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여행을 가기로 한 친구는 여행전문가도 동참한다면 여행이 더 즐거울 것이라 했다. 인천공항 여행사 전용 미팅테이블에 도착했을 때 친구는 면세점 순례를 위해 미리 들어가 버리고 나는 여행전문가라는 여행 동참자와 탑승구 게이트 커피숍에서 인사를 나눴다. 그녀의 영어 이름은 ‘스잔’. 짙은 화장과 명품으로 휘감은 그녀의 화려함이 지나쳐 함께 있는 나 자신조차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불편했지만 경쾌하고 거침없는 그녀의 말투가 예쁘지도, 그렇다고 밉지도 않았다.
11시간의 비행시간을 견디고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흩어진 머리와 얼룩진 화장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명품 스카프와 머리에 선글라스를 올려 잔뜩 멋을 부렸다. 방학기간 중 해외여행을 이미 두 곳이나 다녀왔다며 이번 여행은 짝퉁 명품을 사기 위해서라고부끄럼없이 이야기한다.
각기 다른 여행 목적을 지닌 사람들은 대부분 부부와 연인으로 우리처럼 여자 4명이 함께 온 팀은 없었다. 4명이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둘씩 룸에서 잠을 자며 여행지를 돌아다니고 수없이 사진을 찍어대느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여행 2일차, 호텔 뷔페에서 음식을 담아 자리에 도착하니 누군가 우리 테이블에 합석해 있었다. 혼자 여행을 온 남자가 있었던 것이다. 스잔은 까르르 웃으며 낯가림 없이 그와 대화를 하는 중이었다.
다음날 아침 출발하면서 가는 곳마다 그녀 옆에는 그 남자가 있었고 사진사처럼 줄곧 사진을 찍어줬다. 티없이 맑고 뽀얀 피부가 예쁜 그녀의 룸메이트는 대화 상대를 잃어버려 우린 셋이 한 팀이 되면서 여행 스케줄이 변경됐다.
여행을 하면서 평균 5개 접시에 음식을 담아 먹어 치우는 스잔의 어마어마한 식사량에 놀라기도 했고 이번 여행에 사진을 찍기 위해 큰 여행가방을 두 개 가득 채워 와 매일 매일 새로운 코트, 핸드백, 신발로 갈아입는 스잔은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지중해의 아름다운 바다가 감탄사를 쏟아내게 한 안탈리아의 저녁. 붉은 노을이 너무 아름다워 와인과 맥주가 맛있는 저녁이었다. 그녀는 가슴골이 보이는 섹시한 원피스를 입고 그 남자와 둘이서 연인처럼 식사를 했다. 은근한 대화가 와인만큼 붉어질 때 우린 식사를 끝내고 룸으로 들어왔다.
“언니, 저 사람과 맥주 한잔하고 올께요.”
거침없는 화법과 끝없이 소비하는 모습에 남편은 9년 전 그녀를 떠났고 외로웠다며 마음보다 몸으로 사랑하고 싶다고 취한 그녀는 만나지 3일이 된 그 남자와 뜨거운 밤을 보내고 돌아와 그녀는 이런 말들을 쏟아냈다. “인간으로만 살아가는 내가 중년이지만 여자로서 가슴 한 켠에는 이성애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리고, 판타지가 있어.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데 로맨티시즘이나 에로틱함이 그림자처럼 내 몸과 마음을 휘감고 있어서 그 순간 그를 놓지 못하고 함께 있었던 거야.”
다음날 디너로는 케밥이 나왔다. 우선 채 썬 당근, 양상치, 오이가 담겨져 나오고, 병아리 콩스프와 화덕에서 금방 구워 나온 60cm 정도 길이의 얇은 이탈리아 씬 피자같은 빵에 고기와 올리브로 가득 토핑한 음식이 나왔다. 뜨거움과 향미로움으로 입안은 행복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도 더운 김만 나왔다.
이어 수직 방향으로 세운 큰 꼬챙이에 고기를 끼우고 구운 케밥은 돈까스용 고기처럼 넓적하게 편 고기를 꼬챙이에 촘촘하게 꿰고 숯불 화덕 앞에서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특히 굽고 있던 콧수염이 멋진 조리사의 미소가 먹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줬다. 먼저 익는 바깥쪽부터 썰어 스잔 앞에 놓여지자 썬 고기를 그대로 먹워치웠다. 배고픈 하이에나 같이 대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아함을 버렸다. 납작하고 담백한 터키식 빵인 피데(Pide)에 고기를 얹어 단맛이 가득한 채 썬 당근을 토핑해 싸서 먹었다
얇게 슬라이스로 썰어서 나온 되네르 케밥을 한입 넣고는 이번 여행에서는 케밥만 먹자는 제안에 우리 넷은 동의를 했다. 쉬쉬케밥, 카아트케밥, 아다나케밥, 코르테, 이스켄데르케밥, 타시케밥, 테스티케밥, 되네르케밥...“새로운 음식처럼 그 남자도 새로워.” 그녀는 우리와 함께가 아닌 매일매일을 그 남자와 케밥을 즐겼다. 그리고 아이란(Ayran)으로 입가심을 했다.
마음은 한결같이 언제나 청춘이라고. 20, 30대의 아름다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주름진 얼굴과 쳐지는 살이 미워 보여 마사지와 짝퉁 명품이라도 자신을 포장하고 싶어 하는 애욕을 보이는듯 한 그녀는 그날 밤도 룸메이트를 혼자 남겨뒀다.
“남녀 간 사랑의 생명력은 섹슈얼리티(Sexuality)에 있어. 남녀 간의 설램과 흥분, 어떤 기대감에 의한 관심과 이끌림은 이성적 욕망과 본능 때문이야. 이성애에 대한 욕망은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 다니고 매일 밤을 맥주와 케밥으로 터키를 기억하겠지.” 그녀가 구사하는 언어는 충분히 그 남자를 유혹했을 것이다.
이스탄불 공항에서 우린 다시 넷이 돼 그 남자와의 밤 얘기를 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 사람과 만날 거야?” “터키 여행을 왔기 때문에 케밥을 즐겼던 것처럼 한국으로 돌아가면 일상의 나로 돌아갈 거야. 그 남자와의 관계를 통해 청춘과 열정을 회복했고 타성에 빠져 있던 내 작품에도 활력을 되찾아 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 그 남자의 바람에 흩나리는 긴 앞머리, 구릿빛 얼굴색, 조각 같은 가슴을 만지며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에게 꿈같은 쉼터는 아니야. 노을지던 안탈리아의 해변가에서 그와 함께 먹었던 그 맥주와 케밥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야.”
김성옥
동원대학교 호텔조리과 교수
김성옥 교수는 식품기술사. 조리기능장.
영양사 등 식품, 조리에 관련한 자격증 국내 최다 보유자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