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500만 명 대피 소동’이란 타이틀을 인터넷 검색엔진을 켜자마자 접하고서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어려웠습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처럼 북한의 행보가 유럽에서는 연일 톱뉴스로 다뤄지면서 외국에서 살고 있는 필자로서는 뉴스의 타이틀만으로도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오늘이 분명합니다.
500만 명 대피령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카테고리 5등급 최고 위력의 허리케인 ‘어마’였습니다. 때마침 밀라노에도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자연의 무서움을 느끼게 해줄 정도로 퍼붓다가도 지금은 처연하게 느껴질 만큼 밤의 정적을 가르고 있습니다.
Scene 1#
최근 준비하고 있던 프로젝트 때문에 예민해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을의 요동치는 날씨가 뭇 사내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주말의 직장인을 위로해 보려는 심산으로 출발한 영화 한편은 가슴에도 촉촉한 단비를 뿌리고 지나갑니다. 커피 애호가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제목의 영화를 마주하는 것은 설레는 일임에 분명합니다.
영화 ‘세상의 끝에서 커피 한 잔’.
영화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유년시절 바닷가, 어부인 아버지가 들려주는 기타선율과 그 품에 안겨서 마주하는 바다의 파도 소리, 기억해 내기조차 힘든 4살 아이의 눈에 투영된 아름다웠던 순간 그리고 부모님의 이혼과 함께 찾아온 30년의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
8년 전 생사를 알 수 없는 실종의 상태란 사실을 알게 된 주인공은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바닷가의 오두막을 개조해 커피숍을 열면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아버지를 기다립니다. 다 쓰러져가는 판자들이 하나씩 수리돼 가는 과정은 어떤 희망을 묘사해 주는 듯 보입니다. 첨단이란 이름으로 조금 더 새롭지 않으면 뒤쳐져 버리는 오늘 날을 살고 있으면서도 주인공의 카페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낡은 기타, 오래된 라디오, 이웃집 초등학생 아이가 증기기차라고 표현한 커피를 볶는 로스터, 여주인공의 푸른색 앞치마. 이 모든 영상의 색채에는 자연이란 소재가 아름답게 녹아들었습니다.
여주인공은 이웃집 초등학생 아이에게 커피를 가르쳐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커피는 주로 남미나 아프리카에서 온단다. 이곳은 손님에게 가기 위해 잠시 머무르는 곳이야. 그러니 우리는 손님과 잘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줘야해. 그러려면 너도 나도 일을 잘 해내야겠지.”
비현실적이지만 극적인 대사들이 나오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커피를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사람인지라 다소 유치해 보이는 장면들도 주인공에게 빙의된 양 감동을 받게 됩니다. 대만인 장수경 감독의 작품이지만 배경과 배우들은 모두 일본인입니다. 작품 대사 중 “탄자니아 커피는 아프리카에서 온 생두지만 그것이 일본에서 볶여져 새로운 맛으로 재탄생되는 거야.”처럼 말이죠. 영화를 보는 내내 속으로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에 이 감독님을 초대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Scene 2#
대단한 것은 아닐 수 있지만 지난 수개월 동안 ‘Road to coffee Italia’란 프로젝트를 준비해 왔습니다.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커피업계 종사자인 한국인으로 무언가 가치있는 것을 나눌 수 없을까 늘 고민하게 됐습니다. 구글링으로는 찾을 수 없는 무엇, 관광객들의 족보도 아닌 현지인 그리고 전문인의 입장에서의 커피 향기가 가득한 여행을 연출하기 원했습니다.
내가 경험했던 잊을 수 없는 아름다움 가운데 하나를 나눌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한 끝에 15년 넘게 알고지낸 마스터들에게 재능기부를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산지미냐노의 친구에게 간곡히 부탁해 친구의 집 정원에서 그릴파티도 하기로 했습니다. 토스카나의 비스테까(Toscana Bistecca)를 끼안띠의 절경을 바라보며 즐기는 것은 분명 삶의 특별한 기억이 될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영화 속 여주인공처럼 감동을 줄 수 있는 바리스타 한 명을 만났습니다. 밀라노에서는 고속열차로 1시간 거리지만 관광객 사이에서는 지명의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사보이 왕가의 도시 ‘토리노’. 전 세계의 축구팬을 열광시키는 유벤투스가 있다는 정도로 알려진 이곳은 실제로는 라바짜(Lavazza), 코스타도로(Costad’oro) 등 세계적인 커피 회사의 본사가 있는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토리노를 방문한 사람들이 오로지 커피숍 한 곳을 방문해야 한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이곳을 소개할 것입니다. 바로 오르소 라보라토리오(ORSO Laboratorio).
Scene 3#
오르소는 이탈리아어로 ‘곰’을 뜻합니다. 라보라토리오는 말그대로 연구소Lab를 의미하구요, 사실 이곳은 카페지 연구소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곳의 콘셉트가 전통 이탈리안 Bar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실험적인 커피숍의 성향을 띠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이게 됐습니다. 이 숍의 주인, 줄리오 판챠티치(Giulio Panciatici)는 대학교에서 호텔경영을 전공했습니다. 호텔리어의 삶을 걸어온 그는 이런 백그라운드 때문인지 처음 보는 고객을 대하는 접객의 태도나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매우 능숙합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고객의 입장으로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브룬디(Brundi) 싱글오리진 에스프레소를 주문하고, 이 커피만의 특별한 향과 맛을 음미한 이후 속으로 ‘아 이곳은 취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야.’란 생각을 되뇌면서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려는 찰나, 줄리오가 내게 물었습니다. “이 카페에 처음 방문했나요? 그렇다면 오늘은 내가 계산할게요, 다음에 또 한 번 들러주세요.”
이것은 영화 ‘세상의 끝에서의 커피 한 잔’의 여주인공이 내뱉은 대사와 거의 동일합니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어리둥절했습니다. 줄리오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음에 꼭 들러달라며 수줍은 미소를 보냈습니다. “나는 사실 밀라노에 살고 있어. 이곳을 방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야.” 라고 계산을 하려고 했지만 줄리오는 영업 전략이 아닌 진심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었습니다.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유는 단순한 커피 한 잔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Scene 4#
줄리오는 사실 2004년부터 커피와 디저트, 음식을 판매하는 카페테리아를 운영했다고 합니다. 2014년 6월 7일 문을 닫기까지 한 매장을 그렇게 오랫동안 지켜온 그에게도 나름의 사연이 있었는데요, 카페테리아를 오픈할 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커피숍들은 체인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소위 말하는 커피중개상이 제공하는 인테리어와 디자인, 물품, 메뉴 등의 콘셉트를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많은 이탈리아의 커피숍을 후퇴시키는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대다수의 커피숍은 이러한 중개상이 무료 렌탈로 제공하는 머신들을 사용합니다. 대신 커피 가격을 높게 지불하는 ‘조삼모사’, ‘휴대폰 할부’와 같은 꼼수가 작동을 하는 셈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시스템이 정착돼 왔기에 1유로에 커피를 판매하는 커피숍은 품질 높은 커피 한 잔에 대한 열정은 차츰 상실하게 됐습니다.
누구나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하게 되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는 법. 줄리오 역시 10년을 넘게 자신의 매장에 열정을 쏟아왔더니 텅 빈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의 계획을 진행하기 위해서 오랜 기간 준비를 하고 중간에 포기를 하고 신중함과 불안함 사이를 오가지만 줄리오는 달랐습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열정을 토해낼 수 있는 무언가가 절실했다고 합니다. 그는 숨쉬기 위해 무작정 자신의 커피숍을 정리했습니다.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숨통 좀 트자’란 심정으로 스스로에게 멈추라 지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떠났던 여행.
새로운 영감이 그의 심장을 두드렸고 작지만 최고의 품질을 만들어내는 숍을 오픈하고 싶다는 충동을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줄리오의 장점, 그의 생각은 곧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무언가를 손에 쥐려면 손을 맨손으로 만들어야 다시 쥘 수 있다고 생각해.” 편하게 내뱉은 그의 말에는 용기 있게 도전하고 그것을 성취해 본 사람만의 진지함이 묻어있었습니다.
열정은 동기에서 과정으로, 그리고 결실을 만들어냅니다. 2016년 이탈리아 BAR AWARDS에서 줄리오는 ‘최고의 바리스타’란 영예를 얻게 됩니다. “많이 행복했어. 왜냐하면 이 결과는 단순히 전문가의 평가 점수로 매겨진 것이 아니라, 나와 ORSO 매장을 아껴주는 고객 한 분 한 분이 직접 투표하고 선정해 준 것이기 때문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기쁨의 미소와 함께 고객을 향한 감사가 아직도 그의 가슴에 여운을 남겼나 봅니다. 그의 눈망울은 이내 촉촉해졌습니다.
줄리오의 멘트에 진정성이 담겨있는 이유는 주변을 둘러봐도 쉽게 알아챌 수 있습니다. ORSO를 찾는 단골 고객을 위한 배려로 개인 전용 잔이 준비돼 있다. 선반에는 고객의 이름이 적혀있었고 그것은 단지 하나의 소품이 아니라 실제로 고객들이 사용하는 잔입니다. 100개가 훨씬 넘는 잔들에 새겨진 고객의 이름. 자신만의 특별한 잔이 매장에 준비돼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객으로 하여금 강한 유대감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Scene 5#
앞에서 언급했듯이 ORSO는 이탈리아어로 ‘곰’이란 뜻입니다. 이름에는 나름의 이유와 철학이 담겨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멋있는 남자는 ‘커피처럼 뜨겁고, 강하고, 맛있는 커피와 같아야한다.’ 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커피를 상상했을 때 곰의 강렬한 이미지가 떠올랐다고 합니다. 또 숍을 오픈 할 수 있었던 큰 원동력 가운데 하나가 바로 토리노에서도 대를 잇는 작지만 특별함을 추구하는 로스터와의 오랜 유대감 덕분이었습니다. 줄리오는 세계 여행을 마치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나누고 로스터와 함께 새로운 프로젝트에 도전하게 됩니다. 서로의 장점이 블랜딩됐고 새로운 콘셉트는 현실이 됩니다.
통로에 위치한 시계, 전시된 티셔츠, 잔과 커피에도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디자인. 로고의 디자인에는 예술적인 향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데요, 알고 보니 지역 내 유명한 타투이스트가 도움을 줬다고 합니다. 예술가의 필이 느껴지는 느낌이랄까요?
이 숍에 들어서면 10대의 그라인더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7가지의 싱글오리진 커피를 사용하고 3가지 종류의 블랜드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1유로의 커피가 일상적인 이탈리아에서 어쩌면, 이들이 이단아인지도 모릅니다.
10가지 다른 맛의 에스프레소를 마실 수 있는 커피숍.
처음에는 이 곳 역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남들 보다 비싸게 판매되는 커피에 대한 저항감이겠지요. 하지만 줄리오의 진심은 통했습니다. 고객에게 커피에 관한 전문지식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기꺼이 잔을 코끝으로 가져가 스티어링을 해서 향을 맡을 수 있게 합니다. 왜 이 커피가 특별한지, 열정을나누면 사람들은 그의 열정에 매료됩니다. 점차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이 숍은 외국인들의 발길마저 사로잡는 토리노의 자존심이 됐습니다.
이제 30% 정도의 고객은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스페셜티 싱글오리진을 마신다고 합니다. 초창기에는상당한 양의 커피를 소모해야 했다고 하는데, 이는 다양성 때문에 재고 관리의 어려움을 겪은 것이죠. 줄리오는 커피숍 운영에 있어 “섬세함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섬세하면 기술, 서비스, 위생에 대한 모든 부분을 예민하게 느끼고 관리하며 발전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Epilogue #
토리노의 골목 한 곳은 ORSO와 함께 빛나고 있었는데요. 누구라도 우연히 토리노의 골목을 지나치다면, 그리고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게 된다면 영화 속 여주인공처럼 “오늘은 제가 계산 할게요” 란 영화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될지도 모릅니다.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연료가 되기도 하는 커피, 오늘은 현실의 주인공 줄리오 그리고 영화 속 여주인공 미사키를 떠올리며 용혜원 시인의 글과 함께 마무리하려 합니다.
커피에는 따뜻한 인생이 있다. 떠돌이 나그네처럼
간판도 제대로 보지 않고 들어간, 커피점에서
오랫동안 창밖을 바라보며
한 잔의 커피에 인생을 담아 마신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삶이 혀끝에서 녹을때까지
내 마음에 그리움이 가득 차오른다.
사랑하는 사람아
그래가 온다면
나 언제라도 기다리겠다… .
-용혜원
전용(Jonny Jeon)
Dalla Corte S.R.L
한국에서 오랫동안 바리스타였던 전용 Pro는 각종 대회 수상, 유명 커피 프랜차이즈 론칭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다가 이태리로 건너가 세계 유명 커피 머신 회사인 Dalla Corte S.R.L에서 Pro로 일하고 있으며 회사의 주요 프로젝트로 육성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