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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4 (토)

레스토랑&컬리너리

[김성옥의 Erotic Food] 섹스는 프랑스 여자처럼, 샤또 데스클랑(Chateau d’Esclans)과 프랑슈 꽁떼산 L’ortdrlan 치즈


이른 아침부터 곱게 화장한 얼굴, 긴 손가락에 끼워진 담백한 액세서리, 늘씬한 다리가 돋보이는 스키니 진, 코가 뾰족한 앵글부츠. 파리의 그녀들을 닮고 싶었다.
‘아름답게 나이 먹기’, ‘아름답게 늙어가기’, ‘아름다운 여자로 살기’, ‘나이가 들어도 늙지 않기’, ‘나이가 팔십이 ㄷ햐도 여자여야 한다.’ 여고동창 모임에서 친구들에게 말을 하자, 친구들은 웃으며 “우리 아줌마들은 엄마이고 마누라지 여자가 아니야.” 친구의 그 말에 내 가슴이 시리고 추웠다.
그 말이 머릿속에서 한동안 맴돌아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탄력을 잃고 주름진 얼굴의 한 여자가 있는 거울 속에 혹여나 내가 있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누구인가?’를 한참 찾고 있을 때, 친구의 여행 제안에 프랑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고 떠났다.


길고 가는 다리가 프랑스 여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가냘픈 내 친구는 왜 결혼하지 않느냐는 통상의 질문에 ‘언제나 독신이’라고 답했다. 가정이라는 굴레에 묶여 남편과 아내로 살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 있으면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처럼 언제나 연인으로 살고 싶다.”고 말하는 그녀였다.
10년차 직장생활이 힘들게 느껴진 서른 중반 나이에 대학진학 때부터 전공으로 하고 싶었던 미술사 공부를 위해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한국인이 전무해 누구의 도움이 없어 혼자서 힘들게 미술사 수업을 받던 어느 날, 리포트 준비를 위해 박물관에서 작품 감상 중 그 사람과 어깨가 부딪혔고 뒤돌아서서 서로에게 미안함을 인사하고 헤어졌다. 그 날 저녁 까르푸 식품코너에서 우연히 또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식품이 담긴 비닐봉투를 들고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서양 미술사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눴다. 전문가에 가까운 풍부한 지식의 소유자인 그 사람이 그렇게 멋있어 보였다고 한다.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생각했단다. 다음 주말에 만나자는 데이트 신청을 받은 일주일 내내 설레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 남자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속삭이듯 읊조리는 샹송이 흐르고 있었고, 비가 내리고 흐린 날씨 탓으로 얇은 원피스만으로 한기를 느꼈는데 집안의 따뜻한 온기와 준비된 촛불이 그녀의 긴장과 추위를 녹여줬다. 식탁 위에는 허리가 잘록한 와인 한 병과 치즈가 담겨진 실버웨어가 놓여 있었다. 어떤 품종의 와인이었는지 어떤 치즈였는지 기억을 못했지만 와인 빛깔과 와인이 잔에 닿는 소리가 선명하게 지금도 기억될 정도라 한다. 춥고 배고파 금방 맛에 빠진 그 와인과 치즈를 가장 좋아하는 줄 알고, 이 후 그녀를 만날 때마다 잊지 않고 준비해 뒀다.
두 번째 만남에서 지난번과 같은 와인과 치즈를 준비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눈여겨보니 기분 좋은 산미와 복숭아 바닐라 향이 있는 부드럽고 우아한 향이 풍미를 더한 샤또 데스클랑(Chateau d’Esclans)과 프랑슈 꽁떼산 L’ortdrlan 치즈였다.
미술사에 대한 열띤 의견을 교환하며 얘기를 많이 했던 기억은 있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단다. 그러나 그 날의 달콤하고 황홀한 섹스는 바로 어제 나눴었던 사랑처럼 기억된다고 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런 뜨거운 사랑은 그 사람하고만 가능하다고.
그 날 밤 우아한 로제와인의 그 달달한 없었다면 그런 섹스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프랑스식 섹스라면 그런 섹스를 위해 프랑스에 살 수 있다고 했다. 약간의 신맛은 몸속의 세포 하나하나가 촉수가 돼 그 사람의 손길에 따라 살아 움직이고 키스를 할수록 더 깊은 곳에서는 복숭아. 바닐라의 향은 맛이 났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던 격정적인 섹스장면을 그녀 자신이 연출하고 있었다고 했다.


파리에 도착한 첫 날, 그녀는 프랑스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아이보리색 레이스 원피스를 차려입고 거울 앞에서 오르가즘에 다다른 표정으로 아이리스 향수를 뿌렸다. 그리고 그날 밤, 그녀는 오지 않았다. 나는 혼자 남아 갈증이 가시지 않은 밤, 호텔에서 TV 채널을 돌리다 시선이 멈췄고, 여자를 여자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제레미 아이언스의 깊은 눈을 보게 됐다.
‘영혼의 집’은 이사벨 아옌데의 책 『영혼의 집』을 영화화 했다. 주인공인 트루에바 가문의 살아가는 집을 뜻하며 에스테반의 부인 클라라가 불러낸 영혼으로 가득 찬 그리고 이후에는 클라라가 영혼이 돼 떠도는 ‘모퉁이 큰 집’을 뜻하는 의미를 지닌 제목의 영화다.
국내에서도 영화를 본 적이 있었지만 그 때는 그렇게 큰 감흥이 없이 역사물 정도로만 생각했다. 프랑스에서 두 번째 보게 된 ‘영혼의 집’은 전혀 다른 영화처럼 느껴졌고 큰 충격을 받았다. 에스테반의 부인 클라라가 향수를 사용하거나 온기 있는 음식을 먹는 모습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클라라의 묵언의 모습에서 자신을 버린, 한국의 여느 엄마의 모습을 봤다.
‘영혼의 집’은 주인공인 에스테반(Esteban Trueba: 제레미 아이언스 분)과 결혼한 클라라는 여성보다는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자 에스테반이 사랑에 대한 외로움으로 외도를 일삼는다. 아내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에스테반은 딸 블랑카(Blanca: 위노나 라이더 분)가 인디언 십장의 아들인 페드로(Pedro: 안토니오 반데라스 분)와 사랑에 빠지자, 사회주의자인 페드로를 없애버리려 하자 견디다 못한 부인 클라라는 딸 브랑카를 데리고 에스테반 곁을 떠나며 다시 그에 대한 침묵의 맹세를 한다. 브랑카는 페드로와의 사이에서 알바(Alba: 사샤 하노 분)라는 딸을 낳고, 혼자 키우면서 두 모녀는 늙고 외로워진 에스테반을 용서하고 다시 가족으로살게 된다. 이 후 에스테반은, 선거에서 여당인 보수당이 야당에게 져 정권이 교체되고 사랑한 아내 클라라마저 죽고 말자 더 한층 실의에 빠진다. 에스테반은 딸 앞에서 그동안의 모든 죄를 뉘우치며, 다시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와 생을 마감해 클라라 곁으로 돌아간다.
사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족이 함께하는 식사장면이 없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사랑했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았던 이들을 보면서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 함께 커피를 마신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알게 했다.
그녀의 부친은 이 영화에서의 에스테반과 비슷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아들 둘을 가진 이혼남이고 프랑스인이었는데, 한국적인 정서로는 부모님을 설득시킬 수 없었고 이후 독신으로 남았다고 말했다. 이 남자와의 사랑을 고수하기 위해 10여 년을 부모님을 설득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모님과도 소원해져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한다거나 명절에 가족과 만나는 일은 없다고 한다. 특정일이 되면 프랑스를 찾아 프랑스 여자처럼 프랑스식 사랑을 한다. 현 직장을 버리고 어쩜 본인 스스로가 이 사랑을 유지하기에 자신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 이곳에 남을까요? 매일 아침 사랑하는 사람과 커피를 마시고, 주말이면 와인과 치즈로 사랑을 나누고, 나이가 들어도 언제나 컬러풀한 옷을 입은 프랑스의 부부처럼 손잡고 산책하면 좋겠어요.”
그녀는 시린 목소리로 내게 말했고, 나는 와인만 들이켰다.


며칠 낮밤에 걸쳐 프랑스 여자들을 훔쳐봤다. 까르푸에서도, 지하철 안에서도, 카페에서도. 카페에서 만난 중년의 연인은 꿀 같은 진한 농도의 키스를 하고 와인과 스테이크를 주문해서 먹는 모습에서 나이가 들어도 이토록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에 감탄하고 부러웠다.
비가 내려 축축한 루브르 박물관 앞 카페의 사람들은 왜 모두가 연인 같아 보일까? 7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진하지 않는 향수와 세련된 액세서리, 늘씬한 다리에 어울리는 코발트색 바지차림으로 연인 같은 그녀의 남자와 함께 브런치를 먹고 있었다. 따뜻한 커피의 온기보다 더 따뜻한 향기가 났다. 코발트색 바지 그녀는 여자였다. 코발트색 바지 그녀에게서 영화 속 클라라가 자꾸 오버랩 됐다. 음식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영혼의 집’의 아름다운 클라라는 한 번도 여자였던 적이 있었을까?
프랑스를 떠나오기 전, 나는 면세점에서 프랑스 여자를 닮은 아이리스 향수와 오렌지 색 립스틱을 사고 있는 동안 이별의 포옹을 하고 돌아온 그녀는 내게 말했다.
“우리 한국에 가면 와인 한잔해요.”
샤또 데스클랑(Chateau d’Esclans)과 프랑슈 꽁떼산 L’ortdrlan 치즈로….

<2016년 3월 게재>




김성옥
동원대학교 호텔조리과 교수

식품기술사. 조리기능장. 영양사 등 식품, 조리에 관련한 자격증 국내 최다 보유자로 현재 외식경영학회 부회장, 한국관광음식협회 부회장, 조리학회 이사, 한식세계화 프로젝트 및 해외 한국홍보관책임연구원, 농림축산식품부, 문화관광부, 관광공사, 노동부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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