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이 내려 가을이 깊어간다.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마감을 앞둔 작가의 마음에 분심을 더해 주고, 자정을 넘긴 새벽에 와인 한 잔을 들게 한다. 이달의 와인 ‘콘차이토로 돈 멜초르’다. 순간, 분심은 사라지고 명징한 평정심으로 나머지 원고를 써 내려간다. 취중 원고가 아니다. 취심 원고다. 이슬이 서리로 맺히기 전의 깊어가는 가을의 정서는 이 콘차이토로 와인과 기가 막히게 닮아 있다. 칠레의 뜨거운 태양과 안데스 산맥의 냉기는 한국
가을의 낮과 밤을 그대로 표현해 주나니, 그 정서가 어디 가랴~! 10월, 가을을 타는 남자들에게 콘차이토로 와인을 권하는 이유다.
칠레 농민을 사랑한 선각자, 돈 멜초르
스페인 정복자와 함께 칠레에 포도 재배와 와인 생산이 전파된 것이 16세기였지만, 19세기 중반까지 약 300년간 와인 산업은 큰 발전 없이 영세한 산업 분야로 명맥을 이어 왔다. 그런데 19세기 중반이 지나면서 산티
아고 주변의 유지들이 필록세라로 일자리를 잃은 프랑스 양조자들을 초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칠레의 유력한 지주 가문의 자제들이 프랑스로 유학을 가게 되면서 칠레와인산업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당시 칠레 유지들은 프랑스 보르도로 가서 유학하며 포도 재배 및 양조 기술을 배워오곤 했다. 바로 이 시기에 콘차이토로 사의 설립자 ‘멜초르 데 콘차이토로(Melchor de Concha y Toro)’(1833~1892) 경은 칠레 농업의 미래를 와인 산업에 걸고, 와인 생산 농장을 설립한다. 1883년의 일이다. 멜초르 경은 19세기 중후반에 활동한 법률가이자 사업가이며, 정치가다. 칠레 대학 법대를 졸업한 그는 사업에 감각을 보여 은행의 경영자로 근무하기도 했다. 1861년부터 정당에 소속, 정치 활동을 하면서 수차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1869년에는 재무 장관직을 맡기도 했다. 1886년에는 산티아고시 상원의원이 됐으며, 1891년 칠레 내전 때 정부 반대편에 섰다가 사임했다.
그는 산티아고 외곽의 마이포 강(Maipo River )유역에 포도밭을 조성하기로 결심, 직접 보르도에 가서 포도 묘목을 가져오고 프랑스인 양조학자를 고용하며, 남보다 앞서 섬세한 스타일의 고급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 에밀리아나 수베르까조(Emiliana Subercaseaux)를 위해 농장 근처 삐르께Pirque에 저택을 건설했고, 여기서 머물며 와인 산업의 미래를 기획했다. 이렇게해 칠레 농업과 와인 산업 근대화의 씨가 뿌려진 것이다. 필자도 이 칼럼을 작성하기 위해 자료를 보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현재 시판되고 있는 콘차이토로의 최고급 샤르도네 와인(Amelia)과 최고급 스파클링 와인(Subercaseaux) 이름은 그의 아내의 이름과 성을 각각 딴 것이다. 자고로 아내를 사랑하면 사업은 번창하기 마련이다.
이 시기 농장 일꾼들을 애지중지했던 멜초르 경에 관한 전설은 자유 진보주의 정치가인 그의 애민 사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당시 와인이 종종 없어지는 것 같다는 농장 감독의 하소연을 들은 멜초르 경. 하루는 퇴근하는 척하고 정문을 나서다가 몰래 돌아 들어와서 셀러에 들어가 구석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저녁이 돼 퇴근 때가 되자 일꾼 몇 명이 들어오는 인기척이 나더니 와인 몇 병을 가져가는 것이 보였다. 사실을 모두 알게 된 멜초르 경은 바로 그들을 해고하지 않고 숙고하다가 며칠 뒤 다시 셀러에 몰래 들어가 있었고 역시나 인부들이 들어왔을 때, 갑자기 귀신 소리 같은 이상한 소리를 내어 그들을 내 쫓았다. 그 이후로 셀러에 악마가 산다는 소문이 일꾼들 사이에 퍼졌고, 밤이 내린 이후에는 아무도 셀러로 내려가지 않게 됐다. 결국 멜초르 경은 가난한 일꾼들을 해고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버릇을 고쳤고 분실 사건도 해결했다. 이 전설은 지금도 남아 그 셀러의 입구에 ‘악마의 셀러(Casillero del Diablo)’라는 간판과 함께 현재 가장 널리 판매되며 인기 있는 ‘까시제로 델 디아블로(Casillero del Diablo)’ 라는 와인 브랜드까지 탄생시키는 계기가 됐다. 일석삼조인가.
세계 와인 산업의 선도적 브랜드, 콘차이토로
1883년 산티아고의 유지였던 돈 멜초르 경이 남쪽 마이포 밸리 유역에 설립한 비냐콘차이토로 농장은 그 역사와 규모 면에서 단연 칠레를 대표하는 와인 생산지다. 21세기에 콘차이토로는 이제 칠레와 남미를 넘어서 세계를 향한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1933년 산티아고 주식시장에 기업을 공개했고, 1957년부터는 에두아르도 줄리사스티(Eduardo Guilisasti Tagle) 가문에 의해 현대화 작업이 시작됐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97년은 콘차이토로 농장에게 있어 매우 기념비적인 해였다. 자존심 강한 프랑스 양조장 중 가장 품격 있는 무똥 롯칠드사로부터 합작 제의를 받은 것이다. 프랑스의 전통과 칠레의 우수한 테루아와 기술을 접목시켜 세계적 품질의 명품 와인을 만들고자 했으니, 1996년 빈티지부터 탄생하게 된 이 ‘알마비바(Almaviva)’라는 와인과 함께 콘차이토로는 칠레 최고의 위상과 더불어 세계적 와이너리로 발돋움하게 됐다. 이후 콘차이토로의 행보는 거침이 없다. 1996년에는 안데스 산맥을 넘어 아르헨티나의 명산지 멘도사 주에 ‘트리벤토(Trivento)’ 농장을 건설했고, 2006년에는 칠레 남부 마울레 밸리 지역을 공략해 일상 소비용의 대중 브랜드 ‘팔로 알토Palo Alto’를 개발했다. 2011년에는 남미를 넘어 미국까지 진출해 캘리포니아의 ‘펫져(Fetzer Vineyards)’를 인수했다. 이런 광폭 성
장과 내실을 바탕으로 2015년에는 영국의 유명한 경영 컨설턴트 그룹인 ‘Intangible Business’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와인 브랜드(2014~2015)’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현재 콘차이토로 와인 그룹은 칠레와 아르헨티나, 미국에 10,800ha의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으며, 147개국에 와인을 수출하고 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그 땅과 자연의 와인을 만들다
그런데 이런 모든 화려한 이력에서 콘차이토로 회사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업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프랑스와의 합작인 ‘알마비바’ 와인 생산도 아니고 값비싼 까르므네르 아이콘 ‘까르민Carmin’도 아닌 ‘돈 멜초르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의 생산이다. 필자는 약 15년 전에 칠레를 방문하면서 고대 문명인 마푸체 문명과 안데스에 무한한 경외심과 존경을 가진 칠레인들을 만났다. 그들은 스페인의 잔혹한 침략 통치에도 굴하지 않았고 미국의 자본주의적 침탈도 모두 이겨내고 오늘날의 칠레 독립 국가를 만들어 냈다. 그 땅과 그 자연을 사랑하기에 그들만의 자연 위에서 그들만의 노력으로 일구어낸 독자적인 명품 와인이 그들에게는 가장 소중했던 것이다. 콘차이토로를 이끌고 있는 줄리사스티 가문의 끊임없는 추구의 결과물인 돈 멜초르 카베르네 소비뇽은 칠레 까베르네 소비뇽의 완벽한 균형감과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그들의 열정이 빚어낸 창조물이었다.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뿐만이 아니다. 광활한 안데스 산맥의 산자락에서 그보다 더 광활한 태평양의 찬 바다의 영향을 받으며, 콘차이토로의 관리 하에 엄격하게 자란 포도나무는 최고의 포도를 선사했다. 보르도의 유산으로 오늘날 칠레에서만 실효적으로 생산되고 있는 까르므네르 품종의 최고의 표현인 ‘까르민(Carmín de Peumo)’, 시라 품종과 어울리지 않을 법한 자갈밭에서 자란 진주 같은 와인 ‘그라바스(Gravas del Maipo)’, 그리고 설립자 돈 멜초르 경의 아내처럼 우아한 터치의 샤르도네 와인 ‘아멜리아(Amelia’까지 기업의 위상을 드높이는 고품질 와인에서 1만 원 대의 합리적인 가격의 품질 와인을 제공하기 위한 콘차이토로 와인 그룹의 노력은 끝이 없다.
Muchas Gracias, Concha y Toto~!
돈 멜초르, 까베르네 소비뇽 Don Melchor, Cabernet Sauvignon
1986년 줄리사스티 가문의 대표 ‘돈 에두아르도 줄리사스티 태글(Don Eduardo Guilisasti Tagle)’은 그동안 칠레 와인이 갇혀 있었던 ‘중저가 대중적 품질의 칠레 와인’ 이미지를 변화시키고자 프랑스 보르도를 방문해 현대 양조학의 아버지 에밀 뻬노(Emile Peynaud)를 만났다. 에밀뻬노는 콘차이토로가 소유하고 있는 ‘푸엔테알토(Puento Alto)’ 포도밭을 분석해 보고는 까베르네 소비뇽을 위한 최적지라는 평가를 내렸고, 돈 에두아르도는 흥분 속에 귀국했다. 농장의 본부인 피르께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푸엔떼 알토 재배지는 칠레 와인 역사의 중심지다. 유럽에 필록세라 질병이 창궐하기 전에 칠레로 건너온 프랑스 포도 품종이 19세기경부터 재배되기 시작한 곳이다. 해발고도 약 650m의 서늘한 기후 조건에 마이포 강에 의해 형성된 가장 오래된 충적지에 위치해 있다. 풍부한 미네랄, 점토질과 자갈 등이 어우러진 특별한 토양에서 1987년부터 창립자의 이름을 딴 ‘돈 멜초르 까베르네 소비뇽’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보르도의 샤또 콘셉트로 조성된 127ha의 면적에 까베르네 소비뇽 여섯 구획, 까베르네 프랑 한 구획이 나눠졌고 시간이 흘러 나무가 성장하면서 각각 미세하게 구별되는 특성을 가진 포도를 생산하게 됐다. 포도는 모두 손 수확되며, 구획 별로 다른 용기에서 양조해 12~15개월의 프랑스 오크통 숙성을 거쳐 완성된다. 매년 블렌딩 비율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까베르네 소비뇽 90~93%에 나머지는 까베르네 프랑을 취한다.
돈 멜초르 와인의 병 디자인은 참으로 우아하고 매력적이며 절제돼 있다. 펄이 깃든 짙은 밤색 캡슐에 미색 바탕의 레이블, 절제된 미학의 엄격한 글씨체가 마시기 전에 우리를 압도한다. 짙은 카민 색조의 포도밭 이름 글씨체는 매우 도발적이며 섹시하다. 그 색조는 그대로 와인 글라스에도 담겨진다. 돈 멜초르 만의 유니크한 컬러다. 전형적인 블랙 커런트와 블루베리, 바닐라, 유분의 향이 계피와 정향을 동반하며 이국적인 분위기의 부케로 몰아간다. 입안에서의 질감은 그야말로 놀랍다. 완벽하게 녹아들어 구조감과 동시에 응축미를 선사하는 타닌과 알코올 그리고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산미의 간헐적 등장도 일품이다. 잘 짜여진 각본에 따라 완벽하게 연출된 한 편의 연극을 감상하는 희열을 느껴 보라.
Price : 15만 원대
까르민 데 페우모 Carmín de Peumo, Carmenere
까르민은 칠레에서 생산된 최고급 최고가 까르므네르 와인이다. 까르므네르 품종은 프랑스 보르도 원산이나 보르도의 습한 기후 때문에 큰 성과를 내지 못하다가 필록세라 사태 이후 재 식재 때 대부분 다른 품종으로 대체 식재됐다. 그러나 고온 건조한 칠레의 기후와는 찰떡궁합을 이뤄, 현재 전 세계 재배 면적의 85%가 칠레에서 재배되고 있다. 시집을 잘 온 셈이다. 그러나 포도송이와 이파리 생김새가 메를로 품종을 닮아서 오랜 기간 메를로 품종으로 알고 재배됐다. 1994년 프랑스 보르도에서 온 한 육종 전문가가 보르도에서는 거의 사라진 까르므네르 종임을 밝혀냈다. 자기 정체성을 회복한지 불과 20여 년 밖에 안됐다는 얘기다. 그러니 아직까지 이 품종에 큰 기대를 걸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런데 이 보조 품종을 가지고 블록버스터 급 대단한 와인을 만들어 냈으니, 이는 자연과 인간의 노력의 결과이다. 카차포알 밸리 내에 위치한 페우모 재배지는 산도와 당도가 균형잡힌 최상급의 까르므네르를 생산하는 곳이다. 여기에 삐르께 포도밭의 까베르네 소비뇽(7%)과 푸엔떼 알토 재배지의 까베르네 프랑(7%)이 각각 잘 익은 고급스런 과일향과 향신료 풍미를 더했다. 17개월 프랑스 오크통에 숙성했으며, 조련사는 바로 위대한 스타 와인메이커, 이냐시오 레카베렌(Ignacio Recabarren)이다. 흑적색에 자줏빛 뉘앙스가 선명해 까베르네에 지지 않는 강한 낯빛을 자랑한다. 특유의 매큼한 후추 향과 풀냄새가 까르므네르 정체성을 드러내며, 커런트와 블랙 체리, 허브와 민트, 정향 등 야생미가 넘치는 향을 선사한다. 입안에서는 잘 익은 과일에서 오는 감미로움과 충만감이 알코올의 힘과 함께 장중하게 전해져 온다. 힘찬 타닌이 입안에서 풀 바디의 느낌을 갖게 하며 10년 이상 숙성할 힘과 뼈대를 만들어 준다. 칠레 와인에 고유한 유칼립투스 풍미에 부드러운 바닐라 오크향이 잘 조화된 전형적인 고급 까르므네르 블렌딩 와인이다. 까베르네 두 형제를 집어넣은 것이 주효했다. 로즈마리 허브를 가미한 채끝 등심 스테이크를 위시한 다양한 육고기 바비큐에 잘 어울린다. 음용 전 2시간 이상의 브리딩을 필요로 한다.
Price : 30만 원대
마르께스 까사 콘차, 피노누아 Marques de Casa Concha, Pinot Noir
포도 재배 지역이 좀 특이하다. 칠레에서는 비교적 북쪽으로 더운 지역인 꼬낌보(Coquimbo) 지방의 리마리(Limarí Valley) 구역이다. 피노가 재배되는 곳은 다행히 해안가로부터 30km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서늘한 곳이다. 토질도 칼슘 카보네이트가 풍부해 산도가 높은 포도가 생산되는 행운을 누렸다. 피노 묘목은 777과 13 디종 클론을 사용해 태생적인 우수성을 확보했다. 피노스럽게 섬세하게 다뤘고 11개월 동안 프랑스 오크통에서 숙성했다. 사실 피노는 칠레적인, 칠레스러운 품종은 아니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아직 낯설고 칠레 안에서도 그 정체성을 잘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부르고뉴의 우아함, 오리건의 힘, 캘리포니아의 감미로움, 뉴질랜드의 야생미 등과 같은 자기 색깔이 없다. 그래서 필자는 일부러 다른 품종을 선택하지 않고 이 품종을 시음해 봤다. 나에게도 모험이었다. 레이블에서 14% vol의 알코올이 적혀있어서 힘센 자의 근육을 느끼리라 걱정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글라스에 가득한 루비색의 심원함에서 뉴월드 피노라는 출신과 전반적인 농축미를 예감할 수 있었다. 잘 익은 딸기와 산딸기의 스윗한 향미가 전해 온다. 스윌링을 하자 추가적인 체리와 감초, 바닐라와 장미꽃 향이 세련미를 전해 준다. 매끈한 타닌이 알코올의 살집에 연한 근육감을 주고, 피노의 높은 산미가 감미로운 풍미에 신선한 자극을 준다. 콘차이토로 가문은 18세기 초반에 스페인 왕가로부터 후작(Marquis de Casa Concha )작위를 받았다. 이 와인은 그 브랜드 명에 걸맞게 위엄과 자상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와인 시리즈다.
Price : 5만 원대
구입정보_ 금양인터내셔날 (02-2109-9233)
손진호 / 중앙대학교 와인강좌 교수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역사학 박사를 했고, 그 과정에서 발견한 와인의 매력에 빠져, 와인의 길에 들어섰다. 1999년 이후 중앙대학교에서 와인 소믈리에 과정을 개설하고, 이후 17년간 한국와인교육의 기초를 다져왔다. 현재 <손진호와인연구소>를 설립, 와인교육 콘텐츠를 생산하며, 여러 대학과 교육 기관에 출강하고 있다. 인류의 문화 유산이라는 인문학적 코드로 와인을 교육하고 전파하는 그의 강의는 평판이 높으며, 와인 출판물 저자로서, 칼럼니스트, 컨설턴트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sonwine@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