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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3 (수)

호텔&리조트

[Hotel Story] 명동해변

 

 

산토리니로?


답답하기만 하고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한 시기가 있었다. 신춘문예 같은 곳에 소설을 투고한 지 10년이 다 될 동안 나의 글들은 어느 것도 데뷔작이 돼주지 않았다. 재고품처럼 나중에 요긴하게 쓸 수 있다는 소리를 위안으로 삼기는 했으나 낙방하는 해가 거듭될수록 창작 동력은 뚝뚝 떨어졌다.

 

아직 나의 습작기가 7년쯤 더 남았던 해로 기억한다. - 나는 꿈이나 목표에 관해서 만큼은 이렇게 결정론적인 표현을 쓰려 한다. ‘투고한 지 3년쯤 지나서’라거나 ‘데뷔하기 7년쯤 전’이라는 표현보다는 더 확고한 의지가 담겨서다. - 그해 신춘문예도 다 떨어진 게 확정돼 며칠 동안 무기력하게 지냈다. 그나마 몇 푼 벌며 적을 두고 있던 곳에서도 이제 그만 나가야 할 때가 가까워지고 있어 새해에는 꼼짝없이 낭인이 될 형편이었다. 그러니까 그해는 재고가 돼줄 습작품이 세 편쯤 더 쌓였다는 것 말고는 의미 없는 1년을 보낸 셈이었다.

 

‘산토리니 같은 데서 지내보면 작품이 좀 나오려나?’

 

소설을 쓰기 위해 새로운 공간을 동경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왜 하필 ‘그리스 산토리니’였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벗어나고만 싶었고 산토리니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나의 당장과 충분히 먼 듯했을 뿐이다. 내가 본 사진 속 그곳은 맑은 하늘이 무한정 넓었고 푸른 해변을 낀 비탈 위에 오밀조밀 모여 있는 집들은 표백한 듯 눈부셨으며 바다만큼이나 파란 지붕을 저마다 이고 있었다. 그런 곳 어디엔가 값싼 숙소가 있다면 한 달쯤 머물며 그놈의 데뷔작을 한번 써보고 싶었다. 나는 셋방 보증금과 은행 잔고로 셈을 해보다 망상을 관뒀다.

 

소설가의 방

 

기어코 소설가가 됐다. 습작기가 길었던 만큼 함께 소설을 공부하다가 먼저 데뷔한 동문 선후배가 많았다. 윤고은도 그중 하나다. 윤은 호텔 프린스가 ‘소설가의 방’을 운영하기까지 많은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습작기에 동료들과 호텔방을 잡아놓고 하루 합평회를 했던 내용으로 어디엔가 에세이를 발표했는데, 그 글의 제목이 ‘호텔 프린스의 추억’이다. 나중에 에세이가 호텔 관계자의 눈에 띄었고 윤은 경영진과 만나 작가 지원 사업에 대해 의논해볼 수 있게 됐다는 얘기였다.

 

윤이 어느 날 내게 전화해 이런저런 논의가 진행돼 곧 시행할 것 같으니 관심을 가져보라고했다. 나는 데뷔 직후였기에 여러 기관들에서 소설가를 지원하는 사업을 하나하나 눈여겨보던 중이었다. 그중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나는 아직도 산토리니를 동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알아보니 레지던시 프로그램들은 주로 서울 바깥에 많았다. 나는 직장에 다니고 있었기에 모두 그림의 떡이었다. 그런 와중에 서울 한복판에 있는 호텔에서 방을 내준다는 소식을 들으니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원 사업의 공지가 진짜로 떴다. 나는 데뷔해서 알게 된 소설가 친구들에게 두루 알렸다. 취지가 좋고 신뢰하는 이가 관여돼 있으니 작가들에게 큰 호응을 얻기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괜한 짓이었다. 호텔에서 방을 준다는 소식은 소설가들의 시상하부를 직접 자극했다. 나는 경쟁률만 높여놓은 셈이었으며 나 같은 햇병아리가 낄 틈은 없었다. 그래서 첫 모집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 그렇다고 낙담하지는 않았다. 무려 10년 동안 여러 문예공모에서 떨어져보지 않았나 말이다. 이만한 흥행이면 사업이 분명 계속될 것이고 낙방에 관해서라면 나는 세계 최고의 내성을 가졌다고 자부했다.


어느 날, 내가 ‘소설가의 방’에 대해 일찍 알려줬던 소설가 친구 중 하나가 전화해왔다. 황현진이었다. 정작 귀띔을 해준 나는 떨어졌는데 자기는 붙어서 ‘이거 참……’ 하다는 얘기였다. 나는 이만한 일로 ‘이거 참……’ 하다는 그 섬세함이 고맙고 놀라웠다. 다음에 하면 되니 괜한 마음 쓰지 마시라, 부러움을 숨기며 말했다.

 

입주

 

2015년 여름, 나는 세 번째 입주 작가 모집에 선정됐다. 원고를 청탁받을 때보다 더 신났다. 세상이 나를 작가로 불러주는 기분이랄까? 그 어떤 뿌듯함이 있었다. 머리에서는 다른 좋은 작가들을 대신해 얻어낸 것임을 기억하고 겸손하라고 시키는데도 들뜬 마음을 누르기는 어려웠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돌아보면 나는 참 오래 버텨서 소설가가 되긴 했으나 그 세월이 무색하게도 아직 수행은 덜 된 놈이었다.


호텔 프린스의 ‘소설가의 방’에 대한 기사에 자주 소개되는 문구가 있다.


‘이 곳은 소설가가 집필하는 객실입니다. 조용히 이동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객실 문에 4개 언어로 적혀 있는 이 글귀는 어느 큰 절의 귀퉁이 공간 앞에서 만나곤 하던 안내문, ‘이곳은 스님들이 수행하는 곳이니 출입을 금합니다’를 떠올리게 했다. 과연 내가 수행하듯 집필할 수 있을까? 그즈음 나는 데뷔 초의 관례와 운이 합쳐져 원고 청탁을 연이어 받다가 그도 한차례 지나가고 잠시 뜸해진 틈에 있었다. 힘든 여정을 마친 기분이었다. 그래서 집필하는 데 쓰라고 객실을 내준 성의와는 무관하게 일단은 좀 쉬고 싶었다. 쉬면서 이제껏 나의 문장들을 되짚어보고 싶었다. 그것으로 내 심신이 건강해지는 수행이 된다면 좋을 것 같았다. 수행을 빙자한 휴식, 휴식을 빙자한 직무유기를 하면서 대개의 시간은 주로 읽는 데 보냈다. 내가 펼친 어느 책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그들은 이제 막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조지 왕조풍 호텔 일층 룸의 아담한 거실에 앉았다. 열린 문으로 들여다보이는 옆방에는 약간 좁다 싶은 사주(四柱) 침대가 놓여 있었고, 사람 손을 타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새하얀 침대 커버가 놀랍도록 매끄럽게 펼쳐져 있었다. 에드워드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호텔에 묵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반면 플로렌스는 어릴 때 부터 아버지와 자주 여행했던 터라 호텔에 익숙했다.


_이언 매큐언, 『체실 비치에서』


입주 작가로 선정될 때 ‘호텔’을 소재로 하는 작품을 제출해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챙겨갔던 책이다. 나는 두 사람 중 에드워드가 나랑 많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20대 때는 소설을 쓰느라, 30대에 접어 들어서는 밥벌이까지 병행하느라 여행을 별로 다니지 못했다. 그리스 산토리니는 고사하고 고향인 포항도 1년에 한 번이나 갔던가 싶다. 돈과 시간이 그렇게까지 없어서는 아니었던 것 같고, 아무래도 마음을 너무 소설에만 몰아놓았더니 거기에 몸이 묶여버렸던 게 아닌가 싶다.


사정이 그런 지경이라 ‘호텔’에 적응해야 하는 과제가 생겼다. 막상 쓰려고 하니 창피하긴한데, 처음 하루 이틀 정도는 잠시 밖에 나갔다가 들어올 때마다 직원들이 나를 잡인으로 오해하고 붙잡을까 싶어 객실 키를 잘 보이도록 손에 들고 프런트 앞을 지나갔다. 또, 조식을 먹으러 식당으로 내려갈 때는 반드시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모르긴 몰라도 민박이나 게스트하우스 같은 곳과는 조금 다른 격식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투숙객 중에는 부스스한 머리에 반바지 차림으로 내려와서는 슬리퍼 신은 발을 다른 쪽 무릎 위에 얹은 채 마구 떠들며 식사하는 사람도 많았다. ‘저런 불한당 같은 놈들’ 테이블마다 냅킨이나 화병 등을 정갈하게 정리해놓은 호텔의 정성이 민망해 나는 내가 오버한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속으로 그들을 나무랐다.

 

 

진짜 여행


평소 나는 아침을 굳이 챙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호텔에서 머문 6주 동안은 조식 시간을 늘 기다렸다. 집에서 거처를 옮기는 바람에 출근에 걸리는 시간이 길어졌지만 호텔 식당에서의 호사를 놓치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건 여행 중이라는 환상을 짙게 향유하기 위한 나만의 방식이었다. 식당은 내가 호텔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실감 나게 해줬다. 엘리베이터에서 곧장 식당 홀로 이어졌는데 문이 열리면 언제나 직원분이 반겨줬다. 동시에 담백하고 향긋한 음식 냄새들이 허기를 자극했다. 나는 다른 투숙객들이 내려오기 전에 맨 먼저 도착해서는 내가 앉을 자리를 편하게 골랐다.


창가의 어느 2인석에 앉아 하루는 몇 가지 샐러드와 빵으로, 다음날은 소시지나 베이컨으로 만든 요리와 계란프라이 위주로, 또 다음날은 밥과 국으로 아침을 즐겼다. 식사를 하다 보면 나는 어느새 창밖으로 그리스 산토리니의 해변을 상상하고 있었다. 호텔이 끼고 있는 작은 골목은 해안의 오솔길이 되고, 대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소리에서 파도가 모래를 뒤적이는 모습을 보는 식이었다. 그래서 나는 호텔 식당 창밖 풍경을 ‘명동해변’이라 이름 지어보기도 했다.

 

이따금 직원분이 다가와 빈 잔에 물을 채우며 필요한 게 없는지 살펴주거나, 집필은 잘 되고 있는지 물으며 응원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일주일쯤 되니 내가 앉던 자리는 아예 지정석처럼 돼 미리 물잔과 접시 같은 것들이 세팅돼 있었다.


그 외에도 호텔의 여러 배려를 받으며 여행 기분을 만끽했는데 내가 굳이 사양한 배려가 하나 있었다. 퇴근해서 돌아오면 객실 바닥은 부스러기 하나 없이 말끔히 청소돼 있었고 침대 시트 등도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는데 그건 어쩐지 너무 황송했다. 그냥 담당자의 업무라고 여기면 될 것을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매일 묵긴 하지만 머무는 시간이 길지 않으니 객실은 별로 어지럽혀지지 않았고 필요하면 내가 치울 수 있었다. 아마도 하루 정도는 청소를 하지 않아도 괜찮겠다 싶어서 호텔에 그렇게 얘기해놓은 뒤 하루를 이틀로, 이틀을 사나흘까지 연장했다. 사실 6주 내내 청소를 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호텔에서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걱정은 들어서 1주일에 한 번 정도씩만 부탁했다.


말했다시피 나는 호텔에서 직장으로 출퇴근했다. 을지로입구역에서 2호선을 타야 했는데 호텔로부터 약 20분이 좀 안 되는 그 거리를 늘 걸어서 다녔다. 걷는 걸 워낙 좋아하기도 하거니와, 아침의 명동과 저녁의 명동이 보여주는 극명한 풍경 차이가 경이로워 눈에 잘 담아두고 싶었던 욕심도 있었다. 아직 여행자들이 숙소에서 나서지 않은 시간에 출근하면서 가게들이 문을 여는 명동을 가로질렀고, 퇴근할 때는 사람들이 북적이고 음악 소리가 가득한 또 다른 명동을 구석구석 누볐다. 명동과 호텔은 그렇게 나의 하루를 그냥 평범한 일과가 아니라 특별한 여행으로 만들어줬다.

 

영원한 창작 동력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심기일전하면 단편 소설 하나쯤은 쓰고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몇 가지 이야기를 스케치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이런 게 무슨 소설가란 말인가. 호텔에게 미안하기도 해서 퇴실할 때쯤 큰 자괴감이 들었다. 그런데 과연 정말 허송세월만 했던가?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아닌 듯하다. 호텔 프린스는 내게 도심 속 번화가인 명동을 산토리니로 만들어 보여줬다. 7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그렇게 호텔 프린스에 입주해 있던 6주의 시간을 바로 어제의 일인 듯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호텔에서 그렇게나 긴 기간 동안 무상으로 머물러봤다는 경험은 내게 있어 우주에 나가봤다는 이야기만큼이나 큰 자랑거리로 남아 있다. 소설가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테니까.


감동적인 영화 <내 사랑(Maudie, 2016)>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선천적인 몸의 불편 때문에 삶의 대부분을 남에게 무시받으며 살았던 주인공 모드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남편 에버렛의 손을 잡으며 말한다.


“나는 사랑받았어요.”


소설가로 활동하다 보면 글이 써지지 않아 스스로 재능을 의심하기도 하고, 작품이 별로 읽히지 않는 것 같아 위축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호텔 프린스가 나의 창작을 응원하며 제공해줬던 추억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추억은 늘 내 창작의 동력이 돼준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지면을 빌려 좀 간지러운 감사를 전하고 싶다.


“저는 대우받았어요.”


오늘 나는 오랜만에 명동으로 간다. 호텔 프린스에 입주하게 될 작가를 선정해달라고 부탁받아서다. 세 번째 입주 작가가 열네 번째 입주 작가를 뽑는다. 듣기로는 여전히 경쟁률이 높단다. 어떤 분들은 모시고 더 많은 어떤 분들은 다음으로 미루는 일이라 미안하고 부담스럽다. 그러나 몇 분에게나마 ‘명동해변’과 같은 영원한 창작 동력을 선물할 설렘도 크다.

 

부디 그분들의 눈과 귀에도 그리스 산토리니가 펼쳐지길!

 

 

 

 

 

 

 

 

 

김덕희

(소설가,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1979년 경북 포항 출생. 2013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데뷔. 소설집 <급소>, <사이드미러>가 있으며 제23회 한무숙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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