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용의 Coffee Break] 비체린의 본고장, 토리노(Torino)

2017.05.15 18:15:39


Prologue# 난기류가 피곤했던 여행자의 선잠을 깨웁니다. 넘실대는 파도에 순응하며 항해하는 배처럼 좌우로 일렁입니다. 스릴은 넘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함이 가득합니다. 헤밍웨이의 작품 <노인과 바다>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84일 동안 물고기를 잡지 못하고 바다 위를 떠다니는 노인, 그리고 배보다 큰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는 산티아고. 열정이 넘치는 장면이지만 두려움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집으로 가는 길은 노인의 그것처럼 숭고하지도, 열정적이지도 않습니다. 그저 긴 호흡으로 애써 긴장한 마음을 달래봅니다. 눈을 감고 있자니, 3주 동안의 한국 출장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지나갑니다.
WSBC(월드슈퍼바리스타 챔피언십)은, 제가 대한민국 대표로 선발되던 2005년에 비하면 수십 배나 상금이 올랐습니다. 스페셜티 커피란 이름은 더이상 낯설지 않습니다. 1999년 스타벅스 1호점 개점은 한국 내 커피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을 불러온 나비효과일지도 모릅니다. 이 표현은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노턴 로렌즈가 1972년 미국 과학부흥협회에서 실시한 강연의 제목인 ‘예측가능성 - 브라질에서 한 나비의 날갯짓이 텍사스에서 돌풍을 일으킬 수도 있는가? (Does the flap of a butterfly’s wings in Brazil set off a tornado in Texas?) 에서 유래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사소한 사건 하나도 나중에 커다란 효과가 있을 수 있다는 의미로 쓰이지만, 카오스 이론에서는 초기 조건의 민감한 의존성이 따른 미래결과의 예측불가능성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때문에 이는 시공간을 가로질러 하나의 원인이 다른 결과를 초래하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예측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Scene 1# 우연히 서적에서 만화책 <바리스타>를 5년 만에 발견했습니다. 맛있는 커피는 전문가에 의해 재탄생되지만 열정이 있고 소통할 수 있는 바리스타의 마음이 담긴 커피 한 잔에는 비견될 수 없습니다. 필자는 수년 전 무로나가 쿠미가 저술한 이 책을 꼭 한 번 읽어야 하는 교양서, 내지는 교육용으로 사용하고는 했습니다. 외국의 서적을 짜깁기 하거나, 기본적인 제조지식으로 일관하던 시기에 이태리에서 태어나 자란 일본인 주인공을 소재로 한 이 만화에는 바리스타가 지녀야 할 철학과 고객과의 소통을 최우선으로 하는 마음을 각각의 에피소드로 잘 담아내고 있었습니다. <신의 물방울>과 같은 종전의 히트를 하진 못했지만, 현재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제가 봐도 흠잡기 어려울 만큼 실증을 바탕으로 구성된 만화이기에 더욱 놀랍습니다. 오늘은 이 만화의 한 대목에 등장하는 ‘비체린’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Scene 2# <레미제라블>의 저자 빅토르 위고가 극찬한 음료, 비체린 토리노는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 주의 중심지로 13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국내 독자 분께는 다소 생소한 도시이지만, 토리노 동계 올림픽 이후 조금씩 인지되고 있는 한때 이탈리아의 수도였던 역사적인 도시입니다. 도시 동부는 언덕으로 피에몬테산 와인 산지로 유명하며, 북서부에는 알프스 산맥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이 지역은 근대 이탈리아의 발생지입니다. 1861년 사르데나 왕국의 주도하에 통일을 이뤘습니다. 토리노가 이탈리아의 왕국의 수도가 됐지만, 3년 뒤 피렌체로 수도가 옮겨지게 됩니다. 1899년에는 20세기 자동차 산업의 리더로 피아트 사가 등장하고 토리노의 공장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합니다. 전국 각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축구 팬들에게는 익숙한 유벤투스가 시합하는 전용 경기장이 있는데, 하루는 제노의 축구팀이 원정을 왔던 기억이 납니다. 버스에서 폭죽을 터뜨리며 토리노에 입성한 이들은 실제로는 축구에 대한 과한 열성 때문에 훌리건을 연상시켰습니다. 경기는 흥미진진하지만 승패에 따라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합니다. 경기장에도 난류가 형성됩니다, 그들의 열기가 만들어낸 것이죠.
밀라노에서 열차로 1시간 20분이면 토리노 중앙역에 도착합니다. 토리노의 거리풍경은 바로크 양식의 영향으로 매우 클래식합니다. 쇼핑몰이 위치한 시내는 아치 형태의 구조물이 길게 늘어선 통로들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도시를 직선으로 가로지르는 가로수 길은 계획도시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프랑스 거리로 불리는 대로가 형성돼 있는데, 도시국가 형태로 발전해온 토리노가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짐작케 해주는 대목입니다.
어느 지역에나 그곳만의 랜드 마크나 특산물 같은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토리노 도심 중앙에 167.5m로 높이 솟아있는 탑, 그리고 대표적인 특산물 헤이즐넛(개암열매)이 들어간 초콜릿인 잔두이 오또gianduiotto가 유명합니다. 과거 나폴레옹 통치 시대에 나폴레옹이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1806년 대륙봉쇄령을 내리면서 그 여파로 남아메리카로부터 코코아를 수입하는 것이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그 결과 코코아를 덜 사용하고 대신 다른 것을 넣어보면 어떻겠는가? 라는 생각에 1852년에 토리노의 초콜릿 제조업자 폴 카파렐paul caffarel과 미켈레 프로케트michele prochet가 헤이즐넛을 페이스트로 만들어서 카카오를 섞었고, 그때 만든 초콜릿이 바로 잔두이 오또가 됐다고 합니다. 토리노는 매년 3월 2일부터 11일까지 토리노 시내 한가운데 위치한 비토리오 광장 piazza vittori Veneto에서 토리노 초콜릿 페스티벌Torino chocolate festival을 엽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시연회, 워크숍, 케이크 강좌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의 복합 행사입니다. 뿐만 아니라 12유로에 구매할 수 있는 초콜릿 패스는 이틀 동안 토리노 내 초콜릿 상점 중 9개의 상점에서 시음할 수 있는 자유 쿠폰입니다.




Scene 3# 이 지역은 국내에서도 유명한 라바짜, 코스타도로 커피의 본사가 있는 곳으로 커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토리노 대부분의 카페에서는 비체린을 마실 수 있습니다. 저는 짧은 기간 동안 여러 잔의 비체린을 마셨는데, 늦은 오후 칵테일을 판매하는 bar에서 마신 비체린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것에는 알코올이 첨가돼 있었는데,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초콜릿 향은 휘발성 때문인지 매우 강렬하게 코끝을 타고 넘어왔습니다. 비체린은 이탈리아 피에몬테 주의 전통 음료입니다. 헤이즐넛을 넣은 잔두야 초콜릿을 녹인 후 에스프레소와 우유거품으로 층을 만들어 따뜻하게 마시는데, 이 전통은 17세기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초콜릿의 종류나 배합에 따라 비체린 맛이 달라집니다. 비체린은 ‘작은 잔’을 뜻하며, 2001년부터 피에몬테 주의 전통 특산물로 지정됐습니다. 작은 카페 안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그 옛날처럼 여전히 비체린을 마시고 있습니다. 이 도시에는 고급 초콜릿으로 유명한 바라티노barattino와 알 비체린 al bicerin이 유명합니다.


Scene 4# 1995년 모래시계란 드라마가 대한민국의 직장인들을 가정으로 빠르게 귀가시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 시절 저는 카페에서 파트타이머로 근무하고 있었는데요. 그 당시에는 나름 트렌디한 커피숍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절 ‘원두커피’란 문구는 소위 고급 커피숍의 슬로건이었습니다. 휴대폰이 없던 시기에는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삐삐가 통신수단의 기술의 결정체이자, 본인을 과시할 수 있는 하나의 아이템이었습니다. 누구의 진동이 더욱 오래, 강하게 가느냐를 가지고도 신경전을 펼칠 만큼, 지금 보면 아날로그한 시대를 살고 있었습니다. 진동이 울리면 각 테이블에 놓인 전화기를 사용해 상대방과 통화를 할 수 있습니다. 나름 최첨단의 시스템이 카페에도 도입된 셈이었죠. 카페는 그때나 지금이나 트렌드를 이끌어가는 젊음의 비상구입니다.
당시 ‘헤이즐넛 커피’란 단어가 성행했습니다. 그것은 백화점에서도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을 뿐만 아니라, 90년대 커피의 아이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불량한 생두에 에센스를 넣고 볶아 인위적으로 향을 입힌 커피가 귀족적인 자태를 뽐낸 셈입니다.




Epilogue# 일명 ‘해 질 녘’ 커피, 진짜 헤이즐넛의 본고장에 와있으니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합니다. 어쨌든 한국의 식음료 시장이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며 판매되는 스페셜티 커피들이 많아진 동시에 1000원대의 커피들도 늘어났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말할 수는 없지만, 100년 이상의 전통을 변함없이 이어오는 이들에게서 느끼는 것은 진실성입니다. 유행이란 단어 자체에는 얼마 후면 사라져버릴 것이란 역설적 의미가 담겨있어, 순간적으로 더욱 타오르고 멋져 보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밀란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호텔&레스토랑>도 26주년을 맞았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향 커피처럼 시대를 풍미하다가 사라지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비체린처럼 계승되는 것이 있습니다. <호텔&레스토랑>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비체린처럼 재료가 간직한 풍미와 역사성을 간직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가까운 커피숍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에 초콜릿 한 조각 넣어 드셔보세요. 쌉싸름한 커피 맛 뒤에 기분 좋은 달콤함이 기다리고 있음을 느끼실 겁니다. 힘들었지만 위로가 필요한 우리의 오늘처럼 말이죠.


전용(Jonny Jeon)
Dalla Corte S.R.L
한국에서 오랫동안 바리스타였던 전용 Pro는 각종 대회 수상, 유명 커피 프랜차이즈 론칭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다가 이태리로 건너가 세계 유명 커피 머신 회사인 Dalla Corte S.R.L에서 Pro로 일하고 있으며 회사의 주요 프로젝트로 육성되고 있다.  









45건의 관련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