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불어오면 문득 포장마차의 따근한 우동 한 그릇이 생각난다. 아니, 어쩌면 맛있는 향이 생각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부산의 포장마차 대표 먹거리 ‘꼼장어’ 굽는 그 내음은 그냥 아무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지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도 꼼장어 골목을 지날 때면 나도 모르게 어린시절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자갈치 시장에서 먹었던 맛있는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면서 꼼장어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곤 한다.
롯데자이언츠 김민성 선수에게 처음 꼼장어를 소개한 날, 불판 위에서 살아 꼼지락거리던 모습을 보고 난감해 하던 표정과 다르게 맛있게 먹던 그날을, 이제는 즐거운 추억의 이야기로 나눈다. 2024년 12월 꼼장어 향연과 함께 또 한 페이지의 추억을 만들어봐야겠다.
*곰장어는 원래 ‘먹장어’란 학명을 가진 어류다. 껍질을 벗겨도 10시간을 꼼지락대며 견디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졌다 해 꼼장어란 별칭이 붙었다.
산업에서 미식으로 승화된 꼼장어
꼼장어(먹장어)를 최초로 식용화한 도시가 ‘부산’이라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산업용으로 피혁공장에서 껍질을 사용해 제품을 만들고, 버려지던 꼼장어를 먹었다고 한다. 해방 전 일본인들은 꼼장어 가죽을 이용한 제품들을 만들었고, 상용가치가 껍질이었으니 살들은 자연스럽게 버려지게 돼 어려웠던 시절 배고픔에 이를 구워 먹거나 판매하는 난전들이 자갈치 시장을 중심으로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꼼장어 골목이 형성됐다. 지금처럼 살아있는 꼼장어를 우리가 쉽게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1990년대 이후라 할 수 있다. 그전까지는 부산 사람이라 해도 살아있는 꼼장어를 먹기 힘들었고, 자갈치 시장에서는 살아있는 꼼장어를 구워 소주를 잔술로 팔기도 했다고 한다.
해방이 되고, 6.25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 꼼장어 가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다양한 제품이 생겨났다. 다른 가죽보다 얇으면서도 특유의 광택을 가졌고, 소가죽보다 질기면서 발색도 뛰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꼼장어 가죽 가공 기술은 세계적이어서 곳곳에서 찾는 수요가 늘어나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우리나라 수출 효자 종목으로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하지만 1990년 소가죽, 양가죽, 합성피혁들이 각광 받으며 꼼장어 가죽은 시장성이 떨어지게 됐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살아있는 생물을 쉽게 접할수 있게 됐는데, 최초의 식용기록은 1932년 <수산시험보고>에 기장으로 추측되는 울산 부근에 꼼장어구이를 파는 서민음식점이 많았다는 언급이 있다. 지금 기장꼼장어가 유명한 것은 그 시절 처음 형성되기 시작한 역사의 결과물이 아닌가 싶다.
불향과 양념의 조화
부산의 꼼장어 문화는 피난민들에 의한 ‘부산자갈치꼼장어’와 기장 해안마을에서 서롭고 배고프던 시절, 끼니를 속이려고 달래주던 ‘기장짚불꼼장어’로 양분되면서 서로 다른 모습의 향토음식으로 발전해왔다. 일제강점기 시절 부산항 가까운 곳에 공장이 세워졌고, 한국전쟁 이후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값싼 꼼장어를 받아 자갈치 해안 노점에서 꼼장어구이를 팔았다. 부두노동자들은 저렴한 가격에 보양도 되고 힘든 하루를 매콤한 꼼장어 구이로 마무리했으니, 역사적으로 많은 애환을 담고 있는 부산 음식에 또 다른 한 페이지로 아픔이 고스란히 빨간 양념에 버무려져 연탄화로에 타들어 갔던 것이다.
자갈치꼼장어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피난민들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면 기장꼼장어는 보릿고개 시절 산 채로 짚불에 구워 허기를 달래줬던 구황음식이다. 짚불의 순간적인 큰 불로 껍질은 진액과 함께 시커먼 재로 타버리고 껍질 속 살코기들은 순식간에 익어 꼼장어 특유의 육즙이 남아 그 향과 맛이 독특하다. 매콤한 양념구이가 아닌 짚불구이로 그 특유의 향과 맛이 그 시절에는 배고픔의 아픔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미식가들의 즐거움으로 남아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든다. 어느 순간부터 소금구이도 별미로 찾아왔다. 매콤한 양념구이나 짚불구이가 아닌, 꼼장어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순수한 맛이라 표현하고 싶다.
즐거움으로 변한 꼼장어
먹고 살기 바빴던 시절이 지나면서 우리들은 새로움을 찾는다. 서민음식의 대명사였던 메뉴에서 지금은 고급음식이라 불릴만큼 가격이 많이 올랐다. 꼼장어 묵은 피혁산업이 활발해지면서 묵의 주재료인 껍질이 가죽제품화되며, 갑자기 사라졌지만 늦은 밤 꼼장어 골목을 지나다 보면 연탄불 장어구이 ‘전주횟집’ 맞은편에서 묵을 만드는 어르신을 뵐 수 있다. 이처럼 쉽게 맛보지 못하는 꼼장어 묵은 코스요리에 올라오는 메뉴로 멋지게 변신하면서 서민음식의 추억에서 귀한 묵으로 발전해 가고 있다.
꼼장어 묵은 껍질을 푹 고은 후 비린 맛을 달래주기 위해 다양한 재료를 섞어 굳히는 과정을 거친다. 초장에 찍어 먹거나 무쳐 먹는 등 별미 음식으로 무엇이든 먹어야 하던 서럽던 시절에서 지금은 먹는 즐거움을 위해 다양한 조리방법으로 새롭게 재탄생 돼가고 있으니, 꼼장어가 가져다 주는 우리 인생의 ‘희로애락’이라 표현하고 싶다.
추억에서 추억으로
꼼장어를 처음 먹었던 것이 1978년 여름이었다. 할아버지 손이 이끌려 자갈치시장에 가서 고래고기와 함께 새로운 음식을 접했는데, 어린 나를 보고 몇점을 소금구이로 해주셔서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는 맛난 고기를 먹었던 기억으로 지금도 ‘자갈치시장’하면 할아버지와의 나들이가 생각난다. 결혼을 하고 첫 아이가 그 시절의 내가 됐을 때, 자갈치시장 꼼장어 집에서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추억을, 나는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나의 아들에게 들려주고, 아내는 친정아버지와의 추억을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과 세대는 다르지만 부산사람들에게 꼼장어는 추억을 이어주는 귀한 보물이 아닌가 싶다.
찬바람이 불면 가스 불판 위의 꼼장어보다 자갈치시장 난전에 앉아 뱃고동 소리를 들으며, 연탄화로 위의 따스함을 맛보고 싶다면,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며 활활 타오르는 짚불에 세상의 모든 무거운 짐들을 다 태워버리고 싶다면, 기장짚불꼼장어와 함께 추억의 책장을 써 내려가며 겨울바다의 낭만이 넘쳐나는 부산 여행을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