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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3 (금)

[김용덕의 스페셜티 커피 이야기 9] 인문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커피 문화

내가 20대 초반, 아마도 1978년이나 1979년 쯤이 아니었을까? 산을 막 다니기 시작했던 무렵 어느 주말, 혼자서 소백산 국망봉을 향해 걷고 있을 때였다. 그 때 버려져 있던 신문 한 조각에서 읽은 사설이 20대와 30대의 나를 잡아준 한줄기 기둥이 됐다. 그 사설의 제목은 ‘대학이란 무엇인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에 들어가서 대학에 대한 갈망을 하고 있던 갓 20대의 나에게는 물론이고 50대 후반에 이른 지금까지의 나에게 중요한 언어가 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글이 준 영향은 지대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사설은 ‘대학이란 자유를 배우는 곳’이며, ‘자유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설명을 하는데 자유는 자기 자신의 주인된 의식을 갖는 것, 즉 자기 자신의 주인은 ‘나’라는 말로 정의되는 ‘자유’가 대학이 가져야 할 배움의 기본이라고 이야기한, 200년 전의 독일의 교육학자이자 정치가인 훔볼트(Karl Wilhelm Humboldt, 1767~1835)의 말을 인용한 글이었다. 2,30대의 한줄기 기둥이었던 이 언어를 뒤로 한 채 30대 후반 이미 은행에서 과장 말미에 진입한 나는 많은 점에서 매너리즘에 빠진, 그냥 단순한 은행원이었다. 그 이후 나의 40대와 우리 모두가 아는 IMF(국가부도시대)가 오고 나는 음식업을 거쳐 커피와 만나게 됐는데, 커피를 만나는 과정 그 자체가 결국은 이전 기고에서 말했듯 내가 2,30대에 기억했던, 자유를 배우는 온전한 과정이 들어 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젊은 시절 내 삶을 지탱해 주던 막연한 자유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정돈하는 온갖 것들을 어떻게 만났을까? 이 긴 여정들이 결국에는 우리가 요즘 흔히 말하는 ‘인문학’이란 말로 재정리될 수 있다. 인문학이라고 정의되는 많은 것들(문학, 역사, 법률, 철학, 고고학, 예술사, 비평, 예술을 내용으로 학문)도 인간을 내용으로 하는 학문이고 결국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커피가 어떻게 국가 경쟁력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라는 고민과 함께 시작한 커피의 여정은 처음에는 커피 맛을 알기위한 여정이었다. 일본의 오래 됐다고 일컬어지고, 또한 유명한 커피숍에 방문해 그들의 커피 맛을 음미하며 시스템을 관찰하고(처음에는 아예 건축과 디자인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다.) 그들과의 교류를 시작했다. 그 때의 내 시선은 ‘그들을 어떻게 따라갈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뛰어 넘을까’였다. 그들이 가진 시스템보다 더 낳은 시스템과 품질, 그리고 더 멋진 공장과 커피 하우스를 짓는 것이 나에게는 과제였다. 일본을 방문한 후 그 다음이 유럽이었다. 유럽의 유명 커피 하우스, 즉 오래돼 이미 전설이 된 수많은 카페, 파리의 프로코프(1686년 오픈, 현재까지 영업),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카페 Gilli, 베니스의 플로리안 등 수많은 카페를 방문하며 다른 카페문화를 머리속에 정돈하기 시작했다.


커피를 공부하면서 가장 중요했던 것 중 하나가 커피역사 공부였다. 커피의 역사는 결국 유럽의 르네상스시대의 시작과 함께였고, 유럽의 근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큰 흐름이었다. 커피가 시작된 오스만 투르크 시대는 유럽이 르네상스의 본류로 들어가는 시기여서 그 시대 역사를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로렌초 메디치(1449~1492)를 만났고, 또한 그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날 수 있었다. 다빈치의 삶의 여정을 따라 피렌체와 밀라노를 거쳐 베니스로, 그리고 마지막 여정이었던 프랑스 클루의 앙부아즈 성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그의 흔적을 따라 건축과 예술을 동시에 만날 수 있었다. 또한 그 시대보다 앞섰던 또다른 인물인 알리기에리 단테(1265~1321)와 프란시스코 페트라르카(1304~1374), 데카메론을 쓴 보카치오(1313~1375)까지, 모두 커피를 통해 만난 인물들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예술과 건축계통의 3대 천재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그리고 라파엘로를 꼽을 수 있는데, 그들은 그 누구의 도움없이 스스로 빛난 인물들이다. 반면 단테와 페트라르카, 그리고 보카치오는 구덴베르크의 인쇄술을 만나며 그들의 생애가 끝나고 100년도 더 지난 후에야 이름이 알려졌다. 단테는 그가 사망한 후 1477년 단테의 신곡에 주석을 달아 처음으로 출간됐고, 페트라르카의 작품은 그가 사망한 후 150년이 지나 알도 마누치오(베니스의 인쇄업자)에 의해 인쇄돼 10만부나 넘게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됨으로써 오늘날의 명성을 얻게 됐다. 생각해보라. 지금도 10만부는 엄청난 베스트셀러에 들어가는데 그 시대에 10만부라는 것은 상상을 할 수 없는 부수이다. 보카치오 또한 다르지 않다. 그들이 죽은 후 150년이 지나 인쇄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다면 결코 오늘날의 명성이 존재하지 않았고, 또한 이 책들을 통해서 이탈리아어가 널리 읽혀지고 쓰여지지 않았다면 오늘날 이탈리아어는 다른 언어로 정리될 수도 있는 일이다. 수많은 인문학들은 이렇게 인쇄술이라는 기술과 접점이 생기면서 빛나기 시작한다는 것은 과한 생각일까?
커피를 통한 역사를 알아가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많은 또 다른 역사를 만나기 시작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사망했던 그해 피렌체의 또다른 여인 카드린 메디치가 태어났고, 1533년 그녀가 14살 때 프랑스로 프랑소와 1세의 며느리가 되면서 수많은 피렌체의 요리사와 궁중인들의 지침서인 카스틸리오네의 저서 ‘궁중인의 서’(1528: 저자인 카스틸리오네는 구덴베르크의 42행 성서와 더불어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평가 받고 있는 ‘폴리필로의 꿈’을 이 작품에 인용하면서 한 시간의 대화가 마치 천년처럼 느껴졌다고 혹평한 바 있다.)를 프랑스의 궁정으로 들이고 프랑스가 미식국가로 들어가는 첫 단추를 끼웠다는 공로를 세웠다는 평을 받는다. 카드린 메디치가 결혼한 1533년은 헨리 8세의 사생아로 불리워지는 엘리자베스 1세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그 후 엘리자베스 1세는 1603년 사망할 때까지 70년을 살면서 지금의 강력한 영국이 되는데 기틀을 마련한 강력한 여왕으로 평가 받고 있다. 얼마 전 파리에 출장을 갔다가 튜더 왕가의 유물전을 우연한 기회에 관람했는데, ‘천일의 스캔들’이라는 영화로 익숙해진 수많은 인물들의 인물화와 유물들을 보고 있으니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친다. 영국의 엘리자베스시대는 우리나라의 가장 무능했던 임금 중 하나였던 선조시대와 임진왜란을 겪던 그 시대와 완벽히 일치하던 시대이다. 영국은 1600년, 네덜란드는 1602년에 동인도회사를 만들어 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지화를 하면서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 초석을 다지던 시대이다. 우리나라는 눈을 뜬 소경과 같은 나라의 리더들 때문에 이 땅의 많은 국민들 상상도 할 수없는 고통과 치욕의 시대를 보내야만 했던 시기다.


역사를 본다는 것은 미래를 보는 것이다. 한 집의 가장이 어떻게 눈을 뜨고 행동하느냐가 그 집안의 모든 미래를 결정한다면, 한 국가의 리더가 어떻게 눈을 뜨고 역사를 통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는 한 국가의 천년의 초석이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그 시대에 우리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이 어린 시절 유럽에 배낭여행을 했더라면(마르코폴로는 330년 전인 1270년 전후에 이미 중국을 여행했다. 이 여행을 바탕으로 동방견문록이 그의 감방 동료인 루스티켈로에 의해 쓰여졌다.), 또한 그 당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내전기나 갈리아 전쟁기를 한번이라도 읽었더라면, 어떻게 로마라는 작은 도시국가가 그 넓은 페르시아와 갈리아, 그리고 브리타니 로 불려졌던 영국까지 그들의 영토를 넓힐 수 있는지에 대한 많은 것을 얻지 않았을까? 그 당시의 이순신 장군은 이탈리아라는 나라가 있는지 알고 있었을까? 나라를 이끌어 가는 리더들의 안목과 역사의식들이 아쉬움을 넘어 탄식스러울 뿐이다. 커피를 통해 역사를 만나면서 수많은 만남을 거듭하게 된다. 카페가 유럽에서 꽃을 피우는 시기는 인상파 화가들이 절정기에 있던 시기와 일치한다. 마네가 그렸던 많은 카페의 그림 속 수많은 이야기를 접하게 되고, 몽
파르나스의 가난한 화가였던 모딜리아니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Vincent van Gogh’와 그를 통해 일본의 ‘우끼요예’를 만나기도 한다. 오스트리아 빈의 첸트랄카페를 보면서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나며, 빈의 뒷골목에 있는 카페 하벨카에선 ‘에곤실레’를 만난다. 또한 잘츠브르크의 카페 토마셀리를 가면 ‘모차르트’를 만날 수 있다.


커피를 하면서 느낀 건축과 디자인에 대한 갈증이 나를 건축학과에 발을 들여놓게 만들었으며, 현재까지도 가장 풀리지 않는 어려움을 주는 것이 건축과 디자인이다. 건축을 따라 여행하다보면 뉴욕의 ‘MOMA’ 미술관을 어떻게 나의 커피숍으로 끌어 들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고, 화력발전소를 미술관으로 변모시킨 런던의 ‘Tate Modern’ 미술관이 나의 커피공장이었으면 하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게 된다.
커피라는 것을 때로는 맛으로만 인식하고 있는 것과 인문학이란 절대적인 큰 테두리에서 바라보는 것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인문학이 바탕이 됐을 때 그들은 우리들의 철학을 대면하게 되고, 소비자들은 커피라는 맛보다는 우리들의 철학과 접점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기업은 결국에 철학으로 경쟁하게 돼 있는 것이다. 지금도 디자인에 대한 갈증과 우리들의 정체성 때문에 순간 순간 수많은 결정과 직면하게 되는데, 이를 풀기 위한 과제로 결국 여행이라는 방법을 택하는 순간도 많다. 세계의 수많은 명품 브랜드를 보면서 무엇으로 그들을 뛰어 넘을까에 대한 고민들, 커피를 하면서 루이비통의 매장과 에르메스의 매장을 방문하게 되고 모네의 그림을 간직한 오랑주리 미술관을 가봐야 되는 절박함을 가지게 된다. 커피를 통해 만났던 수많은 역사의 인물과 예술가, 건축가, 디자이너를 통해 20대에 만났던 ‘자유’의 정체성을 세울 수 있었고, 인문학을 통해 국가관과 철학이 정돈되는 기업을 만들어 가고 있다. 아직도 늘 부족한 커피인이지만 13세기의 건축가 ‘아르놀포 디 캄피오’가 ‘뒤따로 오는 자에게 앞으로 나아갈 길을 보여준 자’라는 평을 받는 것처럼 어떻게 이 분야에서 뒤따로 오는 후배들에게 앞으로 나아갈 길을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숙제를 가지고 있다. 늘 동료들에게 “네 앞가림이나 잘 하라.”라는 경고를 받으면서도 이게 무슨 오지랖인가?


어쨌든 내 인생에 있어 커피를 만난 것은 가장 큰 행운이었다. 이 업계에서 작은 성공을 이루어서가 아닌 ‘자유’라는 내 자신의 주인의식을 얻었고, 그에 대한 정체성이 정리됐기 때문이다.

<2015년 6월 게재>



김용덕
(사)스페셜티커피협회 회장
김용덕 회장은 강원도 강릉이 커피 도시로 변화하는 구심점 역할을 한 테라로사 커피의 대표로 (사)스페셜티커피협회 활동과 함께 국내에 올바른 커피 문화 전파를 통해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힘쓰고 있다.
kyd788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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