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중순 갑작스레 기온이 영상 20℃ 가까이 급상승하자 서둘러 벚꽃이 만개했다. 그러다가 4월 초 다시 꽃샘추위가 와서 기온은 영하 가까이 떨어지고 비바람이 거세게 불자 벚꽃과 상춘객들은 수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잔잔하던 도심의 밤거리에 폭풍급 돌풍이 불어 간판이 떨어지는 기상 이변도 있었다. 그렇다.
자연은 언제 어떻게 우리 사는 세계의 날씨를 바꿀지 모른다. 그런데 대자연의 변덕과 질투로 새로 탄생하게 된 와인도 많다. 오늘 소개할 마르살라 와인이 그러하다.
지중해의 폭풍이 가져다 준 선물,
마르살라
18세기 후반 영국 리버풀 출신인 존 우드하우스(John Woodhouse)라는 와인 상인이 폭풍의 풍랑을 피해 지중해 한 가운데의 섬 시칠리아의 마르살라 항으로 피신해 들어 왔다. 그는 여관에서 지역의 제일 좋은 와인을 시켜 맛봤는데, 알코올이 높았던 현지 와인에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는 오크통 50통 분량의 와인을 구입해 영국 시장의 반응을 보고자 했다. 다만 영국까지 가는 긴 뱃길에 포도주가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브랜디를 조금 넣어 보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영국 시장에서 대성공을 거두자 그는 1796년 다시 마르살라로 돌아와서 가난한 현지인들의 와인을 사고 포도밭을 구입했다.
또한 직접 양조장 건물을 세우고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돈을 많이 벌어 마르살라 항구의 시설까지 만들 정도였다. 1800년에 영국 해군의 Nelson 제독은 마르살라 와인을 구하기 위해 몰타(Molta)섬에 왕실 함대를 정박시키기도 했다. 버킹검 궁전의 셀러에는 마르살라가 항상 가득 차있었다. 이렇게 마르살라가 크게 유행하자 많은 영국인들이 우드하우스의 뒤를 따랐다. 이탈리아인에 의한 Marsala 생산은 1833년이 돼야 시작됐다. 그 후 19세기 이상 동안 시칠리아에서 생산되는 와인 중 가장 수출이 많았으며, 영국에서는 셰리, 마데이라와 견줄만한 인기를 누렸던 시칠리아 대표 강화 와인이었다. 발전하던 마르살라 산업은 20세기 들어 경제 공황과 세계 대전, 농민들의 무지 등의 이유로 ‘위대한 화이트 와인으로서 마르살라’의 위상이 많이 퇴색됐다. 그러나 최근 외식산업의 발전과 함께 다양한 요리에 사용되면서 새롭게 조명되며 옛 영광을 추구하고 있다.
마르살라의 명가, 펠레그리노
깐티네 펠레그리노(Cantine Pellegrino)는 1880년 지역 정치가이자 와인 양조에 강한 열정을 지녔던 파올로 펠레그리노(Paolo Pellegrino)에 의해 설립됐다. 이후 140여 년 가까이 시칠리아 와인산업의 리더로 군림해 온,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와이너리다. 설립자인 파올로의 아들 카를로 펠리그리노가 프랑스 유력 양조가 오스카 피에르 데스파뉴(Oscar Pierre Despagne)의 딸인 조세핀(Josephine)과 혼인하면서 프랑스의 선진 양조의 노하우와 기술을 전수 받았다. 이 후에도 와인에 대한 열정과 경험, 시칠리아 전통 문화의 승계와 지역 발전에 공헌하는 가문의 전통을 이어왔다. 현재 5세대와 6세대를 이어 오며 가족 경영으로 운영되고 있어 유달리 가족의 유대가 강한 시칠리아에서도 가장 모범적인 와이너리로서 칭송받고 있다. 현재 피에트로 알라냐(회장)과 베네데또 렌다(사장)이 경영을 책임지고 있다.
펠레그리노 양조장은 설립 당시부터 최상급 마르살라의 생산자로 큰 명성을 쌓아 왔다. 마르살라시 인근에 위치한 역사적인 펠레그리노 양조장에서는 오랜 전통과 역사를 고수하면서도 최첨단 설비를 갖추고 다양한 스타일과 뛰어난 품질의 마르살라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펠레그리노사의 비노 마르살라 베르지네, 리제르바 델 첸테나리오(Marsala Vergine Riserva del Centenario) 1880 빈티지 와인은 2013년에 이탈리아의 최고 와인 평가 기관 감베로 로쏘(Gambero Rosso)로부터 3글라스 Tre Vicchieri를 획득했고, <죽기 전에 꼭 마셔봐야 할 와인 1001> 책에 등재될 정도이다. 또한 이 와이너리는 와인 양조 설비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문화유산들을 함께 전시, 보관하고 있어 마르살라 역사박물관이라 불리며 세계적으로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기도 한다. 펠레그리노 양조장의 철학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시설이 오버추어 펠레그리노(Overture Pellegrino)다. 이 시설은 와이너리를 방문하면 셀러도어처럼 숍, 전시 공간, 프레젠테이션 공간과 6개의 객실, 루프탑 바가 있는데, 이는 모두 내방하는 방문객들을 위한 공간이다. 루프탑 바는 일주일에 한 번은 일반 고객을 위해 영업하기도 하니 꼭 방문해 보기 바란다.
석양 무렵 마르살라 한 잔을 마시며 지중해를 관조하는 풍광이 그만이다. 오버츄어 뒤편으로 역사적인 마르살라 와이너리가 있다. 이 연결 통로 입구에 작은 박물관이 있어서 오래된 포도 재배 양조 도구와 예쁘게 장식한 시칠리아 전통 마차 등을 전시하고 있다. 본 칼럼의 대문 사진에서 보이는 둥근 탑은 ‘펠레그리노 타워’라고 해서 예전에 와인 탱크로 사용하던 곳을 개조한 장소로 시음장, 레스토랑이 있다.
마르살라를 넘어 테이블 와인의 명가로
마르살라 강화 와인 생산으로 시작한 펠레그리노의 양조 역사는 이제 일반 와인 생산 부문에서도 똑같은 품질 우선주의 철학과 기술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마르살라 최고의 와인 생산자라는 타이틀을 뛰어넘어 뛰어난 품질의 다양한 테이블 와인 생산을 위해 2004년 마르살라 외곽의 까르딜라(Cardilla)에 최첨단 설비의 새로운 와이너리를 설립하고, 끊임없는 개발과 혁신, 도전을 이행하고 있다. 300ha 이상의 면적에서 포도를 재배하고 있으며, 300여 곳 이상의 포도 재배자들과 공급 계약을 하고 있다. 시칠리아 섬의 서부 지역 중 포도 재배에 가장 최적인 곳에 따뜻하고 건조한 기후와 바위가 많은 가파른 경사면 등의 다양한 자연 조건을 활용해 테루아의 특성이 담긴 와인을 생산한다. 특히 양조장이 위치한 트라파니(Trapani)군에서는 해발 고도와 토질, 그리고 미세 기후의 특성을 파악해 6개의 포도 품종을 과학적으로 분산·배치·재배하는 프로젝트를 성공시켰다. 이곳에서는 인졸리아(Inzolia), 샤르도네, 네로다볼라(Nero d’Avola), 그릴로(Gillo), 프라파토(Frappato), 시라 등의 품종을 재배하고 있다.
발전을 멈추지 않는 펠레그리노 양조장은 최근 모스카토 품종 와인과 파시또 스타일 와인에 집중투자하고 있다. 펠레그리노는 1992년 시칠리아 남부의 작은 섬 판텔레리아(Pantelleria)에 와이너리를 설립해 이 섬 총 생산량의 75%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이 지역의 농민들은 전통적으로 포도 재배와 케이퍼 생산에 종사하고 있는데, 펠레그리노가 이 지역에 와이너리를 설립할 당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이 섬을 떠나려고 했었다. 그러나 펠레그리노는 지역민들을 설득해 그들이 생산한 모든 포도를 매입하기로 해 이 지역 전통인 모스카토 와인 생산을 지속시켰고 지역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스파클링에서 스틸 와인까지 드라이 테이블 와인에서 스위트 디저트 와인, 그리고 토착 품종 와인에서 국제적 스타일 와인까지 이제는 종합 와이너리로서 21세기의 지평을 넓히고 있는 펠레그리노 와인! 다음 와인 4종을 시음하면 그 실체가 입안에서 그대로 전개된다.
마르살라 베르지네 리제르바 델 첸테나리오 Marsala Vergine Riserva 1980
먼저 마르살라 와인에 대한 번개 상식! 마르살라는 색상에 따라 황금색 오로(Oro), 호박색 암브라(Ambra), 루비색 루비노(Rubino)로 구분한다. 그리고 당도에 따라 드라이한 쎄꼬(Secco), 세미 스위트 맛인 세미 쎄꼬(Semi-secco), 스위트한 돌체(Dolce)로 나뉜다. 마르살라 와인의 품질 등급은 Fine, Superiore, Superiore Riserva, Vergine, Vergine Riserva로 정리된다.
필자가 시음한 마르살라 베르지네 리제르바 1980 와인은 화이트 와인에 증류주 wine spirit 만 첨가해 19%vol 까지 강화시킨 최고급 베르지네 리제르바 제품이다. 리제르바 규정은 최소 10년 이상 오크통 숙성이지만 본 와인은 25년 가까이 오크 배럴에서 숙성시켰다. 옛부터 베르지네는 그릴로(Grillo) 품종을 주종으로 생산되는데, 본 와인은 까타라또(Catarratto)와 인졸리아(Inzolia)를 추가 블렌딩해 복합미를 도모했다. 1980 빈티지는 1880년에 설립된 펠레그리노 와이너리 100주년 기념 빈티지로서 극히 한정된 수량만 생산된 희소성이 높은 와인이며, ‘죽기 전에 꼭 마셔봐야 할 와인 1001’에 선정됐고, 2050년까지 보관 가능하다고 하는 장기 숙성 와인이다.
코르크 마개를 오픈하자마자 바닐라와 견과 풍미가 방 안에 가득 퍼진다. 잔에 따르니 호박 보석색이 감도는 진한 황금색으로 무화과, 곶감, 파이프 가루 담배향이 동방의 향신료와 결합된 오묘함이 매우 신비스럽다. 20여 년 이상 오크통에서 묵은 산화된 랑시오(Rancio) 풍미가 더해지고 아몬드의 고소함, 피톤치드의 싱그러움이 함께 뿜어져 나온다. 입안에서는 실크처럼 매끄럽고 당도와 산도, 알코올과 응축미 사이의 균형감이 좋다. 쎄꼬 스타일 특유의 ‘드라이한 감미로움’이 주는 피날레도 매혹적이다. 마치 내가 18세기의 영국의 한 비스트로에 있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견과류와 건과류 한 접시면 족한 휴식과 명상의 와인이다.
Price : 19만 원대
빠시또 디 판델레리아, 네스 Passito di Pantelleria, Nes
이 스위트 와인은 강화 와인이 아니다. 또 다른 방식의 스위트 와인이다. 시칠리아 섬과 아프리카 튀니지 사이의 작은 화산섬 판텔레리아에서 생산된 모스카토 포도를 햇볕이나 열풍에 말리는 선드라이 방식으로 한정 수량 생산된다. 이곳에서는 현무암 돌담으로 둘러싸인 계단식 포도밭에서 학교 화단의 회양목처럼 낮게 포도나무를 재배한다. 고블레(Goblet) 방식의 일종으로서 뜨거운 태양과 강한 해풍으로부터 열매를 보호하기 위한 방식이다.
그리스의 산토리니 등지에서도 사용하는 이런 포도나무 재배 방식은 매우 특이하고 독창적이어서 2014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됐다고 한다. 이 와인의 브랜드명 ‘네스’는 히브리어로 ‘기적’을 의미한다는데, 정말 기적 같은 자연 환경에서 생산되는 와인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별명도 ‘판텔레리아의 진주’로 불린다. 포도 품종 모스카또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지만 이 섬에서는 지빕보(Zibbibo)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런 토착 명칭도 정겹고 이탈리아스럽다. 오래된 황금빛으로 말린 무화과, 말린 살구, 꿀, 아카시아 향과 함께 감미로운 당도와 새큼한 산미가 균형을 이루며, 호박엿 같은 묘한 미감을 남겨 사라지는 맛이 일품이다. 오크통 숙성을 하지 않고 병 안에서만 10개월 정도 숙성시켰으니 지빕보 품종 고유의 특성을 한껏 살리고자 한 생산자의 의도가 느껴진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마스카포네 치즈, 계피 가루를 뿌린 티라미수 와 고르곤졸라 피칸테 블루 치즈와 함께 먹으니 천상의 행복이 따로 없다.
Price : 18만 원대
트리푸디움 Tripudium, Terre Siciliane IGT
아페리티프는 아페리티프고, 디저트는 디저트일 뿐. 승부는 역시 테이블 와인이다. 마르살라 와인의 절대 강자 펠레그리노 와이너리도 테이블 와인에 대한 전 세계적 수요를 무시할 수 없었다. 바로 이 대응 과정에서 펠레그리노는 시칠리아의 토착 품종으로 승부를 걸었다. 그 첫 단계에서 탄생한 와인이 바로 트리푸디움(Tripudium)이다. 트리푸디움은 매해 최고의 품질 표현을 보여준 수확물로부터 만든 와인이다. 몇 가지 품종을 블렌딩할 수도 있지만 대개는 시칠리아의 간판 스타 네로 다볼라 품종으로 생산한다. 스테인레스 탱크에서 순하게 발효한 와인은 오크 배럴 숙성 과정에서 고도의 복합미를 갖추게 된다. 무려 22개월을 오크통에서 숙성시켰다. 이 정도 오래 나무통에 들어가 있으면 나무의 타닌 때문에 와인이 뻣뻣해진다. 그런데 이 와인은 절대 뻣뻣하지 않다.
시칠리아의 뜨거운 태양이 와인의 향기로운 과일 특성을 강화시켰거니와 스테인레스를 사용한 발효 과정에서 과일향을 한껏 살렸기 때문이며, 14%vol에 달하는 알코올의 힘이 넉넉한 여유로움으로 타닌을 품어 안았기 때문이다. 펠레그리노 양조장의 플래그쉽 레드 테이블 와인으로서 이탈리아 와인 평가 전문지 감베로 로쏘로부터 최고 등급인 ‘3글래스’ 평가를 받았다. 와인명 ‘트리푸디움’은 라틴어로 ‘큰 업적, 성공’이라는 뜻인데, 마르살라라는 강화 와인생산으로 시작한 펠레그리노사로서는 이 테이블 와인의 성공적인 론칭이 큰 성공이자 업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바이올렛 제비꽃 보라 색상의 밝은 톤이 살아있는 화려한 색상의 레드 와인으로서 자두와 블랙 베리, 민트, 볏짚단, 세이지 향이 아련하게 풍기며 살짝 감미로운 블루베리 주스의 달큰한 풍미가 남방의 느낌을 전해 준다. 시칠리아의 대표 파스타로서 가지를 주재료로 사용하는 노르마 파스타(Pasta alla Norma)를 곁들여 보라.
Price : 10만 원대
타레니, 그릴로 Tareni, Grillo
시칠리아의 테루아를 가장 잘 표현하는 와인을 만들기로 생각한 펠레그리노사는 전통적인 회사의 출발점이 마르살라 항구 주변의 구릉지대를 재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선정된 6가지 구역에 가장 적합한 6가지 품종을 심고 그 특색을 잘 표현하는 단일 품종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그 중 자갈이 풍부한 점토 토양의 해발 160m 고도의 포도밭에서 생산한 시칠리아의 가장 대표적인 화이트 토착 포도 품종인 그릴로 포도는 가장 매력적인 선택이었다. 9월 초순경 수확한 포도는 부드러운 압착을 거쳐 온도 조절 탱크에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양조된다. 그릴로 특유의 광물질 특성을 보존하기 위해 스테인레스 스틸 탱크에서 3~4개월간 숙성 후 병입한다.
리슬링의 광물질 특성을 흉내내는 듯 다소 비릿한 돌내음을 풍기다가 지중해 품종 본연의 오렌지 꽃향기와 달콤한 서양배와 멜론 향, 피스타치오의 견과향과 알코올의 몽롱한 에탄올 터치가 몽환적으로 다가온다. 온화한 산미와 유질감, 미디엄 라이트 보디의 포동포동한 천사와 같은 순결함을 지닌 와인이다. 후라이드 치킨과 진짜 잘 맞았고, 5월의 대하구이와도 찰떡이겠다.
Price : 4만 원대
손진호 / 중앙대학교 와인강좌 교수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역사학 박사를 했고, 그 과정에서 발견한 와인의 매력에 빠져, 와인의 길에 들어섰다. 1999년 이후 중앙대학교에서 와인 소믈리에 과정을 개설하고, 이후 17년간 한국와인교육의 기초를 다져왔다. 현재 <손진호와인연구소>를 설립, 와인교육 콘텐츠를 생산하며, 여러 대학과 교육 기관에 출강하고 있다. 인류의 문화 유산이라는 인문학적 코드로 와인을 교육하고 전파하는 그의 강의는 평판이 높으며, 와인 출판물 저자로서, 칼럼니스트, 컨설턴트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