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직장에서 커리어를 쌓은 뒤 이직하는 것이 보편적인 사회다. 여러 회사의 업무를 배우는 것도 경험을 확대하고 다채로운 커리어를 쌓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큰 이점이다. 그러나 한 회사의 구석구석을 파악하며 스페셜리스트로 자리 잡는 과정도, 드문 만큼이나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된다. 익숙한 곳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발명가 시선을 겸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6월호에서 만나볼 인터뷰이는 첫 입사 호텔에서 27년을, 주니어부터 한 팀의 팀장이 되기까지 근무하고 있는 호텔리어다. 객실부터 F&B부터 판촉팀까지 한 호텔에서 수많은 이직을 경험하며 호텔의 구석구석을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된 호텔리어, 스위스 그랜드 호텔 판촉팀 손은영 팀장(이하 손 팀장)이다. 길을 찾아 떠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길을 만든 손 팀장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인터뷰이 스위스 그랜드 호텔 판촉팀 손은영 팀장
사진 조무경 팀장
인터뷰 장소인 스위스 그랜드 호텔에는 5월의 녹음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1988년 개관 이후 수많은 고객들이 다녀간 호텔은 단단한 골격 구조와 함께 클래식한 분위기가 조화로웠다. 곳곳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체크인, 체크아웃을 마치는 외국인 고객들을 자주 만날 수 있어 더욱 이국적인 풍경이었다. 손 팀장은 레트로 열풍에 맞춰 로비와 복도, 객실 등 호텔 구석구석에서 촬영이 이뤄진다고 귀띔하며, 앤티크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에이트리움 카페로 안내했다.
스위스 그랜드 호텔에서 약 27년 간 근무한 것으로 알고 있다. 우선 입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우연한 기회에 ‘관광행정학과’를 알게 됐고, 당시에는 관광업계에 들어가서 행정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것으로 예상하고 지원했다. 그런데 졸업할 때 쯤 호스피탈리티는 직접 현장에서 뛰어 다니며 고객과 만나는 접점을 만드는 산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항공사나 일본어 가이드를 할까 고민하다가 우연찮은 기회로 첫 지망이었던 당시 그랜드 힐튼 서울에 취직했다. 첫 직무는 F&B, 리셉션이었다. 육아 휴직 뒤에는 세일즈 & 마케팅 업무를 맡으며 근속 중이다.
오랜 기간 한 직장에서 근무해 왔다. 그동안 호텔 생활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한다면?
이직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할 수도 있지만, 한 자리에서 많은 이직자들을 만나는 것도 또 다른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일은 사람과 하는 것이고, 결국 사람이 바뀌니까 같은 업무라도 달리 느껴지며, 또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되더라. 특히 글로벌 브랜드와 독립 호텔을 한 직장에서 경험해 조직 내 직무 경험을 더욱 다양하게 쌓아나갈 수 있었다. 업무 다양성을 경험하니 더욱 오래 자리하게 됐다.
아무래도 많은 총지배인과 각 팀의 리더들을 거친 것이 기억에 남는다. 특히 가장 오래 재직한 버나드 브렌더 총지배인이 떠오른다. 그분의 평소 매너와 업무 스타일 또한 존경스러웠지만, 조율하는 모습을 보며 많이 배우기도 했다. 일흔이 넘는 나이에도 행사 장소에 가장 먼저 나와 테이블을 세팅하고 스태프들을 일일이 만나는 것을 보면서 권위가 아닌 솔선수범을 통한 존경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체득했다.
또한 내가 속한 세일즈 & 마케팅팀과 협업 부서 간의 조율을 이끄는 데도 주안점을 뒀다. 나는 기본적으로 ‘뭐든지 하면 된다’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데, 사실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부서도 있다(웃음). 각 부서마다 바이블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가장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알게 된 우리 호텔의 장점과 단점을 찾아 디테일하게 설득하며 각 팀과의 라포 형성을 위해 노력했다. 타 호텔과의 경쟁 자료와 우리 호텔의 특징을 설명한 자료를 제작해 배경 지식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행사를 마친 뒤에는 최고의 퍼포먼스를 끌어내 매출 상승에 기여했기에 장기적으로는 서로 더 단단한 믿음과 신뢰를 느끼게 된 것 같다.
다양한 부서에서 근무를 해왔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도 궁금하다.
2008년 경 진행한 모 대기업의 행사가 기억난다. 전 직원들이 모이는 마케팅 컨퍼런스였는데, 서울에 있는 호텔에서 당시 1000명 규모의 행사를 받을 수 있는 여건이 안 됐다. 그런데 우리 호텔에는 직원들이 단체로 묵을 레지던스도 있고, 컨벤션도 있으니까 한 번 해보자고 한 거다. 행사 자료만 백과사전처럼 빽빽했다. VIP 동선, 테이블과 의자의 방향까지 지시돼 있었고 삼시 세 끼를 호텔에서 먹고, 책임자의 서명도 한 장씩 다 써내야 됐다. 용기를 간편하게 해서 한식처럼 찬이 여러 개 나오는 음식도 제공했고 주방이 부족해 컨벤션 홀을 개조했었다. 힘들었지만 성공적으로 유치하니 어마어마한 매출을 올리게 되더라. 추후 그 기업이 속한 그룹사의 글로벌 행사와 컨퍼런스를 연이어 유치했다. 당시 구두 신고 이곳저곳 직원들과 뛰어다니며 어렵다는 파트너사들 설득하고, F&B, 컨벤션 직원들과 협업했었지. 호텔에도 도움이 되고 스스로도 효용성을 고취시키면서 일했던 터라 기억에 남는다.
이렇듯 주요 업무들을 맡아오면서 깨달은 교훈, 혹은 얻게 된 역량은 무엇인가?
성을 쌓는 자 망하고, 길을 내는 자 흥한다. 징기스칸의 말이다. 이 한 문장에 모든 것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웃음).
행사는 제안과 설득이 주가 된다. 호텔이라서 이런 점은 안 된다, 라고 방어적으로 나오는 것보다는 안 되는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호텔이라서 가져올 수 있는 프라이빗한 행사의 장점과 안정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편이다. 이러려면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도 많이 설득을 해야 한다. 계몽이라고 할까(웃음)? 그래서 역제안을 자주 하는 편이다. 행사를 하고 싶은 주체에는 우리 호텔에서 해줄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서 기존 기획안에 호텔에서 할 수 있는 부분을 플러스해서 제시하고, 내부 직원들에게는 큰 그림을 같이 그려 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예를 들어 기업들에게는 다른 장소에 비해 비싼 만큼 ‘돈 값을 한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원하는 이미지에 맞게 커스터마이징을 진행했으며, 내부적으로는 현재 호텔뿐만 아니라 외부에서도 주목하는 행사의 거시적인 트렌드와 이 지역에서 이 행사를 기획 할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시너지를 제시했다. 종내에는 개인적으로 영감을 받게 되는 커리어의 그림이나 미션을 많이 보여줬다. 회사를 떠나 자기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줘야 더욱 의욕이 생긴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이 있다. 회사는 이윤을 창출하는 집단이다. 호텔이나 직원들이 이 행사를 해서 나에게 이러한 보상과 이러한 이윤이 떨어진다는 완벽한 제시안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가장 재미있고, 또 행복하게 일하게 된다. 현재 다시 재개되는 중이지만, 코로나19 이전 행사를 진행하면서 ‘손 팀장은 열심히 하는 만큼 받아’라는 소문이 도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확실한 결과물을 보이고, 또 마땅히 그만큼 요구하며 나와 동료들의 커리어를 지켜 나갔다.
호텔의 어떤 매력이 이렇게 장기간 근무를 하게끔 만들었다고 생각하나?
호텔에 오는 사람들은 늘 즐겁다. 여행, 관광, 하다못해 행사를 하러 오는 사람들까지 호텔의 인프라를 즐기며 자신의 여가와 업무를 준비한다. 호텔리어들도 마찬가지다. 업무가 힘들더라도 일반 직장에 비해 쾌적하고 준비돼 있는 공간에서 업무를 할 수 있으니 다른 기업에 비해 공간적인 여건이 훌륭하다고 본다. 실제로 나에게는 그런 풍경이 늘 플러스 요소가 됐다. 또한 처음 입사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호텔은 성공한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들의 일하는 모습을 나도 모르게 배우고, 그들의 습관과 루틴을 배우면서 나도 발전해 가는 걸 느끼니 개인적으로도 정말 뿌듯하더라. 내가 나중에 어떤 기업으로 가고 추후에 어떤 사업을 준비하더라도 배울 수 있는 공간이라는, 그런 가능성을 보여주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호텔리어로 생활하는 것이 만족스럽다.
장기간 근속해오면서 희로애락이 있었을 것 같다. 힘들었던 시기는 없었는지 궁금한데.
아무래도 글로벌 브랜드를 선호하는 세간의 시선도 있기에, 힐튼 브랜드를 떼고 로컬호텔로 전환됐을 때는 직원들도 그렇고 심정적으로 흔들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웃음). 그러나 브랜드 이름이 바뀌더라도 안에 내부 시설은 그대로기 때문에 특급호텔이라는 상징성은 변함이 없었고, 오히려 독립 브랜드로 리뉴얼 했기에 새로운 비전이라고 생각하며 업무에 집중했다.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순간은, 코로나19 때였다. 우리 호텔은 패기 있고 유능하며, 빠른 조직으로 만들고자 했던 나의 신념으로 타 호텔에 비해 신입 팀원들도 많이 구성돼 있었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걸출한 실행력으로 해외 행사 유치에 전력을 다해 여러 비즈니스를 이끌었는데 코로나19로 전면 취소되고, 원치 않게 많은 팀원들이 떠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 호텔은 오랜 세월을 간직한 만큼 오래 근무한 직원들이나 호텔 자체에 애사심을 지닌 직원들 또한 적지 않다. 한 팀으로서 서로 의지하고 지원하면서 버텨 나가기도 했다. 각자 맡은 업무가 아니더라도 서로 돕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렇듯 인간적이면서도 합리적인 문화를 바탕으로, 어떻게 하면 효율성 있는 업무를 수행할 수 있을 지 이야기를 많이 나누며 라포를 형성 중이다.
새로운 비전이라는 말이 인상 깊다.
아무래도 글로벌 그룹에 속하면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일관적인 브랜드의 헤리티지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에. 그러나 새 브랜드로 론칭하면서 우리만의 스탠더드를 적립하게 되더라. 객실 요금도 호텔의 니즈와 계절, 시간에 따라서 조율해 보고 프로모션도 직원들끼리 새롭게 만들어 보는 거다(웃음). 새 호텔을 만들어간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업무 다양성에 비중을 두는 나로서는 우리 호텔에 남을 이유가 충분했던 것이다.
스위스 그랜드 호텔 자체의 매력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은데.
물론이다! 다른 호텔에서 캐스팅 멤버 제안을 받을 때도 있었고 더 높은 직위를 준다고 할 때도 있었다. 주변에서 다음 레벨로 뻗어 나가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때마다 스위스 그랜드에서 새로운 프로젝트, 새로운 업무를 맡기고 또 그만큼 신임하더라. 어떻게 보면 운명인 것 같다(웃음). 다른 호텔들은 조금씩 변한다. 물론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것은 장점이라고 본다. 새로운 니즈에 부응하고, 고도화하는 부분이니까.
그러나 우리 호텔은 변화가 느리다. 1980년대에 아주 견고하고 클래식하게 지어졌기에 오히려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방문 할 때마다 이전의 기억을 만들어 가고 또 새로운 기억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10년 전에 내가 이 공간에서 저 피아노 연주를 들었지, 소개팅을 했었지, 내 기억을 보관하는 곳이라고 할까. 그리고 다른 곳에 비해 서울 시내 같지 않다는 것도 장점이다. 일을 하더라도 항상 여행을 하는 기분, 자연과 산을 바라볼 수 있는데 첨단의 도시인 서울의 한 복판이라는 양가적인 구조, 이러한 호텔의 이미지와 또 가치에 공감하기에 지속적으로 근무하게 된 것 같다.
이직이 잦은 시대다. 오래 남고 싶어도 주변에서 이직을 해야 한다고 채근하는 시선도 없지는 않다. 새로 들어오는 주니어 직원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도 있을 것 같다.
제가 생각하는 전문가는 자신이 하는 일에 어떤 것을 가져와도 자기 것화해, 그 일과 접목할 수 있는 사람, 즉 본인이 하는 일에 대해선 다양한 경우의 수도 능히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전문가가 돼야, 일에 대한 판단의 정확성이 높고, 결과에 대한 예측도 가능하다고 본다.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곳에 있던지 비슷한 수준의 일을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한단계 한단계 차근차근 밟아 기초를 튼튼히 하고 그 이후에 자신만의 성을 쌓아야 할 것이다.
잦은 이직은 이직한 회사에서의 인정과 빠른 성과를 도출하기 위해 본인이 해오던 일, 익숙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업무의 확장성을 통해 기본 배경지식을 넓히고, 구조화하고, 체계화해, 전문가 영역으로 넘어가는 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이직을 권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일에 대한 가치와 목표를 명확히 하다 보면, 주위의 시선 때문에, 어떤 결정을 내리지는 않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내 인생의 결정권을 남에게 넘기지 말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라고 하고 싶다. 자신이 발전할 수 있고 개발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어떤 곳이든 전문가의 영역으로 넘어 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하고 싶다. 전문가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시간을 이겨낸 사람은 어떤 기업이던지 반기는 인재, 즉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될 것이다.
향후 계획이 알고 싶다.
여러 부서를 거치고 또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으며 항상 하게 되는 생각이 있다. 내가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 배워야 한달까(웃음). 내가 늘 정답이 아닌데, 고정관념에만 사로잡혀 있으면 발전이 없다. 그래서 더 공부하고, 공부하는 게 재밌다.
또한 호텔업계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특히 중간 관리자들의 이탈이 심하고, 여러 인력난으로 인해 다양한 DT 기술들이 접목되고 있다. 과도기라고 생각한다. 중간 관리자들의 지속적인 커리어 증진뿐만 아니라 코칭 기술을 접목시켜 호텔리어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알려주고 싶다. 외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내적인 성장도 함께 할 수 있도록 돕는 존재가 되고 싶다. 마음의 설득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현재 나의 목표이자 새로운 꿈이다.
손 팀장은 인터뷰 내내 새로운 것을 배우며 발전하기를 원하는 겸손한 면모를 보였다. 이제는 커리어뿐만 아니라 내적인 성숙을 통해 나 자신을 지지하는 코칭 공부를 해나가며, 여러 사람들을 서포트하고 지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싶다는 그의 말에서 업계, 더 나아가 인간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27년 간 한 호텔에서 근무할 수 있었던 건 호텔의 매력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시선에서 새로운 업무를 발견하려는 열정 또한 큰 이유가 됐을 것이다. 독립 브랜드로 거듭난 스위스 그랜드 호텔의 미래가 더욱 기대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