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과 ‘모텔’ “호텔급 시설”이란 광고 문구는 지금도 흔하다. 좋은 식당에 가면 “호텔 같다”고 하고 수준 높은 서비스에 “호텔급”이라 상찬한다. 까닭은 ‘호텔’이 주는 시설과 서비스의 급간에 우리 모두 같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덕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호텔’은 아무 숙박업소나 가져다 쓸 수 있다. 속칭 ‘모텔’, ‘민박’에 준하는 업소들도 ‘호텔’이란 간판을 달고 영업이 가능하다. 1999년 2월 공중위생법의 개정에 따라 ‘너도 나도’ 호텔을 쓸 수 있게 됐기 때문. 그래서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당황한다. ‘호텔’인줄 알고 예약을 했는데, 전혀 다른 시설이라는 것. 외국에선 Inn(여관), Dormitory(게스트하우스) 등으로 좀 더 세부적으로 관리하긴 하는데 우리나라에선 샤워실을 공동으로 쓰는 곳도 이름만큼은 ‘호텔’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호텔’이란 이름에서 나오는 품격(dignity)이 유지되는 것을 보면, 우리 공동체는 제법 동질적인 언어 질감을 갖고 있는 셈이다. 쉐라톤의 반도 역사 인천은 해외여행 갈 때뿐 아니라 바다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갈 가치가 충분하다. 그런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들어선 오크우드 프리미어인천, 파라다이스시
“공항 가는 길 그 순간 이미 여행은 완성된다.” - 나르테스크 카이아느 - 변호사들의 휴가 변호사들은 대개 8월 초, 1월 초에 휴가를 간다. 특히 해외로 많이 떠난다. 일은 많은데 돈을 쓸 시간은 없으니 해외여행으로 달래는 것이다. 8월 초, 1월 초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때 법원이 쉬고 재판도 쉬기 때문이다. 복잡한 인간사 갈등의 최전선에 재판이 존재하기에 변호사들에게 이런 ‘리프레시’는 필수적이다. 코로나19 탓에 지금은 국내여행을 다니는데, 덕분에 모르고 있던 산천유수 국내 풍광을 제법 발견했다. 운전하며 구석구석 계곡, 산 능선의 카페를 찾아다니는 것도 재미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공항을 못 가는 것. 국내선으로 채워지지 않는, 몇 시간의 인고를 거쳐야 다다를 수 있는 미지에 대한 설렘, 그 감정은 여전히 내게 절실하다. 해외여행은 가서도 재미있지만 가기 전이 제일 좋다. 어디를 갈지 정해서 동선을 짜고 비행기 티켓을 사는 것. 어느 리조트에서 무엇을 할지, 무엇을 먹을지 미리 알아보고 예약을 한 뒤 꿈에 잠긴다. 이때 꾸는 꿈은 이뤄질 것이 거의 확실해서 즐겁다. 짐을 싸고 공항 라운지에 들어서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그 느낌, 설렘의 무게.
선택과 집중의 어려움 책을 읽을 때나 음악 들을 때 괴로운 것은 강박이다. 서문부터 순서대로 읽는 것은 지루하고 읽고 싶은 부분은 눈길을 잡아끄는 소제목 몇 단락이다. 음악도 그렇다. 빠른 1악장, 통통 튀는 3악장이 내가 좋아하는 소나타인데 지루한 2악장은 날 괴롭게 한다. 이어령 작가는 책을 읽을 때 좋아하는 챕터만 골라 읽었다. 밴드 뮤즈의 보컬 메튜 벨라미도 피아니스트 리스트의 소품 몇만 골라 들었다. 쇼팽 에튀드를 들을 때 op.10~1부터 12번까지 다 들어야 할 필요 없지 않은가. 물론 책의 저자는 논리와 맥락을 고려해 챕터를 배치한다. 작곡가도 마찬가지. 그 의도를 드러내기 위한 서사가 템포와 조성을 입고 차례로 기다린다. 그래도 우리가 고등교육을 연구하는 학자가 아닌 이상 강박에 젖어 독서와 감상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끌리는 것부터 읽고, 듣자. 뭐 연구자도 아닌데 전체의 구조, 체계정합성에 천착할 필요 없다. 그리고 설령 연구할 의지가 나중에 생기면 그때 순서를 고려해도 전혀 늦지 않다. 어느 연주자가 파가니니 랩소디 카덴차만 앵콜로 했던 것처럼 클래식 공연 앵콜 역시 꼭 완곡을 다 해야 하나. 그러니 힘 빠지고 지치니까 느린 소품
모든 글이 어렵지만 평론은 특히 그렇다. 주관이 들어가는 예술은 더더욱. 그래서 쓰기 어렵지만 읽기도 어렵다. 개인적으로는 클래식 음악평론이 잘 안 읽힌다. 일단 악평이 없다. 둘째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셋째 가장 큰 문제, 거기서 거기다. 먼저 악평이 없다. 중간에 연주 자체를 멈춘 피아니스트 윤디리의 ‘의도적 방임’ 정도가 아니면 어지간하면 극찬이다. 다시 말해서 호평이 아닌 극찬이다. 둘째,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용어 하나하나가 이해 안 간다는 게 아니다. 할말이 없으니 아티큘레이션, 프레이즈, 피아니시모, 비르투오소 이런 현란한 용어들이 본질을 감춘다. 애초 감춰진 그곳에 본질이 없음을 숨기기 위해서 혹자는 너무 많은 용어를 남발한다. 마지막으로, 거기서 거기다. 록 음악의 속지는 사실 읽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준다. 드럼 하이햇의 활용, 베이스 리프가 끌어가는 밴드 사운드, 하이 보컬과 드럼의 조화 등 곡 자체의 특징이 그림 그려지듯 설명된다. 까닭은 모든 밴드의 곡은 연주될 뿐 아니라 작곡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새로운 그들만의 곡이니 새로운 연주일 수밖에 없다. 쓸 것도 건질 것도 많은 이유다. 반면 클래식은? 안타깝게도 18~19세기
악행은 그 자체론 그저 지탄의 대상이지만 재능이 들어가면 열광한다. 특히 극적일수록, 언더도그마일수록 배가(倍加)된다. 가난하지만 천재였던 태국 소녀 린 닐텝. 그녀는 친구들에게 커닝을 시켜줬다 징계를 받고 삶의 전략을 바꿨다. 전 세계에서 같은 날 치르는 미국 대학입시 시스템을 이용해, 시차가 빠른 호주로 날아가 ‘먼저’ 문제를 푼다. 이후 몇 시간 뒤 시험을 치르는 태국 금수저 아이들에게 ‘정답’을 알려주고 돈을 받는다. 케이퍼무비의 전형 영화 ‘배드비즈니스’의 내용이다. 좋은 머리를 가진 주인공 린 닐텝이 윤리를 저버린 계기를 만든 장소는 다름 아닌 호텔 수영장. 당시 린의 옆에는 호텔 체인 소유주의 아들인 팟이 있었다. 팟은 커닝을 하게 해주면 돈을 주겠다고 한다. 한 번 상류층의 생활에 녹아든 린 닐텝에게 선택지는 하나였다. 재능은 팔 수 없다. 공유될 뿐이다. 소모되지 않는 자원으로 재화를 공급받는다는 건, 남는 장사다. 범죄만 아니라면. 호텔은 영화에 자주 등장한다. 호텔에서의 경험은 사실 나 같은 일반인이 쉽게 겪기 힘들다. 내가 들어갈 때 맞춰 문을 열어주고, 미소로 반기며, 취향을 기록한다. 인터컨티넨탈 코엑스는 내가 읽은 신문까지 기억해
변호사의 이중생활 어릴 땐 만화책, 비디오게임이 놀이였다. 즐기고 싶은 것을 골라, 마음대로 보고 플레이한다. 놀이란, 내가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재미있는 드라마, 영화에서는 놀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지 않는다. 성인이 된 지금 나의 놀이는 피아노다. 듣고 싶은 곡을 골라, 내 멋대로 해석하고 연주한다. 많은 연습이 필요하므로 어릴 때와 달리 경제력까지 갖춘 나는 아예 강남 어딘가 피아노 스튜디오를 차렸다. 왜 집에서 안 하냐고? 직업 특성상 연습은 밤늦게 해야 가능하다. 아무리 방음을 해도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를 내 식대로 타건하면 밑의 집이 괴롭다. 그래서 방음 처리된 방을 빌려, 야마하 C3를 가져다 놓고, 연습한다. 그런데 나에게 놀이인 피아노가 사실은 꽤 많은 품을 요구한다. 우선, 돈이 많이 든다. 피아노를 빌리는 것에서, 방 계약을 하는 것, 그리고 악보조차 헨레 원전판으로 분위기 좀 내야 하니 가볍지 않다. 레슨비는 또 어떤가. 선생님들 대부분이 나를 전공자론 안 보더라도 취미생으로 보지도 않는다(그래서 가격도 적정해야 한다). 체력도 마찬가지. 퇴근하면 너무 피곤하고, 법정에서 혈전을 벌이기라도 하는 날에는 진짜 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최고(最古) 호텔의 기억 음식을 남기기만 해도 꾸중을 듣던 시절에 자란 나는, 음식을 바닥에 쏟는 행위가 어떤 야단을 불러올지 알았다. 유치원생이던 당시 어느 뷔페에 갔다가 그릇을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하필 그곳엔 진열된 음식마다 이리저리 휘저으며 활보하는 아주머니가 앞에 있었다. 그 아주머니의 손에 내 그릇이 부딪혔고 반사각으로 튕겨나간 음식과 함께 그릇까지 산산조각 나자마자 부모님의 눈치를 봤다. 이윽고 호텔 직원인 어느 여자 분이 오셔서 고작 유치원생인 나에게 건넨 한 마디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고객님,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지금은 “변호사님”으로 시작된 문자를 볼 때마다 긴장하며 각잡고 보게 되는 것이지만, 내 기억에 최초로 “님”이란 호칭을 들었던 때가 바로 저 때다. 주말마다 할아버지 손을 잡고 온 가족이 갔던 웨스틴 조선 서울 1층 뷔페식당 아리아. 그릇의 안위 따위 상관없이 놀란 나를 걱정해주던 그 직원분은 나를 안전지대로 대피시켰고 다른 직원들은 음식을 주워 담았다. 저 음식이 묻은 카펫은 어떻게 세탁할 것인가 한가한 고민을 하던 그 당시가 생생히 기억나는 까닭은 이때가 내가 사회에서 인격체로 존중받
홍보와 악평 사이, 국내 최초 기획 호텔 평가 저널리즘 “레스토랑, 바, 와인은 수많은 정보와 이를 평가하는 전문가가 있지만 호텔은 전혀 없다. 이유는 호텔 소비는 돈 뿐만이 아닌 시간까지 요구하기 때문이다. 맛집은 하루 2~3곳씩 갈 수 있지만 호텔을 하루에 2~3곳 가는 이는 아무도 없다” 필자는 변호사가 되기 전부터 호텔을 즐겼다. 홀로 체크인해서, 갖고 간 스피커로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을 들으며 준비한 와인을 꺼낸다. 그 낭만은 SNS로 공유되는 순간 변질되기에 기억으로만 남긴다. 그런 기억들이 중첩되며 남은 추억은 호텔에 단순한 소비 이상의 애정을 갖게 했다. 호텔에 존재하는 평가는 오직 홍보 또는 악평뿐이다. 호텔 스스로가 ‘전통과 현대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이라 자찬하거나 혹은 ‘최악의 후기’라는 이름으로 비판될 뿐이다. 이 글은 홍보 또는 악평만을 받아내야 했던 호텔이 준 감동의 흔적을 남기고 특정 호텔에 가보지 않은 이에게 레퍼런스를 주기 위함이다. 가끔 보이는 고객의 평가(를 가장한 감정적인 글)들은, 꽤 많은 호텔을 다니며 적잖은 돈을 쓰고 적잖은 투숙경험을 하며 정립한 나의 시선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지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