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의 이중생활
어릴 땐 만화책, 비디오게임이 놀이였다. 즐기고 싶은 것을 골라, 마음대로 보고 플레이한다. 놀이란, 내가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재미있는 드라마, 영화에서는 놀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지 않는다.
성인이 된 지금 나의 놀이는 피아노다. 듣고 싶은 곡을 골라, 내 멋대로 해석하고 연주한다. 많은 연습이 필요하므로 어릴 때와 달리 경제력까지 갖춘 나는 아예 강남 어딘가 피아노 스튜디오를 차렸다.
왜 집에서 안 하냐고? 직업 특성상 연습은 밤늦게 해야 가능하다. 아무리 방음을 해도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를 내 식대로 타건하면 밑의 집이 괴롭다. 그래서 방음 처리된 방을 빌려, 야마하 C3를 가져다 놓고, 연습한다.
그런데 나에게 놀이인 피아노가 사실은 꽤 많은 품을 요구한다. 우선, 돈이 많이 든다. 피아노를 빌리는 것에서, 방 계약을 하는 것, 그리고 악보조차 헨레 원전판으로 분위기 좀 내야 하니 가볍지 않다. 레슨비는 또 어떤가. 선생님들 대부분이 나를 전공자론 안 보더라도 취미생으로 보지도 않는다(그래서 가격도 적정해야 한다).
체력도 마찬가지. 퇴근하면 너무 피곤하고, 법정에서 혈전을 벌이기라도 하는 날에는 진짜 지친다. 그래도 아르헤리치의 연주를 귀에 꽂고 스크리아빈 에튀드를 멋나게 치는 상상을 하며 연습실에 간다. 꾸역꾸역.
사막 속에 우물이 있다. 우물에 다다르기 힘들 듯, 피아노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나에겐 우물같다. 그래서 간다.
흔히들 ‘이중생활’ 하면 부정적 클리셰를 떠올린다. 잉꼬를 배신한 불륜이나, 선량한 자원봉사자의 성착취 같은.. 그런데 그 ‘정도’만 좀 비틀면, 피아노라는 놀이(취미라고 부르기는 싫다) 역시 내겐 충분히 이중생활이라 할 만하다.
첫째, 불륜과 같이 나 역시 은밀하게 연습하기를 즐기고, 둘째, 나를 보는 이들은 하나같이 내가 피아노 치는 것을 ‘이중적’이라 표현하기 때문이다. ‘쇠질’을 좋아하고 운동에 열광하는 내가 타건을 하는 모습이 매치가 되지 않기 때문일까.
이중성은 호텔 브랜드에서도 발견된다. JW메리어트, 인터컨티넨탈 브랜드가 어디에를 가더라도 균일한 수준 이상의 객실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브랜드라면, 호텔이 위치한 지역의 문화, 디자인 등을 과감하게 반영해 채색한 메리어트의 럭셔리 브랜드 ‘오토그래프 컬렉션’은 고객에게 조금은 다른 경험을 제시한다. 지금 하는 이야기는, 위 브랜드를 표방한 서울과 대전 두 호텔의 이야기다.
호텔의 완벽한 진화
‘서울 홍대 라이즈 오토그래프 컬렉션’
호텔이라 하면 기대치가 있다. 단복의 도어맨과 층고 높은 화려한 로비, 정갈한 단색 톤의 객실과 비즈니스를 하고 싶게 만드는 책상 및 볼펜까지. 그런데 ‘라이즈 오토그래프 컬렉션 호텔(이하 라이즈 호텔)에는 도어맨도, 책상도 없다. 객실은 파스텔 톤의 원색을 입혀 화려하나 산만하지 않고 로비 역시 작다. 클럽라운지, 수영장 역시 라이즈 호텔에는 없다. 그런데 완벽한 진화라니 무슨 말일까.
2018년 서울 홍대 옛 서교호텔 자리에 들어선 라이즈 호텔은 브랜드 정체성 덕에 메리어트의 가이드라인이 느슨하게 적용된다. 입구에 들어서면 꽤 많은 직원들이 서서 분주하게 안내하는데 이런 형태의 그리팅은 서울 호텔에서는 드물지만 개인적으로 너무 좋았다. 기분좋은 환대를 거쳐 3층 로비에 다다르면 캐주얼한 복장의 직원들이 체크인을 담당한다. 그런데 이들이 고객을 대하는 애티튜드는 가히 라이즈 호텔의 경쟁력이라 할 만하다. 특히 체크인마다 챙겨주는 이름 모를 와인과 강정 역시 객실에서의 즐거움을 더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잘 오지 않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에 다다르면 기존 호텔에서 볼 수 없었던 색감의 인테리어 및 쇼파, 테이블이 있다. 각 가구는 편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보는 재미가 있다. 욕실은 통유리가 다소 부담스럽긴 하나 그 과감함이 싫지 않다. 인상적인 것은 기대하지 않았던 뷰다. 탁 트인 건물에서 내려다보는 통창에선 저녁 노을이 내린 여의도가 보이고 저 멀리 약 간의 한강까지 보인다. 밤 역시 홍대를 거니는 불빛 덕에 심심하지 않다.
객실 안엔 소소한 소품들이 준비돼 있다. 화제작 ‘오징어게임’에 포함되지 않아 아쉬움을 부른 ‘공기’가 선물로 제공되고 그 옆에는 블루투스 스피커가 있다. 공간의 완성이 음악인 탓에 나는 매번 가볍지 않은 ‘앵커 사운드코어’ 스피커를 챙겨 가는데 라이즈 호텔에 갈 때만큼은 라이즈 호텔의 스피커를 이용한다. 호텔에서 즐기기엔 충분한 출력인데다, 유리창 앞에 스피커를 놓고 침대에 앉아 탁 트인 홍대 뷰를 바라보는 것은 라이즈 호텔이 주는 충분한 힐링임을 경험으로 안다.
조식은 단품으로 제공되는데 그 맛이 생각보다 괜찮다. 객실로 포장도 해주는데 포장의 정성과 밀도를 고려하면 방 안에서 먹는 것 역시 좋은 대안이다. 헬스장 역시 ‘디자인 호텔’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꽤 괜찮은 수준이다. 작지만 파워렉, 덤벨 등 최신 기구가 모두 구비돼 있고 여러 보조기구들이 있어 운동하기 편하다. 특히 이곳 호텔의 투숙객 성향 특성상 운동하는 이가 거의 없어 홀로 편하게 하나하나 사용하면 된다.
라이즈 호텔은, 초기 비싼 가격으로 혹평을 받았던 것과 달리 지금은 ‘안정된 가격’으로 ‘필요한 핵심’을 ‘숙련된 서비스’로 제공해 가히 ‘서교호텔의 완벽한 진화’라 평가할 만 하다. 힙스터를 자극하는 미국의 ‘에이스호텔’이나, 감각 자체를 호텔에 입힌 ‘인디고 호텔’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이 정도로 호텔의 고정된 프로토타입을 벗어던진 곳은 같은 브랜드인 ‘플라자 오토그래프’ 정도밖에 없다. 아울러 호텔의 캐주얼을 넘어서는 호텔 직원들의 프로페셔널한 서비스는 라이즈 호텔을 홍대의 대표 호텔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럭셔리와 디자인 사이 애매한 포지션
오노마 오토그래프 컬렉션
화려한 퍼포먼스를 자랑하는 호텔 브랜드가 국내에만 들어오면 빛을 잃는 경우가 많다. 이미 서울은 과포화 상태인 데다 규제산업이라는 특성, 까다로운 고객군까지 쉽지 않은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특급 호텔의 불모지인 대전에 ‘오노마 오토그래프 컬렉션(이하 오노마 호텔)’의 개관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대전에 출장가면 언제나 균일한 서비스를 안정감있게 제공하는 ‘롯데시티 호텔 대전’을 이용했다. 비즈니스호텔임에도 객실이 비교적 넓고 고요한 환경에서 갑천 뷰를 바라볼 수 있어 효능감이 높았다. 그래서 엑스포 타워 37층까지 객실을 둔 오노마 호텔에 대한 기대치는 굉장히 높았다.
들어갈 때부터 어디로 갈지 헷갈릴 수밖에 없었던 점은 복잡한 구조 및 개관한지 얼마 안 된 것으로 이해가 됐다. 로비도 생각보다 작았고 브라운 색감의 아치형 인테리어는 특별할 게 없었다. 오토그래프 컬렉션 특성상 클럽라운지가 없는 것은 알았지만 뷔페 외에 특별한 다이닝 레스토랑까지 없는 것은 높은 룸레이트를 생각하면 다소 의외다. 로비라운지 역시 로비층에 있지 않고 ‘라운지’라는 이름으로 한 층 아래 자리하고 있는데 카페는 상대적으로 한산하고, 높은 곳에서 강을 바라보며 합리적인 가격대로 이용 가능하다.
가장 기대했던 것은 객실이었다. 잦은 개발과 인허가로 스카이라인이 철저하게 망가진 서울과 달리 대전은 스카이라인이 잘 관리돼 있어 그 가운데 높이 솟은 빌딩에서의 뷰는 시그니엘 서울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앞에는 ‘갑천’이, 뒤에는 ‘우성이산’이 보이며 뭐하나 걸리는 게 없어 그야말로 시원하게 대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야경은 더 아름답다. 서울과 부산이 아닌 도시에서 이 정도의 하드웨어를 갖췄다는 것 자체만으로오노마 호텔에는 가볼만한 가치가 있다.
26층 ’오노마 클럽‘에는 수영장과 피트니스가 있는데 수영장은 서울 어느 호텔과 견줘도 뛰어난 채광과 풍경을 갖췄다. 수영장 벽에는 프랑스 조각가 앙투안 브루델을 오마주한 작품이 설치돼 있는데 수영장을 이용할 때는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됐다. 특히 넓은 자쿠지에서는 수영하다 지친 몸을 데울 수 있는데 이곳에서 보이는 풍경은 업무 가운데 받았던 스트레스를 잠시나마 잊게 한다. 헬스장은 크지 않지만 웨이트존과 런닝머신 존이 구별돼 있고 런닝머신 기구는 테크노짐의 최고급 머신인 ’런퍼스널‘을 사용하는데 너무 좋아서 집에도 하나 구입해두고 싶을 정도였다.
경계를 넘는 것의 의미
모든 호텔은 개관 초기 조직된 직원들의 통일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 측면에서 오노마 호텔의 서비스는 만족스러웠다. 프론트 직원 대응 속도도 빨랐고 룸서비스로 오는 직원들 역시 한 명 한 명 미소로 고객을 응대해 줬으며 ‘오노마 클럽’의 직원들 역시 숙련된 서비스로 고객을 편안하게 해준다.
오노마 호텔은 대전이라는 특급 호텔 불모지에서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는 점만으로도 가볼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수영장이 중요한 투숙객이라면 옆의 초고층 스타벅스도 좋아할 것이 분명하므로 더욱 그렇다. 다만 개관 초기라 그런지 객실의 먼지가 잘 관리되지 않고 냉장고가 손가락이 다치기 좋은 위치에 설치돼 있는 점은 아쉽다. 객실 역시 ‘디자인 호텔’이라 하기엔 너무나 평범했다. 특히 바디로션이 샤워부스 안에 있는 경우는 전 호텔 통틀어 오노마 호텔이 처음이다. 세세한 점검 및 개선이 필수적일 것이다.
사실 ’디자인 호텔‘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선 부족함을 감추는 수사로 활용돼온 게 사실이다. 포시즌스 서울, 비스타 서울은 그 자체로 정갈하거나 화려해서 굳이 수사로 포장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라이즈/오노마 호텔의 위와 같은 시도들은 경직된 우리나라 호텔 서비스에서는 분명 지표가 될 것이다. ‘러브호텔’이 양성화되고 첨단의 서비스까지 제공해 문화로 정착된 일본과 달리 선입견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모텔’이 있을 뿐인 한국에서는, 선을 넘는 호텔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중생활 자체가 원래 더 품이 많이 들고 힘든 법이다. 이 글은 두 호텔에게 보내는 나의 품이자 응원이 될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