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앞 피켓드는 사람들
세상에서 중요한 사안을 다룰수록 쾌적함이 중요하지만 법정은 예외다. 재판의 중요성이야 말할 필요도 없지만 법정 안은 덥고 뭘 마시기도 어렵다. 증거기록 10만 페이지가 넘는 사건에서 수 시간째 계속되는 증인신문은 머리 뿐 아니라 몸으로도 버텨내야 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그 무더위에도 피켓을 들고 법원 근처에 서 있는 트렌치코트 중장년들이 많다. 법원 정문 앞은 몇 달째 ‘모 재판부의 농간’으로 재산을 빼앗긴 할머니가 확성기를 들고 있다. 그 뒤엔 “모 검사가 범죄자와 유착했다.”는 내용을 호소하는 어느 아주머니가 말없이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법원 앞엔 이렇게 시위하는 분들이 대상만 달라질 뿐 항상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상상을 했다. 이 길을 수없이 지나다녔을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라도, 그들에게 무슨 사정인지 이야기라도 듣고 싶다며 말을 걸어본 이가 있을까? 판사는? 변호사는? 그랬다면 저 분들 주장의 논리적 정합성과는 관계없이 기분은 좀 나아질까? 살천스런 생각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가 곧 있을 재판 생각에 나 역시 다른 이들처럼 서둘러 발걸음을 뗐다.
직업상 매일 보는 사람들이 소송 당사자들이지만 사실 보통의 사람들은 평생에 소송을 한 번 해볼까 말까 한다. 누군가는 소송을 즐기는 경우까지 봤지만,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상처가 된다. 갈등 끝에 할 말이 없을 때 뭐라고 할까? “법대로 하자”고 한다. 이 말에는 그 어떤 배려와 예의, 동정과 공감도 배제한 채 싸우겠다는 의지가 내재한다.
그래서 상담도 쉽지 않다. 법률상담을 하러 오면 변호사에게 자연스레 치정·오욕을 드러내고, 믿었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 자신의 상처를 쏟다 이내 눈물을 흘린다. 말하다가 사기꾼에게 화를 낼 때는 욕설을 섞어가며 소리를 지르는데 가끔 이게 나에게 하는 이야기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이렇게 상담을 몇 번 하면 나 역시 체력이, 아니 감정이 소모된다. 최근 심리학 공부를 하는 변호사가 증가하는 이유다.
호텔 노동자의 전화응대
호텔에서 ‘전화 응대’ 업무는 중요하다. 그것은 호텔이 고객을 얼마나 신경 쓰는지 간접적으로 웅변하며 때때로 고객을 감동시킨다.
하지만 어찌 됐건 이것도 일인지라, 미소 뒤엔 오늘도 업무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노동자가 있다. 미소를 짓고 웃어야 하는 이러한 감정노동은 직무에 자신의 감정을 알맞은 형태로 변형시켜 이를 상품으로 판매하는 행위다. 자신의 감정이 어떻건 호텔리어는 웃어야 한다. 어느 기업의 직원은 자신의 가족에게보다 더 많이 수화기 너머 고객에게 “사랑합니다. 상담원 ㅇㅇㅇ입니다”라고 말한다.
오늘날 시장이 판매자 중심에서 소비자 중심으로 전환되면서 ‘고객제일주의’가 생겼고 덕분에 조선시대 대부분 상민계급으로 농경에 종사했을 고객들은 왕이 될 수 있었다. 고객을 가족처럼 대하자는 어느 호텔 사규는 처음 본 중장년에게도 “어머님, 아버님”이란 호칭을 강제한다.
육체노동과 두뇌노동으로 이분된 산업화 시대에, 가장 하위계급에 해당했던 흑인 노예들은 적어도 악랄한 고용주에게 욕은 할 수 있었다. 자신들끼리 흥얼거리며 노래를 불렀고(재즈), 무술 수련을 금지 당하자 춤에 무술을 녹였다(카포에라). 힘든 육체노동 가운데에서도 음악과 춤으로 감정을 달래며 문화로 발전시켰다.
반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노동력은 감정까지 저당 잡힌다. 전통적인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육체와 두뇌만을 고용자에게 할애했다. 즉, 그 시간동안 육체와 두뇌는 고용주의 몫이었지만 감정만은 ‘자신’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고객제일’의 사조 아래 포획된 새로운 비즈니스는 육체와 두뇌 외에 감정까지 바치게 한다. 이제 노동에 ‘자신’은 없고 재화로 환산돼 사용되는 육체·두뇌·감정만이 존재한다. 몸이 힘들거나 머리가 아프면 쉬면 나아지지만, 감정이 다치면 상처는 누적된다. 감정노동은 그래서 위험하다.
고객의 욕설, 처벌될까?
“방에 벌레가 나왔는데 몇 분째 기다리란 말만해 이 XXX야”
“야 이 XX야 짐 빨리 갖다달라했지. 너 내가 누군지 알아?”
10년차 호텔리어는 이 말을 듣고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호텔 내부규정에 따라 “상담을 중단할 수 있습니다. 고객‘님’”이라 3번 경고하고 끊어야 했다. 감정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감정노동자보호법(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이 시행된지 5년이 넘었는데, 처벌될까?
형법 제311조(모욕)
산업안전보건법 제26조의2(고객의 폭언등으로 인한 건강장해 예방조치) |
전화로 상담원에게 한 욕설, 처벌할 수 없다.
처벌할 수 없다. 객관적 구성요건 중 공연성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 즉, 여러 명 앞에서 한 것이 아니라 전화를 받는 두 당사자 간의 대화에서 모욕했기 때문에 처벌되지 않는다. ‘성적인 모욕’에 해당하는 경우 성폭력특별법으로 처벌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소위 ‘감정노동자보호법’이 시행되며 언론들이 앞다퉈 전했던 “상담사에게 성희롱·욕설하면 형사처벌 받는다”, “콜센터 관용은 ‘옛말’, 법원도 엄벌” 따위의 헤드라인들은 무엇일까. 처벌 받은 사례를 보면 여성 호텔리어에게 300회 이상 전화하며 욕설과 성희롱을 했거나 실제 프런트 데스크를 찾아가서 행패를 부린 비상식적인 경우뿐이다. 즉, 아직도 감정은 보호받지 못한 채 노동은 계속되고 있다.
감정노동은 사람과 접촉하고, 상대의 마음을 읽어, 내 감정을 그에 맞춰 비우게 한다. 그리고 전 과정이 녹음, 녹화되며 상급자에 보고된다. 앨리 러셀 혹실드의 《감정노동》은 “사람들은 ‘감정노동으로 무엇을 잃느냐’ 보다, 그 대가로 ‘무엇을 얻느냐’를 중요시한다”라고 지적한다. 육체·두뇌에 이어 감정까지 재화로 환산해 거래되는 노동에서 ‘실현’은 커녕 ‘자아’라도 존재하는 것일까?
이런 감정을 법이 보호해주지 못하는 사이 우리는 서로의 감정을 지키기보다 푸는 데 할애한다. 다른 곳에서 받은 감정 스트레스를 나보다 약한 이에게 푸는 ‘을’에 의한 ‘갑질’ 연쇄작용은 병·정·무로 이어져 모두의 주체성(감정)을 완벽하게 검열한다.
이는 비단 승무원·콜센터 직원으로 대별되는 감정노동자들만의 몫은 아니다. 사람을 대면하는 모든 직업에서 그렇다. 내 감정에 솔직해지는 기준은 하나다. ‘무엇을 얻느냐’다. 개인과 개성이 찬양되는 자유 국가에서 법의 보호 밖에 있는 우리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물음이 필요하다.
“나는 정말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사족. 실제 상담원들은 글로 차마 옮기지 못할 성적·가학적 욕설을 들으면서도 “계속 폭언하시면 끊겠습니다.”라는 말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말은 의식을 구획하고 생각을 지배할진대 같이 욕은 못하더라도 다른 안내멘트로 제어할 수는 없을까. 예컨대 “자기소개 잘 들었습니다. 끊습니다.”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