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프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 열정을 불사르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는 맛으로 승부를 내는 화려한 스타가 되길 원했고 또 누군가는 사명감을 끌어안은 맛의 대가가 되고 싶었거나 요리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소소한 기쁨을 최고로 여기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을지 모른다. 각종 매체에 쏟아지는 셰프라는 이름의 화려함을 뒤로, 그 많던 요리사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한 때 요리 인생의 뜨거움과 희열을 안고 살았던 사람들을 이제 만나러 간다. 더 이상 직업 요리사는 아니지만, 셰프를 셰프로서 빛나게 해주는 제 2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 그들을 다이닝 크리에이터라고 불러 본다. 2월호 다이닝 크리에이터의 첫 번째 손님은 조리복 전문 브랜드 '븟'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븟’의 회사소개를 해주세요.
김준하 한 마디로 조리복을 만드는 회사입니다.
김어진 이사님, 그러지 말고 감성적으로 답변해주세요.
김준하 아 그럴까요? 븟은 주방을 뜻하는 옛우리말로 조리복의 기준을 세우는 곳입니다. 조리복에는 요리사의 철학과 가치, 고민이 담겨야하기 때문에 조리복 한 땀 한 땀에 요리사들의 목소리를 담았어요. 한마디로 공감할 수 있는 곳이죠. 우리의 옷을 입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고 옷을 만드는 우리가 서로가 공감할 수 있는, 대한민국 조리복의 기준을 세워가는 곳이에요. 븟의 구성원 대부분이 요리사 출신인 것도 우리의 일에 많은 도움이 돼요. 요리사라는 직업에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조리복은 소통의 결과물입니다. 내부적으로 븟은 직원들 간에 눈높이를 나란히 하려고 노력해요. 오래된 죽마고우처럼 함께하는 친구들이죠.
모두들 오 역시.(박수)
김준하 (하하)잘했습니까?
서로가 특별한 인연으로 연대했다는 느낌을 받아요.
박미란 각자 맡은 역할은 달라도 누구의 몫이랄 것 없이 다같이 CS업무를 하고 있기 때문에 공통된 스트레스를 공감하고 소통하며 서로의 영역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요. 이제는 회사라기보다 마을 공동체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여기 계신 대다수의 구성원이 조리과 출신이거나 현업에서 근무한 전직 조리사라고 들었어요.
김어진 저는 브랜딩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어요. 함께 일한지는 4년 정도 됐고 븟이 가진 색깔을 정리하고 표현하는 일을 합니다. 조리과를 나왔지만 디자인을 좋아해 처음에는 푸드 스타일링을 하려고 했어요. 색채공부를 하다가 샛길로 빠지게 된 케이스랄까요. 현업에 진출하지 않았지만 가슴 속에는 나도 요리를 매개로하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자아가 늘 존재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븟에서 운영하는 셰프 커뮤니티의 리부팅 캠프에 참가했다가 븟과 연을 쌓게 된 게 계기가 됐어요. 당시 저는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었는데 새롭게 리브랜딩이 필요한 븟에 합류했죠. 븟의 브랜드는 우리가 요리사와 가까이 있고 우리의 일이 그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에서 시작돼요. 이쪽 일을 하다보면 디자인을 위한 디자인을 할 수 없어요. 요리사를 표현해야 하는 일이 많죠. 요리에 대한 이해도, 요리사의 업무, 조리환경, 성향 등 여러 가지를 알아야 하거든요.
김준하 단체급식업체인 현대그린푸드에서 9년 동안 근무했어요. 직업병으로 손목터널 증후군이 생겨 일을 잠시 쉬고 누나의 일을 돕고 있던 중이었어요. 누나는 호주에서 아동복 브랜드를 론칭해 사업을 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제작을 하다 보니 일을 봐줘야 할 사람이 필요했던 거죠. 손목 터널 증후군은 재발 위험이 높을 뿐더러 손목 외에도 허리, 어깨, 발목, 무릎 등 성한 곳이 없어 이 일을 계속 해야 하는 지 고민하고 있었어요. 배 대표와는 고등학교 때부터 쭉 함께 요리공부하며 지낸 쌍둥이 사주의 친구입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이 시기에 배 대표로부터 함께 일할 것을 제안 받았어요. 오픈과 함께 지금껏 6년째 븟에서 호흡을 맞추고 있어요.
장미란 대표님, 이사님과는 대학 선후배 관계예요. 조리를 전공했지만 조리사보다는 바리스타가 더 적성에 맞아 3년간 바리스타로 일하다가 븟에 합류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아르바이트로 조금씩 일을 돕다가 지금은 이사님의 일을 배우면서 이 길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돼요. 대표님이 사업을 구상할 때 옆에서 지켜보면서 사실 저는 이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어요.
권은선 대기업 사무직으로 일하다가 20대 후반에 캐나다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어요. 호텔 F&B 파트에서 일했지요. 한국에 와서는 제주에도 있었고 레스토랑, 카페 등 주로 고객과 접점에 있는 홀파트에서 일했어요. 븟의 멤버들과 호흡도 잘 맞고 무엇보다 사람들을 만나는 일에 재미를 느껴요.
조리복 사업에 뛰어든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요?
배건웅 6~7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면으로 만든 두꺼운 조리복이 대부분이었어요. 물론 지금도 그렇고요. 원가 절감을 위해 중국 공장에서 생산되는 두꺼운 면과 나일론 재질로 만들었기 때문에 일하다가 땀이 배이면 어깨부위가 찢어지기 일쑤였죠. 주방은 원래 더운 공간이라서 땀 배출이 원활하지 않은 데다가 내구성이 떨어져 옷이 금방 얇아지고 닳게 돼요. 외국에는 혼방소재를 사용한 좋은 조리복이 많아요. 하지만 이런 옷들은 외국인의 체형에 맞춰 제작되기 때문에 체구가 작은 사람의 경우 몸통은 XS을 입어야 맞는데 팔이 끼는 단점이 있어요. 실제로 주방에서 근무하면서 조리복에 대한 불편함이 많았어요. 이럴 바에 차라리 내가 만들어 입는 게 낫겠다! 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는데 정말 그렇게 된 거죠.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의류사업에 아무런 연이 없었는데 선발주자로 나서기에는 너무 무리수가 큰 것 아닌가요?
배건웅 살기 위해 달리 선택의 길이 없었어요. 일하던 레스토랑의 2호점 오픈을 앞두고 쉬는 날 운동하러 나갔다가 낙차하는 바람에 쇄골 뼈가 골절됐거든요. 그런데 퇴원하는 길에 다시 한 번 교통사고를 크게 당했어요. 불난 데 휘발유를 붓는 격이죠. 부러진 쇄골에 덧대어 놓은 철판이 휘고 다리의 아킬레스건이 크게 손상을 입어 다시는 요리를 할 수 없게 됐어요. 몸이 망가지니 일자리도 잃고 서운함과 원망 속에서 어두운 날을 보냈어요. 빚은 늘고 있는데 임신한 아내가 눈에 밟히고 가진 것이라고는 조리복 밖에 없는 상태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대로 망할 수 없었어요.
그 힘든 시간을 극복하기 힘드셨을텐데.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아쉬움도요.
배건웅 사고가 있기 전까지 요리사를 천직으로 믿고 살았어요. 죽더라도 주방에서 죽는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죠. 조리과를 졸업하고 미국을 다녀온 뒤 이탈리아의 요리학교로 유학하고 돌아와 이태원의 레스토랑에서 밤낮으로 열심히 일했어요. 당연히 셰프가 되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을 한 적이 없었죠. 맨땅에 헤딩하듯 이태원에서 븟이라는 이름을 내건 작은 가게를 시작했어요. 혼자가 버거워 죽마고우인 김준하 이사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그는 흔쾌히 힘을 보태줬어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이탈리아 유학시절에 만나 패션공부를 하던 친구들의 도움으로 공장도 소개받고 일을 빨리 알아갈 수 있었어요. 무엇보다도 김 이사의 누나가 유럽에서 의류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조언을 얻을 수 있었죠.
인생의 굴곡이 깊게 느껴지네요. 아마도 조리복 사업을 하게 될 운명이었나 봐요.
배건웅 예상은 했지만 시작부터 많이 힘들었어요. 이 일을 하려고 했을 때 주위에서 하라는 사람보다 말리는 사람이 더 많았죠. 의류전문가들도 이 길을 낙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어요. 시장이 좁은 데다가 사업성이 검증되지 않았으니까요. 남들이 ‘No’라고 할 때 선택의 여지없이 ‘Yes’를 외쳤지만 벼랑 끝에 몰렸을 심정은 당사자가 아니고선 이해할 수 없어요. 도와달라면서 9년차 대기업에 다니던 친구까지 데려다 놓고 월급을 줘야 하는데 변변한 수입이 없잖아요. 처자식이 있는 집에는 일 년 반 동안 생활비도 주지 못하면서 직원 월급을 벌기 위해 남몰래 야간 대리기사를 뛰기도 했어요. 너무 지치니 둘이 찬 바닥에 누워 말도 안 되게 시작해서 이러고 있는 것보다 오히려 빨리 접는 편이 더 낫겠다는 푸념이 절로 나오더라고요. 그러다 어느 순간 편안해지는 기회가 왔어요.
김주현 븟이 먼저 길을 트기 시작하니 이제는 비슷한 업체들이 생겨났어요. 저는 회계를 담당하고 있지만 새로운 분야에 발을 들여놓는 게 익숙지 않아 그만 둘까도 여러 번 고민 했어요. 하지만 거의 2년이 되도록 저를 떠날 수 없게 만든 데에는 븟 만이 가지고 있는 오묘한 조화가 있기 때문이에요. 셰프라는 직업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기회도 됐고 손님들이 조리복을 입고 거울을 보며 만족하는 모습을 볼 때면 뿌듯함도 느껴요. 이 분야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된 거죠. 백지상태로 시작한 븟은 더 했을 것 같아요. 븟은 아직 신생기업이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 중에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5~6년을 버텨왔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지만 이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대표님이 하고자 했던 베이스가 이미 깔려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요리를 전공한 사람들이 조리복을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어요. 어떤 이점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김승연 저는 옷의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어요. 시각적인 것을 고려해 디자인 하면 소비자의 입장에서 직원들이 빠르게 피드백을 주니까 수정작업이 원활하게 이뤄져요. 디자인 했을 때 보여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입었을 때 편해야 하잖아요. 핏이 불편하다던지 손을 올렸을 때 옆구리가 보인다거나 허리가 조이는 것 등 작업복이기 때문에 생각해야할 많은 것들을 옷에 정확히 반영할 수 있어요. 예쁘지만 편하고 실용적인 것에 집중하다보니 고객들도 븟의 옷을 입어보고 나면 다시 찾아주시더라고요.
그렇다면 옷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이 뭔가요?
김승연 원단의 선택이에요. 작업의 편의성을 고려해 오히려 디자인보다 작업에 가장 적합한 원단을 찾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요. 일단 디자인이 나오면 컬러와 패선을 생각해 원단을 골라와 테스트 해본 뒤 최종 샘플이 나와요. 원단에 따라서 느낌이 많이 달라지기 때문에 결과물이 나왔어도 아니다 싶으면 10번이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시작해요. 장점이자 단점은 원단을 꼼꼼하게 고르다 보니 다른 조리복 보다 수명이 2~3배 길어요. 5년 된 조리복도 수선 의뢰가 들어올 정도로요.
기성복과 조리복을 만드는 것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면요?
김승연 아무래도 조리복은 활동성을 더 고려할 수밖에 없어요. 시즌별로 옷이 나오는 기성복과 다르게 주방은 항상 더운 공간이라서 소재나 색상에 한정적이기도 하고요.
븟을 통해 여러분이 이루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모두들 골목 분식점 주방에서 일하시는 분들까지 저희가 만든 조리복을 입는 것이에요. 단순히 조리복을 입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분들이 일하는 근무환경이 개선되는 의미까지 담고 있어요. 파인다이닝에서만 고급 조리복을 입는 것은 아니잖아요. 격차 없이 모든 분들이 좋은 조리복을 입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븟이 한국의 많은 조리인들을 응원합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모인 븟은 회사이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같은 성향을 가진 이들이 모여 있는, 사람 냄새가 폴폴 나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도 계속 우리의 생각을 함께 나누고 지친 몸 쉴 수 있는 마음 편한 곳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