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
가까운 이웃이 가족보다 낫다는 말도 있지만, 윗집 사는 중국과 아랫집 일본 사이에서 거주중 인 한국의 삶은 때로는 층간 소음처럼 속수무책입니다. 노이로제에 시달리는 삶은 어쩌면 1000년도 넘게 지속돼 온 일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엊그제 내린 우박처럼 올리브 나무 위를 매섭고도 심술궂게 내리칩니다. 급락한 주가지수도 투자자의 마음을 불안하게 합니다. 안정감이 깨지면 불안과 분노라는 이웃이 이사와 떡을 돌리기 마련입니다. 어떤 지혜와 결단이 필요한 시기지만 잠잠히 이탈리아 하늘의 별을 바라봅니다. 답답함은 어느덧 가시고 내일의 태양이 뜨리라는 기대감이 생겨납니다. 장마와 함께 뜨거운 태양이 춤추는 여름의 한복판에 서있습니다.
Scene 1 #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생각을 하지만, 누구도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톨스토이의 명언이 떠오릅니다.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한 시기에는 비난을 쏟아내는 것이 상책이 아니라 변화가 필요한 순간인지도 모릅니다.
필자는 최근에 밀라노남자 Coffee Pro JJ란 유튜브 채널을 시작했습니다. 국내와 해외의 오랜 커피 경험을 바탕으로 유럽의 문화와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데요. 시작한지 얼마 안된 탓인지 소수의 구독자를 위해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본업이 있는데 병행하는 터라, 시간이 만만치가 않네요. 가끔 ‘내가 이런 걸 뭐 하러 하고 있는 거지?’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생생한 소식을 공유하는 것은 누군가에겐 유익한 일이 될 것이란 마음으로 시작을 하게 됐습니다. ‘변화에서 가장 힘든 것은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갖고 있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란 케인스의 말처럼 말이죠.
Scene 2 #
오늘 저는 기존 이탈리아 커피숍의 틀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밀고, 자신을 변화시켜 온 밀라노의 커피숍 Bar Affori의 리뉴얼 현장을 찾았습니다.
밀라노 중앙역에서 노란색 3호선 라인으로 12분 정도에 위치한 이 공간은 ‘스페셜티 커피’란 타이틀과 함께 재탄생했습니다.
이 지역은 시내에 비해서는 조용한 편입니다. 밀라노의 산업화에 따라 외부의 유입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주민들은 점점 시내의 외곽에 자리 잡은 Affori로 이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인근에서 농사를 짓던 이들이 대다수였다면, 현재는 외곽지역과 도심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하게 됐습니다.
이곳을 찾는 고객의 대다수는 로컬에 거주하는 이웃입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유동인구가 많은 핫한 지역에서 장사를 하는 것이 유리하게 작용하지만, 국민의 대다수가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이탈리아는 비록 주택가에 위치한 장소일지라도 로컬인의 사랑을 받는 곳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바(Bar)’를 찾기 때문입니다.
앤티크한 외관의 건물 팔라쪼(Palazzo)의 1층에 위치한 이 바는 1900년 처음 문을 열었습니다. 잠시 한국의 커피로 돌아와 생각해 봅니다. 한국이 최초로 커피를 마신 사람은 고종이란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셨을 텐데요. 구한 말인 1896년 아관파천으로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관에 머물 당시, 초대 러시아 공사였던 웨베르의 처형인 ‘손탁’으로부터 커피를 접했다는 설이 유명하죠. 하지만 1884년부터 3년간 어의로 지낸 알렌은 당시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알 수는 없지만 훗날 1902년에 생겨난 손탁 호텔(Sontag Hotel)안에 정동구락부가 우리나라 최초의 다방이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종황제의 커피 사랑 또한 말이죠.
Scene 3 #
Bar Affori는 이보다 2년 앞서 문을 연 밀라노의 커피숍입니다. 현재는 동네 한 골목의 카페이지만, 한국의 커피 역사에 비교해서 생각해보면 오랜 전통을 자랑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흔히, 전통이란 단어를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과거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흑백 텔레비전을 생산하던 회사가 세계 최고의 TV와 반도체 제조사로 발전하는 것처럼, 이곳에서의 전통이란 과거의 명맥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것으로 발전하는 것을 뜻하죠.
밀라노에는 전통이 아닌 말 그대로 올드한, 그리고 진부한 바가 많이 있습니다. Bar Affori 역시 한때 이처럼 진부해졌던 순간이 있었다고 하네요. 경제적으로 오랜 침체가 찾아온 이탈리아의 현지 상황과 맞물리면서 활기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맏형인 살바토레와 아우인 알레스는 오랫동안 지역 주민의 사랑방 역할을 해온 이곳을 업그레이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맛있고 품질 좋은 커피를 같은 가격에 판매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물론 이탈리아의 대부분의 바에서는 1유로면 괜찮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환경이 오랫동안 지속됐습니다. 이것은 고객에게는 적은 비용으로도 하루에도 수차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거죠. 그러나 경기는 침체되고 가격은 오르지 않자 커피를 판매하는 상인들은 사용하는 제품의 품질을 낮추는 방식으로 가격을 유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레 대부분 바의 품질저하로 귀결됐습니다.
두 형제는 오로지 맛있는 커피 한 잔에 대한 열정으로 변화를 시도했죠. 물론 고객들이 1유로에 마시던 커피의 가격 상승에 대한 저항감, 기존에 마시던 커피에 익숙해져서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감에 걱정도 있었다고 하네요.
Scene 4 #
필자와 오랫동안 알고지낸 이들은 커피에 대한 전문성의 깊이가 차츰 더해지면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향한 열망을 키워나갔고, 마침내 두 형제는 모든 상황을 뚫고 새로운 여정을 향한 돛을 올리게 됩니다. 이탈리아의 스페셜티 커피숍을 찾아다니며 견문을 넓히고 마음속에 그리던 공간을 현실로 옮겨왔습니다.
약 3주 동안 기존의 매장은 문을 닫았습니다. 내부의 인테리어는 기존의 형태를 일부분 유지하면서도, 내추럴하면서 모던한 오픈 바의 형태로 거듭났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는 트레이닝에 집중했습니다. 최고의 커피 바로 거듭나겠다는 이들의 생각은 기존의 사용하던 커피를 전면적으로 바꾸는 것에서부터 시작했죠. 그러기 위해 이탈리아 4회 연속 로스팅 챔피언이자, 2017 로스팅 세계 챔피언인 루벤스 가르델리 커피를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페셜티 커피란 단어조차 생소한 시기인 1990년대부터 이미 이탈리아에서 CSC 스페셜티 커피 협회를 조직해 견인해 온 CSC의 회장이 직접 운영하는 130년 전통의 커피로스터 삐안따 지오니 델 까페(Le Piantagioni Del Caffe)를 사용합니다. 아주 작은 랩에서 커피를 볶으며 오로지 소량의 품질에만 집중하는 다비드의 커피 Cagliero까지 이들이 사용하는 추출도구와 커피의 개성에 따라서 편집숍의 형태로 운영이 되고 있습니다.
2가지 종류의 블랜딩 커피와 2가지 종류의 싱글 오리진 스페셜티 커피 , 디카페인은 물론 5가지 에스프레소를 선택적으로 마실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Dallacorte 사의 하이앤드 머신인 ‘XT’와 세계 최초로 물의 흐름을 드라이빙할 수 있는 원 그룹 머신 ‘MINA’를 포진 시켰습니다. 이들의 과감한 투자는 오로지 품질 혁신을 최고의 품질이란 목표 때문입니다.
게다가 두오모(Duomo)처럼 관광객이 찾는 지역에 위치하지 않았는데도, 외국인 고객을 위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아이스 카페 라테, 플랫화이트와 같은 메뉴를 준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V60, Chemex, Aeropresso, 콜드브루와 같은 다양한 브루잉 도구를 사용해 각 원산지의 커피가 지닌 개성 넘치는 맛과 향을 연출하기 위해 세팅하는 섬세함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Scene 5 #
필자는 오픈 첫날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발 디딜 틈조차 없는 고객들로 이곳은 북적이고 있습니다. 기존의 우려는 온데간데없고 많은 이들의 폭발적인 환호와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사실 전 세계 패션의 중심이면서, 이탈리아 상업의 최중심인 밀라노의 사람들이 유독 커피에 대해서만 트렌디 하지 않은 이유는, 이미 충분한 만족감이 있었던 부분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가치를 진정성 있게 제안할 수 있으면 그것은 성공적인 피드백으로 되돌아옵니다.
품질 높은 에스프레소를 1.1 유로, 싱글 오리진 스페셜티 커피 한 잔을 1.5유로, 무엇보다 커머셜 커피의 세 배가 넘는 가격의 최정상급 로스터의 손에서 태어난 커피 한 잔을 3유로에 마실 수 있는 이곳은 가히 커피 천국이란 표현을 쓰기에 적절해 보입니다.
그리고 오로지 커피만을 판매하는 것이 아닙니다. 간단한 식사도 제공하지만 이마저도 품질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점심으로 레드와인 한 잔과 함께 즉석에서 잘려 나오는 프로슈토와 단맛의 정점에 올라와있는 멜론 그리고 슈퍼에서 찾아보기 힘든 최상급 모짜렐라를 나폴리 지역에서 공수해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후 5시가 넘어가면 아페리티보를 즐기기 위해서 몰려오는 손님들을 위해서 넓은 바의 한 쪽 면은 칵테일 스테이션으로 할애했습니다.
“궁중에서 오랜 시간 대기하는 동안 궁중의 시종들은 거절하는 데도 불구하고 잎담배와 샴페인, 사탕과 과자를 끝까지 후하게 권했다. (중략) 후에 그들은 자기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그 품목에 홍차와 커피를 추가했다.”
- H.N. Allen, [Things Korean], (1908) p.195
Epilogue #
‘이탈리아에 가서 길을 찾아야 한다면 바리스타에게 물어보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지역민들 안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죠. 이들의 리뉴얼 작업은 이 공간을 자주 찾던 단골들이 함께 참여했습니다. 전기, 도색, 가구, 목공의 모든 파트를 담당하는 이들이 지역민이고 고객이였던 것입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가깝고도 먼 이웃 이야기로 시작해, 진짜 이웃의 이야기로 끝맺습니다. 두 형제의 항해가 어떻게 진행될지 매우 궁금합니다. 적어도 새로운 이들의 항해는 현재 순항중입니다. 미칠 것만 같은 무더위 속 아이스커피도 좋지만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넣고 잘 섞어주고, 얼음을 하나 넣고 레몬껍질로 향을 입힌 에스프레소 로마노를 시원하게 한 잔 어떠실는지요?
판매하는 곳이 없다는 게 함정이겠지만 말입니다.
돈키호테의 한 대목과 함께 인사를 드립니다.
“누가 미친 거요? 장차 이룩할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하는 내가 미친 거요. 아니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만 보는 사람이 미친 거요?”
전용(Jonny Jeon)
Dalla Corte S.R.L
한국에서 오랫동안 바리스타였던 전용 Pro는 각종 대회 수상, 유명 커피 프랜차이즈 론칭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다가 이태리로 건너가 세계 유명 커피 머신 회사인 Dalla Corte S.R.L에서 Pro로 일하고 있으며 회사의 주요 프로젝트로 육성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