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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근

[최수근의 Kitchen Tools] 셰프와 조리고서(調理古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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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조리박물관에 오면 처음 보는 곳이 조리도서관이다. 여기에는 2000여 권의 조리 관련 도서와 1000여 권의 논문이 전시돼 있다.(2021년 1월 기준) 이 책들은 셰프들이 평생 동안 보고 읽고 공부해서 손때가 묻은 귀한 책들이다. 책 한 권 한 권에 별별 이야기가 다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기증하신 분들하고 얘기해보면 기증할 때 딸을 시집보내는 것 같다고 하신 말씀이 이해가 간다. 

사진 제공_ 한국조리박물관

 

 

셰프의 남다른 취미생활
1983년에 파리 갔을 때 교민들 사이에서 돈을 많이 번 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여행사를 운영하던 분은 해외여행이 자율화되면서 성지순례자들이 많이 찾아와서 돈을 벌었고, 다른 한 분은 식당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필자가 근무한 한림 식당). 나머지 한 사람은 재일교포로 한식을 하면서 벼룩시장에서 한국에 관련된 물품들을 매매했는데, 그중에서도 한국무기 구입에 가장 큰 목적을 뒀던 사람이다. 한국전쟁(6.25) 당시 입었던 군복부터 내가 봐도 한국의 전쟁 물품에 대해서는 없는 것이 없었다. 이 물품들을 보면 벼룩시장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파리의 벼룩시장은 상설로 운영이 되는데 지금 가도 정말 사고 싶은 것이 많다. 소문으로는 여기서 옛날 조선시대 무기를 발견해서 국내에 팔아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소문이지만 조금은 신빙성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시장에서 처음 구한 고서는 100년 전에 만들어진 꼬르동 블루 교재였다. 이 책은 300페이지 정도였는데 구입하고 나서 너무 좋아서 내가 다니던 꼬르동 블루 학교에 가서 자랑한 기억이 난다. 당시 책값으로 5만 원을 주고 구입했으며 지금은 내가 좋아서 보관하고 있다. 후에도 고서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주방에서 근무하다 보면 책을 구입해 읽는 것이 쉽지 않다.

 

지금도 종종 헌책방에 가서 책 구입을 해보는데 그중 고(古)조리서는 매우 귀한 서적에 포함이 된다. 2020년에는 1953년에 발행된 책을 구입했다. 파리의 센 강둑(Paris, Banks of the Seine)에 있는 서점에서 고(古) 서적을 구경하다가 보게 된 책인데, 내 전공이기도 하고 1953년이면 우리나라가 전쟁통인데 이런 책이 발행되다니 신기하기도 해서 구입을 결정했다. 그래서 흥정해보니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다. 상인이 보기에 내가 셰프 같으니 수첩 같은 책을 12만 원이라고 했다. 내가 관심을 보였더니 잠시 후 10만 원으로 가격이 내려갔다. 나는 그 책을 당장 구입했다. 시간이 있었다면 다음 날 가서 더 싸게 사고 싶었지만 오고 가는 시간을 생각하니 바로 사는 것이 해답인 것 같아 구입을 결정했다. 지금 그 책은 내 서랍에서 잠자고 있지만 이걸 볼 때마다 당시 겪었던 일들이 생각나서 즐겁다. 이러한 즐거움 때문에 나는 그 지역의 관광기념품 보다 그곳에서 파는 오래된 조리 관련 물품이나 서적을 구입하는 것이 취미가 됐다.


에스코피에의 조리서 ‘르 귀드 컬리네리(Le Guide Culinaire, 1903)’
후배 장병동 셰프가 프랑스 여행 중 조리 전문 서점에서 에스코피에 조리서를 보고 사려 했는데 10년 전에 한화로 120만 원 (2010년 기준)을 내라고 해서 그때는 포기하고 서점 주인에게 “내가 언젠가는 다시 파리에 와서 꼭 구입하겠다.”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팔지 않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몇 년이 흐른 뒤 파리 출장이 생겨서 다시 찾아가 주인에게 예전의 약속을 이야기하니 그는 잊지 않고 창고에서 책을 가져다주면서 “좋은 책은 좋은 주인을 찾아간다.”라고 말하며 팔았다고 한다. 이 귀한 책이 바로 E·C·A 연구소 이름으로 기증돼 조리박물관 내 전시되고 있는 ‘르 귀드 컬리네리’다. 책을 간단히 소개하면 프랑스 셰프 에스코피에(Auguste Escoffier, 1847년~ 1935년)가 쓴 책으로 전 세계 셰프들이 현대 조리법의 신약성서라고 할 정도로 유명한 조리서다. 조리박물관에는 이 책 외에도 원로 선배님들이 소장하고 있던 조리 고서들을 볼 수 있는데 선배 셰프들의 시간이 담긴 이 책들을 후배들에게 소개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번에 백인수님, 김방원 님, 정지철 님, 이상정 님 등이 유명 서양 조리고서를 기증해 주셔서 전시하고 있다. 감사의 마음을 이 지면을 통해서 전달하고 싶다. 솔직히 내가 평생 보고 공부하던 책을 후배들에게 선뜻 내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모든 책에 애착이 가지만, 적은 봉급을 아껴가면서 모은 돈으로 구입한 것일수록 더 그렇다. 나는 후배 셰프들을 만나면 “조리고서는 여러분이 아껴
야 한다.”라며 책의 중요성을 늘 강조한다.

 

셰프들이 저술한 조리서
박물관에 기증한 책 중에는 조리사가 직접 저술한 주옥(珠玉)같은 책들이 있어 소개해본다. 조리사가 쓴 조리책들 중에서 남경희 님의 ‘음식 잘 만드는 법’, 진양호 님의 ‘현대 서양조리’, 박정식 님의 ‘메뉴 해설’ 등이 있다. 첫 번째로 소개할 책은 남경희 님의 한식조리서다. 충청도 속리 산 밑자락에 가면 ‘경희 식당’이 있다.

 

 

이 식당에는 속리산에서 생산되는 산채를 주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판매한다. 이 분의 음식은 많은 식도락가들이 칭찬한다.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들도 (박정희, 김영삼, 전두환, 노태우, 김대중 전(前) 대통령) 식사를 하시고 맛있다고 했다는 글이 있다. 이 식당의 주방에 가면 한문으로 ‘무념(無念)’이라고 쓰여 있는 액자가 있다. ‘조리(調理)에 있어서 잡생각 없이 해야 한다’라고 해서 주인 할머니가 쓰신 글이라고. 이 분은 6.25 때 충청도로 시집와서 식당을 운영하시게 됐다고 한다. 식당의 이름도 성함이 남경희 여사여서 경희 식당이다. 현직 조리사로서 이 분이 쓰신 ‘음식 잘 만드는 법’이라는 책은 당시 만권이 팔린 한식 베스트셀러 요리책이다. 두 번째 소개하고 싶은 책은 경주호텔학교를 대표하는 박정식 교수님의 ‘메뉴 해설’이다. 박정식 교수는 경주호텔학교에서 정년퇴직을 하시고도 후학 양성을 위해 많은 일을 하셨다. 조선호텔에서 셰프를 하신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조리사의 질적 향상에 몸 바치신 분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양식 셰프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셨다. 저서 ‘메뉴 해설’은 후배 셰프들을 위해서 1980년에 출판했지만 당시 공무원이 책을 출판하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어서 초판만 찍게 된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책이다.


그 외에도 진양호 교수님이 집필한 ‘현대 서양조리’는 형설출판사를 통해서 출판된 책으로 제목은 ‘현대 서양조리’지만 현대 서양조리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얻은 지식을 책으로 엮어서 이론과 실무를 아우르며 제자들을 지도한 교재로 큰 의미가 있다. 서양조리를 총망라한 책의 내용과 더불어 당대 실무에서 사용됐던 레시피가 실려 있는 것 또한 이 책의 가치를 한층 더 높였다. 앞서 훌륭한 조리서들을 많이 소개했지만 솔직히 필자가 저술한 책의 초판도 애착이 간다. 나 역시 1988년에 출판한 ‘소스의 이론과 실제’ 초판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이 책이 나올 때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면 가슴이 울컥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내 사인(Sign)이 적힌 초판 책이 헌책방에서 굴러다니는 것을 발견했을 때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요즘 책 뒤에 사인을 할 때 물어보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이 책을 버리게 되면 내가 사인한 면을 제거하고 폐기 처분해달라고 부탁한다. 책은 세월이 가면 고서가 된다. 지금 소장하고 있는 소중한 책을 잘 보관하기 바란다.

 

 

최수근
한국조리박물관장/음식평론가
하얏트, 호텔신라에서 셰프를 역임했고, 영남대, 경희대 등 대학에서 후학 양성에 힘쓰다 2021년 경희대학교 호텔관광대학 조리·서비스경영학과 교수로 정년했다. 
현재 한국조리박물관장과 음식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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