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쁘게 보낸 2020년도 끝나가고 있다. 국내 호텔산업의 성장과정을 돌아보면 순탄한 적은 없었지만 올해처럼 힘든 한 해도 없었던 것 같다. 수십 년의 호텔 역사의 궤를 같이 해온 호텔들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과거의 영광도 한 순간인 것 같은 허무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호텔은 평생의 직장이자 삶이었고, 호텔리어는 꿈의 직업으로 부러움의 시선을 가득 받던 이들이었다. 올해는 코로나19의 너무 강력한 펀치를 맞아 잠시 잊고 있었지만 영광이 가득했던 호텔들. 그때 그 시절을 함께 했던 호텔리어들을 만나 아득하지만 빛났던 이야기를 들어봤다.
Prologue
사회 초년병으로 워커힐에 입사했을 때만 하더라도 평생을 호텔에서 일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었던 직업을 선택해 일을 즐기며 소망한 바를 성취했다고 할 수 있으니 호텔리어 생활은 필자에겐 큰 행운이며 축복이었다. 평사원으로 호텔에 입사해 특급호텔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했으며, 뒤늦게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대학교수까지 지냈으니 스스로도 참 행복한 인생을 보냈다고 생각한다.
호텔업은 평화의 산업이며 세계 각국의 남녀노소와 각종 직업인 모두가 이용하는 장소다. 단순히 숙박과 식사 제공에서 출발한 호텔 산업은 현대에 접어들면서 사회적 문화적 역할이 부각돼 휴식, 집회, 문화 서비스, 비즈니스 서비스, 스포츠레저. 건강 기능 등을 갖춘 중요한 장소가 되고 있다. 이런 호텔업에 평생을 근무했으며 미래의 호텔경영자가 될 후배들을 가르쳤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고 있다.
- 故오문환 박사 「영원한 호텔리어」 中
한국 호텔업 성장의 주역
워커힐 사단, 그리고 인디안클럽
한국의 호텔산업은 1961년 8월 관광사업진흥법이 제정, 국가가 관광산업 발전에 많은 관심을 쏟으면서부터 발전의 계기가 마련됐다. 관광사업진흥법 제정과 동시에 당시 시설이 우수한 호텔을 관광호텔로 선정하고 물심양면으로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62년에는 국제관광공사(현재의 한국관광공사)가 설립되면서 경성철도호텔과 반도호텔의 경영권을 인수했고, 당시 우리나라 호텔산업에 있어 최고의 현대적 건물로 명성을 떨친 워커힐호텔이 개관하며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그중 워커힐은 정부의 주도 아래 주한 미군들이 우리나라에서 휴식 및 휴양할 곳이 없어 휴가철만 되면 일본이나 홍콩으로 넘어가는 것을 국내로 유치하기 위해 시설은 물론 전문 인력 양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동양 최대 규모를 계획했던 터라 간부급 사원이 많이 필요했으나 적임자가 적은지라 하우스 매니저나 캡틴급은 추천에 의해 주로 반도와 조선호텔 출신과 미8군(한국에 주둔하는 주한 미군의 지상군) 경력자들로 채워졌고, 이외에도 상당수의 신입사원을 선발해 양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학졸업자와 전문대, 고교졸업자 등이 20~3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고, 중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학생들이 정부 정책에 의해 특별 선발됐다.
이때 정부 정책에 의해 선발된 중학생들은 서울과 부산을 제외한 전국 중학교 졸업생 중 장남이 아닌 차남 이하로 학교 성적이 전교 5위 이내에 드는데 가정 형편상 고등학교 진학이 사람들 위주였다. 이들은 직원들 사이에서 나이도 어렸을 뿐더러 시골티를 벗지 못한 모습이 우스워 보여 선배들로부터 ‘인디안’으로 불렸는데, 이들은 처음에는 ‘인디안’이라는 이름을 달갑지 않게 여겼으나 후에 이 이름에 오히려 긍지와 애착심을 느껴 ‘인디안클럽’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아직까지도 친목을 이어오고 있다.
-「영원한 호텔리어」中
인디안클럽 맴버들은 당시 시대에 적합한 인재들로, 워커힐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인디안클럽은 워커힐 이후 굵직한 대형 호텔들이 들어설 때마다 수십 명씩 흩어져 나가기도 했고, 현업은 물론 경주호텔학교나 경희호텔경영전문대학의 교수로도 활동했다. 그만큼 워커힐 초창기 멤버들은 한국 관광산업의 발전에 상당한 몫을 담당했으며 주춧돌이 됐다고 할 수 있다.
선망의 대상이었던 호텔리어들
“1977년에 처음 호텔에 몸담았을 시절에는 호텔, 그리고 호텔리어라는 직업도 대중에 멀게 느껴지던 때다. 아무래도 호텔을 이용하는 고객은 특정 클래스로 한정돼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호텔 건물의 위용도 주위 건물들과 비교했을 때 넘쳐났기 때문에 호텔에서 근무하는 것 자체가 특별했다. 호텔에 방문하는 이들 중 VIP가 아닌 이들이 없어 차 번호를 350개까지 외우던 시절이 있었다.” 1977년 조선호텔의 도어맨에서 현재까지 콘래드 서울의 도어맨으로 44년째 경력을 쌓아온 권문현 지배인은 회상했다.
한국호텔전문경영인협회 엄세포 회장(이하 엄 회장)은 “한 번은 동네 친구들이 일하는 곳을 구경와보겠다며 호텔에 왔었는데 로비에서 신발을 벗어야 하는지 물어보더라(웃음). 이렇게 깨끗한 바닥에 어떻게 신발을 신고 다닐 수 있는지 물어보던 친구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때는 호텔에서 담배도 피울 때라 라운지 테이블 위에 호텔 성냥이 놓여 있었는데 그 성냥이 친구들에게는 한동안 자랑거리였다. 결혼식이나 각종 잔치에 가면 꼭 ‘호텔에서 일하는 친구’라며 주위 다른 친구들에게 불려 다녔을 정도”라고 전했다.
1963년 4월 8일, 워커힐 오픈 당시 미국 재즈계의 전설인 루이 암스트롱까지 한국에 와 오픈을 축하할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호텔은 우리나라에서 신문물을 가장 빨리 경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실제로 1970년대만 해도 양식 보급이 안됐던 터라 호텔에서 외교관, 정부부처의 외국 파견 직원, 외국인 상사의 부인들을 모아 양식 테이블 매너를 교육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최상의 근무조건 뿐 아니라 서비스차지, 즉 팁이 있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조금만 노력하면 기본급보다 훨씬 많은 보너스를 챙겨가기 십상이었다. 실제로 도어맨 1년이면 서비스차지만으로도 차를 바꿀 수 있다 이야기 할 정도였다고. 이 사무총장은 “당시 서비스차지까지 더했을 때 호텔리어의 월급이 공무원이나 교사 월급보다 많았었다. 이에 지인 중에 중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호텔로 이직한 이도 있었다.”고 이야기하며 “그랬기 때문에 이직할 때 호텔리어들의 가장 큰 고려 요소가 관광객들의 접근성이 우수한 곳이었다. 호텔에서 교육받은 스탠다드에 본인만의 서비스를 가미하는 만큼 열심히 한 데 대한 보상이 분명했다. 호텔리어로서 자부심이 없을 수가 없었던 시기”라고 전했다.



1980년도 한 해가 다 저물어갈 때 외무부 의전실로부터 급격한 연락을 받았다. 마반둘라 스와질랜드 수상이 정부의 대 아프리카 외교의 일환으로 우리나라를 국빈 방문하는데 1981년 1월 4일 1박 2일 일정으로 경주관광을 하고 코오롱호텔에 숙박할 계획이라는 것이다. (중략)그런데 밤 9시경에 수상이 급하게 총지배인을 찾는 전갈이 왔다. 방에 들어가니 수상과 부인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다른 가방에 잠옷을 두고 왔는데 여성용 잠옷을 구할 수 없겠느냐?”고 부탁을 해왔다. 빠른 시간 안에 잠옷을 구해오겠다고 대답했으나 수상부인의 체구가 어찌나 큰지 엑스트라라지 사이즈도 작을 정도여서 그런 잠옷이 있을까 난감했다. 퇴근하는 직원을 불러 여성용 잠옷 중에 제일 큰 사이즈로 구입해오라고 했다.어렵게 준비한 잠옷을 수상부인에게 전달해주자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잠옷 입은 외국의 수상과 같이 기념촬영을 하게 되는 상상도 못할 일이 일어났다. 또한 수상은 원예 전문가답게 우리가 준비해놓은 소철나무에 관심을 보이며 작은 것 중 하나를 구입하길 원해서 다음날 포장해 선물했는데 지금도 그 소철나무는 스와질랜드 왕궁 속에서 잘 자라고 있을 것이다.-「영원한 호텔리어」中
Epilogue지금은 없어졌지만 전문직업인으로서 긍지를 심어준 ‘영원한 호텔맨’ 상도 있었다. 영원한 호텔맨 상은 한국관광호텔지배인협회에서 주는 상으로 협회원인 호텔 지배인들이 직접 수여하는 상이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영광의 주인공이 「영원한 호텔리어」의 저자이자 코오롱호텔사장이었던 故故오문환 박사다. 故故오문환 박사는 영원한 호텔맨 수상 소감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그동안 정부로부터 여러 차례 표창을 받았지만 영원한 호텔맨 상을 받는 소감은 유난히 다르게 느껴지고 감격스러웠다. 같은 동료인 호텔맨들이 주는 상이라 기쁨이 더욱 넘쳤고 전문 직업인으로서 새로운 자부심과 긍지가 생겼다. 그동안 철탑산업훈장 등 정부가 수여하는 상은 개인적으로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영원한 호텔맨 상을 수상한 것은 결코 부끄럽지 않았다. 후배들에게 귀감은 물론 계속해서 더 정진해 달라는 뜻으로 알고 그 후로도 나는 영원한 호텔맨답게 떳떳한 인생을 살아왔다고 감히 자부해본다.”고 말이다.지금은 현업에 없지만 호텔의 전성기를 함께 해왔던 이들은 힘든 때도 있었지만 누구보다 호텔에 진심이었고 계속해서 진심으로 호텔과 호텔리어들의 위상이 높아지기를 응원하고 있었다. 김 고문은 1981년 8월 18일, 그가 처음으로 호텔에 발을 들였던 때가 출생년도와 마찬가지로 느껴진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호텔에서 35년을 보냈으니 제2의 인생을 호텔에서 보낸 셈이다. 그 오랜 시간만큼 호텔들은 많은 흥망성쇠를 겪어왔고, 많은 이들이 그 시절을 함께 지내왔다. 언젠가 종식되고야 말 팬데믹. 코로나19의 위기도 곁에서 어려움을 함께 하고 있는 호텔리어들과 무사히 마무리 할 수 있기를, 그리고 잊고 있었던 그때 그 시절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