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맥주 한잔 할래요?”
딱히 다른 약속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설레임 속에 그의 전화를 기다렸던 것도 아니지만 지친 금요일 술 한 잔이 필요했다. 스트레스를 받아 빠른 취기가 필요할 때는 독주를 찾지만, 혼자인 저녁에는 안주 없이 맥주 한 잔으로 알딸딸한 기분에 취기가 돈다. 그렇게 맥주 한 잔을 그냥 쭉~ 들이키면 조금 더 천국에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사계절 목을 식히고 가슴을 덥혀주는 맥주는 마시는 그 순간 언제나 다른 맛, 다른 기분의 저녁을 만들어 준다.
“왜 나를 만나요?”
그는 한참 회사 이야기에 열을 올리다가 질문에 당황한 듯 했다.
“음… 나는… 당신처럼 내 얘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은 없어서. 친구들을 만나면 다들 각자 이야기하느라 바쁜데, 당신은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줘서…”
그는 직장 이야기나 재수 없는 상사, 불합리한 회사 시스템 같은 것들로 인해 힘겹게 지내고 있는 청춘이라고 얘기했다.
“그러는 당신은, 왜 나를 만나?”
“.....”
젊고 건강하고 상식을 갖고 있는 30대 ‘남자’에게 뭐라고 대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얼마나 마셨을까?
“당신이 애인이면 좋겠어요.”
“구차하게 결혼이라는 제도에 끌려들어가고 싶지도 않고 다만… 해소가 필요해요. 당신에게 어떤 죄책감과 책임감 같은 걸 요구하지 않는 관계만을 바란다면 당신은 어때요?”
그날 이후 우리는 주말마다 만났다.
만남의 주제는 언제나 술 브랜드의 상식적인 내용과 어디 핫한 곳의 인테리어가 고급지고, 셀럽들만 찾는 맛집 등 소문난 곳을 찾아가는 정도였다.
어느 날, 약간 술에 취해서 말했다.
“독일의 에로틱맥주 알아? 우리나라에도 리베스비어로 한동안 굉장히 인기가 있었던 맥주가 있는데...”
“그런 맥주가 있어요?”
리베스가 있는 곳으로 출발~
힘겹게 잡은 택시 속에서 맥주에 대한 얘기를 풀어냈다.
“달콤한 벌꿀향이 나며 부드러운 맛과 목 넘김이 좋은 맥주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정력증진맥주, 변강쇠맥주 등으로 알려져 있어. 독일에서는 리베스베어의 탄생 비화처럼 현재까지 같은 방식의 제조와 숙성 비법으로 소량만 생산되는 희소성 있는 맥주지. ‘에로틱’의 오리지날 상품명과 라벨은 한국의 미풍양속 법규상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리베스(Liebes: 사랑)’로 우리나라 정서에 맞게 한국판으로 재탄생해 소개된 맥주야.”
10년 전, 독일에서도 맥주의 본고장이라 불리는 독일 바이에른의 쇤브룬 마을에 살던 위르겐 호프 씨는 당시 자동화된 맥주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공장 근처에 살던 호프 씨는 한 밤 중에 기계가 고장이 났다는 연락을 받았고, 이에 급하게 짧은 반바지만 입은 반나체 차림으로 공장에 달려가 맥주를 직접 휘젓게 됐는데 당시 호프 씨는 맥주를 만들면서 ‘특별한 맥주가 만들어질 것 같다’는 이상한 영감을 받았고, 2개월 뒤 한 주민이 그날 만들어진 맥주를 마신 뒤 정력이 좋아졌다고 말하면서 쇤브룬 마을에서 전설적인 맥주가 됐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이후부터 현재까지 호프 씨는 한밤 중에 바이에른의 전통 요의만 걸친 반나체 상태로 양조장에서 에로틱비어를 제조하고 있다.
특수 네온 조명을 갖춘 별도의 에로틱맥주 창고에 보관되는 맥주는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들으며 숙성된다.
에로틱비어는 누드 여성사진의 라벨과 ‘에로틱(Erotic)’이라는 선정적인 상품명이 국내 미풍양속 법규에 위배되기 때문에 그동안 만나보기 힘들었지만 현재는 소량 수입이 되고 있다는 리베스맥주의 스토리텔링은 대충 이러했다.
30분을 달려 도착한 곳에 어둡고 안개같은 끈적한 음악이 흐르는 비어하우스에는 20대 청춘보다는 40대 이상의 비어스족들로 가득했다.
리베스비어를 마시기 위해 자리를 잡고 안자마자 그는 내게 얼굴을 가까이 하고는 “보고 싶었는데...”라고 말했다. 나에게 그는 욕망이나 육체관계를 뛰어넘은 오랜 친구 같은 느낌이었다. 연인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미지근한 관계가 유지되면 여자들에게 그 남성은 단지 남자사람친구다. 여자들의 자존심과 이성은 욕망을 이긴다. 어쩜 그는 리베스처럼, 리베스만큼, 리베스인양 사랑하고 싶었나 보다.
안주는 이탈리안산 살라미와 그린샐러드를 주문했다. 맥주는 단맛 말고는 다른 특별한 맛은 없고 목넘김이 좋았다 목을 타고 내리는 쓴맛이나 톡쏘는 찡한 맛이 없어 도리어 과일향 맥주를 먹는 듯 했다.
약간 단맛의 맥주에 붉고 건조가 좋아 약간 쫄깃한 짠맛이 강한 살라미는 여러 장을 한꺼번에 먹을 수가 없었지만 그린샐러드의 녹색채소들이 짠맛을 줄여 줬다.
“나는 살라미를 볼 때마다 욕망 덩어리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 붉은 몸통 속에 새햐얀 지방덩어리를 보여주면서 어떤 장식을 하지 않았는데도 썰어 놓기만 해도 식탁을 풍성하게 해 주니 참 멋진 안주예요.”
“차가운 것과 차가운 것이 만나 뜨겁게 해 주는 조합이라 리베스는 왠지 살라미와 잘 어울려. 살라미는 익히지 않은 날고기에 열을 가하지 않고 소금이나 향료 따위를 쳐서 만들어 색깔부터 사람을 흥분시키는 무언가가 있어. 소시지에 잡다한 고기로 만들 때 맛을 은폐하기 위해 인공색소와 감미료를 넣어 익히지만 살라미는 그냥 익히지 않고 건조시켜 벌거벗은 맛이 나잖아. 그리고 고에너지 식품이고 달콤한 리베스비어와 짠맛이 강한 살라미는 최강의 콤비가 되거든. 이 맥주를 마시고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싶었어. 나는 리베스비어가 되고 당신은 살라미가 돼 주면 좋겠어.”
그의 구애에도 나의 대답은 단호했다.
“술이나 마셔요.”
김성옥
동원대학교 호텔조리과 교수
김성옥 교수는 식품기술사. 조리기능장.
영양사 등 식품, 조리에 관련한 자격증 국내 최다 보유자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