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일년 중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인 가을이며, 그 중 최고인 10월이다. 태어난 달이라서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여름의 혹서와 겨울의 혹한도 아니고, 황사와 바람이 많은 봄도 아니고, 차분한 자연의 정취와 결실을 느끼는 가을이 좋은 것이다. 이런 가을에는 차가운 화이트도 무거운 레드 와인도 아닌 중간쯤의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는데, 마침 떠오른 와인이 부드러운 레드 스파클링인 람브루스코다. 그래서 이 계통에서 가장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한 양조장 와인을 소개하려 한다. 다행히 최근 이 와인이 국내에 수입되기 시작했으니 이런 행운이 또 있으랴~!
에밀리아 로마냐 지방과 람브루스코 와인
람브루스코 와인을 만나기 위해 우리가 찾아 갈 곳은 이탈리아 에밀리아 로마냐(Emilia-Romagna) 지방이다. 이탈리아는 남북으로 기다란 국토를 북부, 중부, 남부로 나눌 수 있는데, 북부와 중부의 경계 지대에 있는 지방이 에밀리아 로마냐다.
사실, 이 지방은 와인보다는 음악과 예술, 미식의 고장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성악가 루치아노 파바로띠, 작곡가 베르디, 지휘자 토스카니니 등 이탈리아 최고의 음악가들을 배출했다. 미식 분야에서도 그 유명한 아체또 발사미코(Aceto Balsamico), 프로슈토(Prosciutto) 햄, 파르미쟈노 레쟈노(Parmigiano-Reggiano) 치즈 등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렇게 맛난 식재료들을 사용해 만든 음식에 어울리는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 이 지역 농민들은 다양한 품종 중에서 아주 특별한 람브루스코(Lambrusco)라는 품종을 선택했다. 이 품종이 걸물이다.
람브루스코는 세련되고 우아한 비티스 비니페라(Vitis Vinifera) 종이 아니라, 비티스 실베스트르(Vitis Silvestris) 종이다. 야생종이기에, 기후와 토질에 저항성이 강하고 생산성도 좋다. 나무딸기와 커런트, 아싸이베리 주스와 같은 질박한 질감으로 다소 생경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이 지역 농민들은 다소 부드럽고 감미롭게 잔당을 남긴다. 그래야 균형감이 맞기 때문이다.
타닌이 있는 레드 와인이면서도 수줍은 과일향이 풍부하고 어눌한 흙내음도 등장하는데, 감미롭게 만들어져서 이 지역의 특산품인 짭쪼름한 치즈, 프로슈토에 아주 잘 맞는다. 이 음식들과 화이트 와인은 다소 약한 듯 하고 일반 레드 와인은 다소 뻣뻣한 조합인데, 감미로운 레드 와인은 이런 미감의 균형을 완벽하게 이뤄낸다.
게다가 대개의 람브루스코 와인은 스파클링이나 약 발포성으로 생산한다. 레드 와인에 들어있는 이 탄산이 묘한 중독성을 준다. 무거운 레드 와인에 생동감을 주고 달콤한 미감에 청량감을 부여한다. 평범한 이탈리아 남자들은 퇴근 후, 회사 근처 술집에서 람브루스코를 한잔 걸치고 집으로 귀가한다. 이렇게 해서, 에밀리아 람브루스코의 전설이 탄생했다.
람브루스코의 품격, 메디치 에르메떼
메디치 농장의 창업주 레미지오 메디치(Remigio Medici)는 에밀리아 지역의 엔자(Enza)강 유역의 포도밭을 일구고 와인을 생산하기 위해 19세기 말에 양조장을 설립했다. 그의 아들 에르메떼(Ermete)가 사업을 이어받아 확장했으며, 견조한 명성을 이룩했다. 손자 세대인 발테(Valter)와 죠르지오(Giorgio)를 거치면서 와인 사업은 더욱 번창, 4대째 알베르또 메디치 Alberto대에 이르러, 에밀리아 로마냐 지방의 가장 탁월한 포도밭 75ha를 소유하게 됐다. 거의 매년 감베로 로쏘 평가기관 (Gambero Rosso)의 최고 등급인 ‘트레 비끼에리(Tre Bicchierri)’ 를 받는 와인을 배출하고 있을 정도로, 메디치 에르메테는 에밀리아 로마냐 지방 최고의 양조장이 됐다.
이 배경에는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 양 측면에서 돋보이는 탁월한 철학이 존재한다. 메디치가는 에밀리아 지역의 람브루스코 포도밭에서 드물게도 개별 포도밭의 특성을 존중하며 그 특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양조까지 연결시킨다. 이 지방은 전통적으로 대량 생산 지역인데, 마치 세계의 대표적인 고급 품종 와인 산지에서 하듯이 생산량을 줄이고 단일 포도밭 와인을 생산하고자 한다. 포도 수확량을 현저하게 감소시켜, DOC 규정에서 정하는 생산량의 30~40%까지도 축소해 포도의 농축도를 높인다. 또한 선대에게서 물려받은 포도밭을 잘 지켜야 한다는 윤리적 정신에서부터 출발 환경에 대한 존중 의식의 결과로 모든 포도밭이 오가닉 유기농 인증을 받았다. 현대식 양조장에서 깨끗하게 생산된 와인은 품종과 양조장 스타일을 반영하도록 양조되며, 자연과 환경을 존중하는 메디치 에르메테의 철학이 반영된다. 그리하여 저렴하고 대중적인 이미지 일색인 ‘람브루스코 와인’의 세계에서 메디치 에르메테는 최고급 와인의 이미지를 구축했고, 이는 세계적 평가 기관으로부터의 찬사와 높은 등급으로 확인할 수 있다. 메디치 에르메테는 지난 세기까지 ‘레드 콜라 와인’ 이라고 폄하됐던 람브루스코를 식탁의 정당한 동반자로서, ‘미식 와인’의 단계로 격상시켰다.
람브루스코 전도사, 알베르또 메디치
4대째인 현 경영주이자 생산자 알베르또 메디치(Alberto Medici)는 에밀리아 로마냐 지방의 핵심 와인 지역인 렛지오 에밀리아에서 1965년에 태어났다. 양조장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포도밭을 다녔다. 매일 그의 아버지는 ‘너는 와인 생산자가 될 거다’라는 마법의 주문을 불어 넣었단다. 그렇게 그의 DNA 속에 와인 생산자로의 길이 각인된 것 같다. 알베르또는 빠르마(Parma)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사촌 삐에르루이지(Pierluigi)와 여동생 알레싼드라(Alessandra)와 함께 4대째를 대표하며, 120년의 와인 생산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알베르또는 1994년 가족 사업에 합류했다. 와인 생산도 하고 포도가 익어 가는 것을 관찰하고 지켜보는 것이 큰 기쁨이고 관심사였다. 마치 아기가 어른이 되듯이 와인을 보살피고 있다. 20여 년간 영업과 마케팅에 헌신하면서, 전 세계에 람브루스코 와인의 고유한 매력과 메디치 에르메테가 어떻게 람브루스코 생산에 완벽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알렸다. 그 결과, 이탈리아 감베로 로쏘로부터 매년 거르지 않고 트레 비끼에리 등급을 받고 있으며, 2011년에는 런던 국제와인챌린지에서 그랜드 트로피를 수여 받았다. 그는 부친 죠르지오와 함께 회사의 정상급 와인들의 생산을 감독하고 있다.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이탈리아 청년 와인기업인 협회(AGIVI)’의 회장을 맡았다. 2002년부터는 ‘이탈리아 와인 연맹(Unione Italiana Vini)’의 이사회에 선출돼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지금은 5대째인 아들이 2017년 10월부터 양조장에 함께 하고 있으며, 그에게 람브루스코의 세계를 교육시키고 있다.
최초에 창립자 증조할아버지는 3개의 오스테리아(Osteria) 선술집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곳에서 판매할 와인을 생산하기 위해 생산을 시작했다. 102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 70여 개국에 와인을 수출하고 있고, 그 비율은 생산량의 70% 이상에 달한다. 진지한 람브루스코, 미디치 에르메떼의 세계적 명성을 수치로 확인하는 순간이다.
사족이지만 메디치 에르메떼 농장에서는 소량의 발사미꼬 식초를 생산한다. 레지오 에밀리아 지역에서 생산된 포도의 즙으로 초산발효시켜 재질과 크기가 서로 다른 5개의 오크통을 거치며 최소 12년 이상 숙성시킨다. 위가 개방된 오크통 안에서 증발을 거듭하며 향과 맛을 농축시키고 최고급품은 30년 이상 숙성시키기도 한다. 후일, 이탈리아를 방문하게 되면 꼭 방문해 볼만한 와인 농장이다. 국내에는 화이트 1종과 레드 3종이 수입되고 있다.
콘체르또, 람브루스코 레쟈노 Lambrusco Reggiano, Concerto
콘체르또는 람브루스코 와인으로서는 최초의 단일 포도밭 빈티지 와인이다. 약 발포성 드라이 레드 와인 Vino Frizzante Rosso Secco로, 샤르마 방식으로 생산된 천연 발포성 스파클링 와인이다. Reggio Emilia 군의 라 람빠따 농장에서 재배된 포도로 생산했다. 이곳의 단일 포도밭은 토질이 점토질인데, 람브루스코의 클론인 살라미노(Salamino) 종에 최적이다. 생산량도 타 지역 대비 30~40% 감축시켜 생산한 메디치 에르메떼 양조장의 아이콘 와인이다. 국내에 공급되고 있는 2016년 빈티지는 감베로 로쏘 기관에서 부여하는 최고 등급 트레 비끼에리를 받았다. 사실 매년 수상하고 있으니 믿고 마실 만하겠다.
독자들도 실제 이 와인 빛깔을 보면 놀랄 정도로 매우 진한 루비 색상에 선명한 보랏빛 뉘앙스를 띄고 있다. 여기에 약 발포성 와인이라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거품의 색도 붉은 색이니 실로 색의 화려함이 환상적이다. 글라스에서는 신선한 딸기와 산딸기, 체리 등 붉은 색 베리의 향이 갓 찧은 듯 생생하게 살아난다. 그 사이로 신기하게도 먼지와 흙내음이 느껴지는데, 이는 비티스 비니페라 계가 아닌 람브루스코 품종의 고유한 향이다. 묘한 토속적 느낌을 준다. 입안에서는 드라이하지만 잘 익은 과일에서 우러나는 부드러운 감미가 살짝 배어있다. 이 맛이 람브루스코의 당미다. 알코올 11.5%vol 이다. 여기에 높은 산도가 있어 안 그래도 싱싱하여 빳빳한 타닌에 긴장감을 부여해준다. 산도와 타닌이 받쳐주니 뒷맛은 매우 깔끔하고 드라이하다. 강인한 골격의 람브루스코, 진지하다는 명성 그대로다. 돼지 갈비나 양 갈비구이와 마시니 이보다 더 좋은 조합도 없을 듯하다.
Price : 7만 원대
다프네, 말바시아 Malvasia, Daphne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음악, 패션, 자동차, 식자재 등의 보고 에밀리아 로마냐지방에서 120년의 역사와 전통을 지닌 와인 명가 메디치 에르메떼 양조장이 만든 화이트 스파클링 와인이다. 자가 소유 포도원에서 재배한 최상급 말바지아 청포도로 생산한 신선한 향미를 가지고 있다. 이탈리아 중부의 대표 청포도 품종 말바시아(Malvasia di Candia)로부터 생산된 와인인데, 와인 명이 흥미롭다. 다프네(Daphne)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나무 요정의 이름이다. 신화 내용은 이렇다. 아폴론이 에로스의 활솜씨를 놀리자, 에로스는 아폴론에게 화살을 쏘아 다프네와 사랑에 빠지게 했다. 아폴론은 에로스가 쏜 사랑의 화살을 맞고 강의 신 페네이오스의 딸인 다프네를 보고 사랑에 빠졌다. 그리하여 다프네에게 구혼했지만 다프네는 에로스가 쏜 증오의 화살을 맞았기 때문에 아폴론을 보자마자 기겁하며 달아났다. 아폴론은 다프네를 쫓아다녔고, 아무리 달래도 소용이 없자 하는 수 없이 아폴론은 숲을 헤치며 다프네를 끝까지 뒤쫓아 막 안으려 했다. 이때 다프네가 더 이상 도망칠 길이 없자 아버지 페네이오스에게 자기를 구해 달라고 소리쳤다. 이에 페네이오스는 다프네의 몸을 월계수로 변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 다프네는 월계수로 변해 아폴론으로부터 구해지게 됐다.
말바시아로 만든 이 와인의 은은한 황금색 색상과 부드러운 과일 향, 화사한 꽃향기, 그리고 입안에서 톡톡 튀는 신비로운 기포의 청순함이 요정을 연상시킨다 해 ‘나무의 요정’ 인 다프네로 이름 붙였다고 한다. 정확한 원산지 명칭은 Colli di Scandiano e di Canossa DOC로, 레지오 에밀리아 시 남부의 구릉지대에서 생산된다. 푸실리 파스타나 과일 샐러드, 생선 요리에 무난하게 잘 어울리는 약 발포성 화이트 와인이다.
Price : 7만 원대
꿰르치올리, 람브루스코 레쟈노, 쎄꼬 Lambrusco Reggiano, iQuercioli, Secco
메디치 에르메떼 양조장의 클래식 등급 스파클링이다. 콘체르또 와는 달리 람브루스코 살라미노 단품종이 아닌 람브루스코 마라니(Lambrusco Marani)를 블렌딩한 와인이다. 살라미노 클론의 강인함 보다는 마라니의 여유로움과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제임스 서클링(James Suckling) 포인트 92점에, 와인앤스피리츠 매거진 88점, 감베로 로쏘 두에 비끼에리를 받았다. 우아한 드레스를 연상시키는(샹페뉴 크루그를 닮은 병 라인) 병을 오픈하면 힘찬 버블의 압력이 경쾌하다. 밝고 진한 루비 색상에 짙은 보랏빛 뉘앙스가 선명하다. 친근한 베리향과 들판의 제비꽃 향기가 수줍게 어우러진다. 입안에서는 높은 산도의 청량감과 부드러운 타닌의 질감이 멋진 조화를 이룬다. 콘체르또는 좀 강한 편이었는데, 꿰르치올리 람브루스코는 보다 순하고 부드러웠다. 아마도 블렌딩의 결과이기도 하며, 좀 더 가볍게 만들었기 때문에 느껴지는 편안함이겠다.
콘체르또 보다 가볍고 부드러우니, 고기를 베이스로 한 라구 소스의 볼로네식 파스타, 불고기 등과 잘 어울린다. 9월에 시음할 때는 추석 차례 음식과 아주 잘 어울렸다. 특히, 산적과 고기 잡채나 고기만두와도 좋았다. 저녁에 양념 치킨이나 피자를 주문해 먹을 때도 매우 잘 어울리는 약 발포성 레드 스파클링이었다. ‘스파클링은 화이트’라는 통념을 깨자.
Price : 4만 원대
꿰르치올리, 람브루스코 레쟈노, 돌체 Lambrusco Reggiano, iQuercioli, Dolce
같은 꿰르치올리 등급 쎄꼬(드라이) 와인의 돌체(스위트) 스타일 짝꿍이다. 레이블을 자세히 보면, 전면에 각각 Secco와 Dolce라고 명기돼 있다. 시각적으로도 녹색 캘리그라피와 빨간색 칼리그라프로 쉽게 구분된다. 후면 레이블에는, 알코올 도수가 써 있는데, 각각 11%vol과 8.5%vol이다. 2.5%vol 만큼의 잔당이 마지막 와인에 담겨 있다는 뜻이니 그만큼 더 스위트하다. 앞으로 와인을 구입할 때, 알코올 도수를 유심히 살펴보는 습관을 갖기를 바란다. 품종 배합은 람브루스코 살라미노와 람브루스코 마라니를 블렌딩했다. 수상 경력은 감베로 로쏘 두에 비끼에리, Mundus Vini 금메달, Wine Spectator 2016 Top Value Sparkling에 선정됐다.
색상은 쎄꼬와 마찬가지로 강렬하며 인상적인 짙은 보라 루비 색이다. 향은 감미로운 블랙베리 잼과 블루베리 잼 향이 짙으며, 말린 무화과나 초콜릿의 단내가 좋다. 입안에서는 첫 모금과 첫 느낌은 감미롭고 달달하지만, 이내 높은 산미와 타닌이 등장하니, 삼키고 난 뒷맛은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다.
고르곤졸라 치즈를 얹은 피자와 양념 치킨, 불닭발과도 탁월한 매칭을 보인다. 당도와 산도, 타닌이 만나 다재다능한 만능 조화꾼 같은 음식 친화적 와인이다. 개인적으로는 화이트 스위트 스파클링보다 훨씬 좋았다. 독자 여러분들도 고정관념을 깨고 람브루스코 프리잔테 레드 와인을 사보자. 가격도 엄청 착하다.
Price : 4만 원대
손진호 / 중앙대학교 와인강좌 교수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역사학 박사를 했고, 그 과정에서 발견한 와인의 매력에 빠져, 와인의 길에 들어섰다. 1999년 이후 중앙대학교에서 와인 소믈리에 과정을 개설하고, 이후 17년간 한국와인교육의 기초를 다져왔다. 현재 <손진호와인연구소>를 설립, 와인교육 콘텐츠를 생산하며, 여러 대학과 교육 기관에 출강하고 있다. 인류의 문화 유산이라는 인문학적 코드로 와인을 교육하고 전파하는 그의 강의는 평판이 높으며, 와인 출판물 저자로서, 칼럼니스트, 컨설턴트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