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에서는 8월부터 시작된 사상 최악의 산불이 남한 면적의 1/5을 태웠다. 산불로 인한 연기로 도시 기능은 마비되고 주민들은 거리에 나갈 수도 없게 됐다. 우리나라는 수마로 힘들었는데, 미국 서부는 화마로 고통을 받고 있다. 미국 서부는 동부의 기후와는 확연히 다르다. 여름철에는 고온건조한 기후가 계속돼 마른 번개나 작은 불씨에도 대형 산불로 번질 수 있는 기후 조건을 가졌다. 적당한 지중해성 기후는 포도밭에 유익하지만, 이런 산불은 포도밭과 양조장마저 앗아갈 것이다.
조속한 진화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이번 달에는 미국 서부의 와인을 소개한다.
“어서 와~ 내륙은 처음이지?”
뉴월드 와인의 기수인 미국은 19세기부터 현대적 와인 산업 체계를 갖추고 와인을 생산했으며, 천혜의 자연환경과 엄청난 자본, 타고난 기업가 정신과 창의력으로 오늘날 세계 4대 와인 생산국 중 하나가 됐다. 이러한 미국 와인도 편중 현상이 심해, 전체의 90%가 캘리포니아에서 생산된다. 캘리포니아 와인을 좀 안다하는 사람들은 나파 밸리, 소노마 밸리, 산타 바바라 카운티 등을 읊조리지만, 정작 그 생산 비율은 높지 않다. 대부분의 캘리포니아 와인은 내륙 밸리(Inland Valley)라고 부르는 내륙 지역에서 대량으로 생산된다. 캘리포니아의 주도인 새크라멘토(Sacramento)에서 남쪽으로 로다이(Lodi)와 모데스토(Modesto)를 거쳐 프레즈노(Fresno)에 이르는 광활한 평야가 펼쳐져 있는 곳이다. 지형적으로는 해안 산맥(Coastal Mountains)과 시에라 네바다(Sierra Nevada) 산맥의 사이에 있는 분지성 밸리다.
인공위성 지도를 보면, 마치 노아의 방주 같은 큰 배가 꾹~ 자기 몸체 도장을 찍고 이륙하고 난 흔적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분지다 보니, 전체적으로 기온이 매우 높아 포도가 완숙 내지는 과숙까지 이르고 알코올은 쉽게 15%vol을 바라본다. 낮은 가격에 힘 있고 감미로운 와인들을 생산하기에, 일반 와인 애호가들을 위해서는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 미국 와인이라 그런지 햄버거에도 잘 어울리고, 향신료 풍부한 멕시칸 음식과 바비큐 음식들과 아주 잘 맞는다. 더구나 그림자가 길어지고 가을이 익어가는 10월에는 캠핑이나 야외 피크닉도 많이 가는데, 캘리포니아 내륙 밸리 와인들은 시의적절한 선택이기도 하다. 와인 규정 측면에서 보면, 내륙 밸리는 다시 북쪽의 새크라멘토 밸리(Sacramento Valley) 구역과 남쪽의 산 호아킨 밸리(San Joaquin Valley) 구역으로 나눠진다. 새크라멘토 구역의 중심이 클락스버그(Clarksburg)에서 로다이에 이르는 델타(Delta) 지역인데, 이 지역은 샌프란시스코 만이 왼편에 있어, 여타 남쪽 구역보다 더 시원하다. 이 지역의 와인 명가가 이 달에 소개할 보글 빈야즈(Bogle Vineyards)다.
새크라멘토 델타의 기적, 보글 빈야즈
보글 집안은 1800년대 중반부터 캘리포니아에서 농사를 지어 왔는데, 1968년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와인 사업에 뛰어들었다. 아버지 워렌 보글(Warren Bogle)과 그의 아들 크리스(Chris)는 새크라멘토 시 아래에 있는 클락스버그 지역에서 처음으로 와인 생산을 위한 포도를 심었다. 초기 밭은 약 8ha 정도였는데, 지역 최초로 쁘띠뜨 시라(Petite Sirah) 품종과 슈냉 블랑(Chenin Blanc) 품종을 심었다. 이 지역은 새크라멘토 강의 하류의 델타 지역(Sacramento River Delta)으로 흙이 깊고 땅이 기름진 곳이며, 가뭄에 견디며 힘 있는 와인들이 생산되는 곳이었다. 보글 집안의 수년에 걸친 열정적인 노력으로 작은 농장은 새크라멘토강을 따라 확장 발전했다. 처음에는 큰 회사들에 그들이 재배한 포도를 팔았으나, 1978년부터 보글 레이블로 와인을 직접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보면 알겠지만 보글 레이블의 아이콘은 그 유명한 장끼와 까투리, 두마리 꿩이다. 꿩이 등장한 스토리가 재미있다. 양조장 창립주 워렌과 아들 크리스는 포도밭이 있는 델타 지역의 고유한 특성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레이블을 원했다. 그런데 마침 마을에는 재능있는 예술가 폴 로렌찌(Paul Lorenzi)가 살고 있었다. 무언가 특별한 레이블을 원했던 부자는 로렌찌에게 창조적인 라벨을 그려달라고 요청을 했다. 어느날 저녁 로렌찌가 와인을 마시며 디자인을 고민하고 있는데 목에 흰고리무늬가 있는 예쁜 꿩 한 마리가 포도나무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게 됐다. 로렌찌는 그 꿩의 우아하게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감탄해 곧바로 그리기 시작했고, 이런 사연으로 꿩은 지금까지도 보글의 상징 동물이 됐다. 실제로 보글 가족이 살고 있는 메리트 아일랜드(Merritt Island)에는 고리무늬 꿩이 많이 살고 있다. 초기에는 레이블에 ‘포도나무 위의 한 마리 새’만 새겨졌다가, 중간에 실제 색상을 입힌 꿩 한 쌍으로 바꿨고, 현재는 고급진 금색을 입혀 더 예술적으로 레이블을 장식하고 있다. 레이블 모양도 강가의 얇은 조약돌을 역삼각형 형태로 갈아서 만든 듯한 정겨운 모양이라 좋다.
보글~ 보글~ 끓어오르는 보글의 인기~!
2020년 현재, 보글 양조장은 새크라멘토 델타 지역에서 약 700ha에 육박하는 와인용 포도를 재배하는 규모로 성장했다. 350여 개의 초대형 양조 및 저장 탱크를 가진 보글은 연간 250만 상자의 와인을 생산한다. 아버지와 함께 와인 산업을 창업했던 크리스의 자식들이 보글 가의 6대손으로서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받은 둘째 워렌(Warren Bogle)은 캘리포니아 주립대에서 농업 경영을 공부한 후 1997년부터 회사 소유의 포도밭을 총 관리하는 중책을 맡았으며 동시에 회사를 대표한다. 워렌의 누나 조디(Jody Bogle)는 영어 교사 출신으로서, 1999년부터 합류해, 고객 관리와 와인 클럽 운영 그리고 해외 수출을 전담한다. 경영학을 공부한 막내 라이언(Ryan Bogle)은 부사장으로서 재무와 회계 관리 등을 책임지고 있다. 보글은 6대 세 남매 모두가 실질적으로 매일 매일의 회사 일을 분담하며 해내고있는 가장 전형적인 가족형 와인 회사인 것이다. 보글의 135명 직원들은 대부분 장기 근속 직원들로서, 인근 클락스버그 마을 주민들이라는 사실도 인상깊다. 2017년부터 보글의 모든 밭은 캘리포니아 환경친화적 영농 프로그램 규정(Lodi/California Rules for Sustainable Winegrowing program)의 영농 규정을 준수하고 있다. 보글은 자사 포도밭뿐만 아니라, 엄격한 지속가능성 가이드라인을 충족하는 외부 포도 재배자들에게 1톤당 보너스를 지급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포도가 환경적으로 책임감 있는 방식으로 재배되고 수확되도록 하고 있다.
보글의 자사 밭이든 계약된 외부 밭이든 모든 포도밭들은 필지 별로 관리되고 있는데, 이는 보글과 같은 규모의 회사에서는 드물고 실행하기 힘든 일이다. 생태계 보존에도 큰 관심을 보인 보글사는 매와 수리를 들여와 잠재적인 해충 문제를 완화하는 자연적인 방법으로 방향을 틀었다. 부엉이가 둥지를 틀 수 있도록 포도밭 인근에 둥지도 놓아줬다. 밭에는 피복 작물을 심고 자연 유기질 비료로 활용해 건강한 토양을 만들고 있다. 첨단 환경 지향형 건물인 본사와 양조장에서는 매년 온실가스 11만 4000톤을 절감하고 있다. 이처럼 환경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보글사는 2018년에 캘리포니아 그린 메달(California Green Medal)을 받으며, 지속 가능한 양조장 리더십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 리더상은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사회적으로 공평하며, 경제적으로 실행 가능한 관행을 훌륭히 수행함으로써 지속가능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포도원에 수여된다.
또한 보글사는 2018년 캘리포니아주에서 수여하는 평생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 상은 평생 캘리포니아 와인 산업에 기여한 공로를 토대로 와인 산업의 선구자인 사람, 가족 또는 기관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이전 수상자들 중에는 웬티 패밀리, 로버트 몬다비, 짐 콘카논 등이 포함된 영예로운 상이었다. 2018년은 보글의 와인 사업 출발 첫 50주년이 되는 해인데, 2018년에 이런 모든 영광과 사회적 인정이 집결되다니~!! 참으로 우연이 아닐 수 없고, 더욱 뜻깊은 영광이라 하겠다. 역사가 수백년된 양조장에 비하면 짧겠지만, 그 짧은 기간 안에 8ha에서 700여 ha로 성장한 이 집안의 노력과 성취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가족과 지역 공동체 주민이 똘똘 뭉친 보글의 와인팀은 농업 기업이 가야되는 길을 보여주는 멋진 사례라 생각돼 칼럼을 쓰면서도 매우 기분이 좋았다.
‘슈냉 블랑’이라고 발음한다. 빠리지쟁(파리 사람)들은 점 더 멋들어지게 ‘슈낭’이라고 발음하기도 한다. 원산지는 프랑스 루아르(Loire)다. 산도가 매우 높으며, 꿀향과 미네랄이 돋보이는 풍미를 낸다. 지엽적 품종이라 지명도는 샤르도네, 리슬링, 소비뇽 블랑에 밀려 있지만, 멋진 화이트와인을 생산할 수 있다. 미국에도 다수 지역에서 슈냉 포도를 재배하는데, 주로 초기 캘리포니아 생산자들이 샤르도네와 함께 프랑스 대표 화이트 품종으로 알고 일찍부터 심곤 했다. 보글 빈야즈에서도 1968년 가족 농업을 와인 산업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처음으로 식재한 밭 중 절반에 슈냉 포도를 심었다. 원산지는 Clarksburg AVA로 출시됐는데, 몬터레이산 포도도 일부 혼용됐다. 슈냉 블랑 90%에 샤르도네 5%, 머스켓 5%가 블렌딩됐다. 미국산 오크통에서 9개월 숙성했으며, 절반은 와인의 미세한 앙금과 함께 숙성시키는 앙금 배양법(Elevage sur lie)을 사용해 양조했다. 알코올은 12.5%vol다. 친환경 그린 인증을 받았다. 필자가 시음한 2018년 슈냉 블랑 와인은 밝고 영롱한 노란색에, 신선한 허브향과 미네랄 향이 좋다. 레몬과 라임, 아니스와 로즈마리 향이 부드럽게 교차하며, 청량감과 개성미를 뽐낸다. 입에서는 상큼한 자두 내음이 가득하며 높은 산미가 침을 고이게 한다. 도미회, 광어회에 라임 한 조각 뿌리고 함께 먹으니 궁극의 조합이었다. Price 5만 원대
‘쁘띠뜨 시라’라고 발음한다. ‘쁘띳 시라’라고 짧게 발음되면 더욱 세련된 발음일 것이다. 이름에서 눈치챘듯이, 시라(Syrah)와 쁠루쟁(Peloursin)이라는 품종의 교배종이다. 껍질이 두꺼워 타닌이 강하고 거칠다. 생산성도 낮아서 프랑스에서는 퇴출되다시피 했는데, 캘리포니아에 와서 빛을 발했다. 이곳의 뜨거운 태양은 껍질을 완벽히 익게 해줬고, 짙은 색상과 견고한 타닌을 가진 레드와인을 생산해 줬다. 보글의 창업자 워렌은 1968년에 첫 8ha의 절반 밭에 지역에서는 최초로 쁘띳 시라를 심었다. 보글은 쁘띳 시라의 선구자인 셈이다. 이후 ‘보글 하면 쁘띳 시라’로 알려지게 됐다. 클락스버그와 인근 로다이 지역의 포도를 혼용해 California AVA로 출시됐다. 미국 오크통에서 12개월 숙성했다. 알코올은 14.5%vol이며, 친환경 인증을 받았다. 해마다 ‘Wine Enthusiast’ 잡지의 ‘Best Buy’ 리스트에 오르는 인기 와인이다. 필자가 시음한 2017년 빈티지는 짙은 흑적색에 자줏빛 뉘앙스를 보인다. 블랙베리, 블랙 체리, 블루베리 향이 특징이며, 흑후추와 다크 초콜릿 향이 좋다. 입에서는 바닐라와 감초 등 그윽한 오크 풍미와 진한 과일의 육감적인 맛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풍부한 타닌은 매끄럽게 잘 다듬어져 있으며, 벨벳 재질감을 구현한 미디엄-풀바디 와인이다. 바비큐 요리나 소시지 돈육제품, 향신료 강한 피자나 제3세계 음식과 잘 어울리는 팔방미인격 레드다. Price 5만 원대
이제는 많은 애호가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진판델 품종은 1800년도 중반에 미국에 전래돼, 19세기 말까지 번성했다. 이후, 까베르네 소비뇽을 중심으로 와인의 고급화가 이뤄지면서 살짝 후퇴했다가, 최근 오래된 고목의 품질을 한껏 살린 풀바디 ‘Old Vine’ 레이블로 시판되면서, 재조명되고 있다. 보글의 올드바인 진판델은 100% 단품종으로 로다이와 아마도르 카운티의 포도를 블렌딩했고, 미국산 오크통에서 12개월 숙성했다. 60~80여 년생 나무들로부터 얻은 농축미를 최대한 살렸다. 또한 물을 주지 않는 건지 농법(Dry Farming)을 활용해, 과실의 농축미와 폴리페놀의 두터운 질감을 잘 살렸다. 알코올은 14.5%vol다. 2016년 빈티지는 짙은 석류색에 흑갈색 뉘앙스를 보인다. 블랙베리, 블랙체리, 산딸기와 자두의 쨈 향기에 바닐라, 오크향이 구수하며, 후추, 정향, 아니스 등 향신료도 복합미를 거든다. 입안의 산미는 부드러우며, 약간 감미로운 편이다. 타닌은 진하나 매끄럽고, 알코올은 도수보다 높게 느껴지며, 온화한 편이다. 미디엄 풀바디 몸집으로 진한 오레곤 피노 같은 느낌도 준다. 자료에 의하면, 2018년 빈티지는 ‘Wine Enthusiast’지 ‘Best Buy’ 리스트 1위를 차지했단다. 브라보~!! Price 5만 원대
보글의 포도밭이 집중된 새크라멘토강 연안의 클락스버그는 충적토의 깊이가 깊어 힘 있고 견실한 포도 열매가 생산되며, 미네랄이 풍부한 토양으로 복합미있는 와인이 만들어지는 곳이다. 보글은 약 10여 종의 포도를 집중적으로 재배하는데, 그 중 레드와인용 ‘핵심 4인방’만을 모았다. 그래서 브랜드 이름도 ‘Essential’ 레드다. 진판델 33%, 시라 25%, 쁘띳 시라 22%, 까베르네 소비뇽 20%를 블렌딩했다. 레이블에 명시된 것처럼 모두 올드 바인이다. 미국 오크통에서 12개월 숙성했다. 알코올 도수를 14%vol로 살짝 낮춰, 우아함을 더한 것이 신의 한 수다. 필자가 시음한 2017년은 깊고 심원한 암적색에, 농익은 온갖 붉은 베리류의 향들이 폭발하며, 감초와 파이프 담배향이 이국적인 와인이다. 매끈한 질감과 풀바디의 힘이 동반돼 긴 피니쉬로 이어진다. 진판델의 농염함, 시라의 세련미, 쁘띳 시라의 육덕짐에 까베르네 소비뇽의 복합미로 완성한 근사한 레드다~! 근데, 가격은 더 근사하다. 2017년 빈티지는 ‘Wine Enthusiast, BEST BUYS’ 리스트에서 90점으로 30위를 해다. 한우 등심 스테이크나 양갈비 구이, 티본 스테이크와 최적이다. Price 7만 원대
병이 예술이다. 병만 보고도 살 것 같다.. 오래된 고목의 실루엣이 샌프란시스코 만으로부터 유입되는 안개에 잠겨 있는 모습을 종이 레이블없이 직접 유리병에 그려 넣었다. 환경을 생각해 PVC포일은 과감하게 생략했다. 목에 두른 금색 밴드는 품격을 더한다. 과연 클락스버그 테루아는 내륙 밸리라는 커다란 이미지로 묶어 버리기에는 미세 기후가 매우 특별한 곳이다. 서늘한 기운이 밤새 포도밭에 머무르며 한낮의 열기로 지친 나무의 기력을 회복시켜 주는 마법을 발휘하는 곳이다. 보글의 샤르도네 와인은 대개 미국 오크통에서 숙성하는데, 이 팬텀 시리즈 샤르도네는 특별히 프랑스산 오크통에서 발효하고 숙성시키며 섬세함과 복합미를 추구했다. 바닥의 앙금 위에서 숙성시키며, 그 기간 동안, 월 2회씩 조심스럽게 저어줘 풍미를 배가 시켰다. 필자가 시음한 2018년 샤르도네는 빛나는 황금빛 색상에 은녹색 뉘앙스가 깃든 활기찬 화이트다.
모과의 향긋함 속에 졸임 사과 내음, 서양배향, 애플 파이향이 화려하며, 따뜻한 버터향과 바닐라, 헤이즐넛향이 복합미를 더한다. 잔을 흔들면, 시원한 바닐라 젤라또향이 망고향과 함께 피어 오른다. 입안에서는 청량한 산미와 충실한 질감에 14.5%vol 알코올의 힘이 균형을 이뤘다. 한 입 삼키고 나면, 시원한 꿀사과와 바나나, 파인애플 풍미가 입안에 가득하다. 2019년 ‘San Francisco Chronicle’ 품평회에서 ‘Best of Class’ 상을 받았다니, 절로 고개가 끄떡여진다. Price 10만 원대
이제 끝까지 올라왔다. 보글의 아이콘 와인, 팬텀~! 유령이라는 뜻. 병 아래 실루엣의 오래된 고목 포도나무 그루들이 이리저리 뻣친 모습이 마치 달밤에 유령들이 춤추는 듯한 형상을 연상시킨다. 브랜드 글자체도 팬텀스럽다. ‘Proprietary Red’라는 표현이 더해져 있는데, 미국에서 한 양조장의 대표 최고급 와인이라는 표현이다.
홍보 방법도 팬텀스럽다. ‘Augmented Reality Wine Label’이라는 앱을 다운로드 후, 팬텀 병의 전면 레이블을 스마트폰 렌즈로 스캔하면 팬텀 스토리 동영상을 관람할 수 있다. 당연히 빈티지마다 블렌딩 비율은 달라서, 필자가 시음한 2016년 빈티지는 진판델 52%, 쁘띳 시라 46%, 마타로(Mataro) 2%가 블렌딩됐다. 모두 올드 바인이다. 중고 미국산 오크통에서 28개월 장기간 숙성시켰다. 알코올은 14.5%vol. 와인메이커는 1994년부터 보글사의 양조를 책임지는 에릭 아페딧(Eric Aafedt)과 2006년에 합류한 다나 스템러(Dana Stemmler)다. 보글의 일관된 품질과 명성을 배가시킨 이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며, 팬텀을 열었다. 깊고 진한 흑적색에 진보랏빛 뉘앙스가 선명하다. 은은한 숲속 고목의 묵은 향과 토스트, 정향과 흑후추 향이 병 레이블 이미지처럼 무게감 있게 피어오른다. 잔을 흔들면 야생 베리향과 자두잼, 커런트, 바닐라, 삼나무향이 흐믓하다. 입에서는 힘찬 타닌과 풍부한 내용 물질, 뜨거운 알코올이 점막을 조여오는데, 과실의 산미와 오크의 유질감이 미각을 풀어 주며, 에스프레소 커피의 뒷맛으로 긴 여운을 남기며 사라진다. 유령처럼. Price 10만 원대
손진호
중앙대학교 와인과정 교수
인류의 문화유산이라는 인문학적 코드로 와인 교육을 진행하고 있으며 와인 출판물 저자, 칼럼니스트, 컨설턴트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