고기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양념이 지나치게 강하면 술의 섬세한 향을 가릴 수 있으니, 심플하게 잘 삶은 수육이나 보쌈 정도가 좋을 것 같습니다. 기본에 충실한 음식이 오히려 이 술을 더 빛나게 해줄 겁니다.
이인기 새해니까 떡국을 많이들 드시게 될 텐데요. 떡국은 쫀득한 식감과 쌀의 고소함 그리고 국물의 감칠맛이 좋은 새해 음식입니다. 이런 맛에는 보리맥아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브라운에일과 몰티한 라거맥주도 좋을 것 같습니다. 또 제사 지내고 남은 해물 베이스 탕국에도 몰티한 브라운에일이나 포터(Porter)스타일 맥주가 궁합이 좋은데요, 몰트를 로스팅하면서 나오는 곡물의 고소함과 감칠맛이 잘 마리아주되기 때문입니다. 떡국의 맑은 국물과 흰색의 떡은 지난해 어려운 일들을 잊고 새롭게 출발하는 뜻이 있고 긴 가래떡은 건강과 장수를 의미한답니다. 독자님들도 떡국 많이 드시고 다소 어려운 한 해가 되겠지만 가래떡처럼 길고 질기게 버텨서 생활과 삶의 좋은 밸런스를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말씀처럼 올해 경기도 어렵고 내년은 더 어려울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만, 술과 음식을 같이 즐기는 법을 더 많은 분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무슨 유행이라서가 아니라, 돈이 없을 때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죠. 꼭 비싼 술을 살 필요는 없습니다. 편의점이든 마트든, 집에 있는 술이든, 단지 잘 만들어진 술이면 됩니다. 와인이든 맥주든 전통주든 상관없이요. 중요한 것은 자기만의 평가를 해 보는 겁니다. “나는 이 술 10점 만점에 7점이다.”, “그런데 어제 남은 피자랑 먹었더니 9점이 됐네.” 이런 식으로요.
저는 항상 이런 것을 기록하라고 말합니다. 핸드폰이든 공책이든 어디든 써놓으면, 자기만의 페어링 노하우가 만들어집니다. 전문가처럼 객관적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맛, 내가 느끼는 밸런스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경기가 어려울 때일수록 이런 작은 즐거움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비싼 게 아니어도 좋은 술, 좋은 음식 즐기는 법을 독자 여러분께서 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좌담회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즐거운 술과 음식 이야기를 나눠주셔서 고맙습니다.
장소 협찬_ 라까사호텔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