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서울 한복판에도 창의적인 복합 공간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제 웬만한 시설에 괜찮은 카페 하나쯤 결합돼 있는 건 신기한 일도 아니다. 또 특이한 방식으로 변모하는 공간도 있는데, 유럽에서는 감옥이었던 곳이 호텔이 된 적도 있고, 합정의 유명한 한 카페는 원래 신발 공장이기도 했다. 게다가 에어비엔비, 위워크, 역세권의 다양한 쉐어하우스를 비롯해 ‘공유’의 개념까지 공간에 흡수됐다.
이렇듯 오프라인 공간은 무궁무진한 방식으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데, 이러한 ‘카멜레존’ 트렌드가 호텔업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전통적인 기능을 벗은 우리 시대의 ‘공간’
책을 읽으며 맥주를 마시는 공간, 은행 안에 들어선 카페, 힙한 쇼핑센터로 변모한 폐산업 시설까지. 언젠가부터 색다른 공간들이 눈에 띈다. 아니, 분명히 원래 있었던 공간인데, 예전과 달리 낯설고 흥미로운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곳이 많아졌다.
<트렌드 코리아 2019>는 기존 오프라인 공간이 가지고 있던 고유 기능을 넘어, 다양한 양상을 띠게 되는 현상을 ‘카멜레존 트렌드’로 정의했다. 직관적으로 알 수 있듯, ‘카멜레존’이란 카멜레온처럼 자유자재로 변신하고 있는 공간일 테다. 이러한 카멜레존이 창의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한 가지 프로그램만 수행되던 공간에서 고객들이 다양한 가능성과 경험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왜 ‘카멜레존’이 돼야 했을까?
오프라인 공간이 변화를 꾀하기 시작한 데에는 ‘위기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디지털의 약진으로 기존 소비 공간들이 가지고 있던 고유의 기능을 온라인에서 대체하거나, 훨씬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게 됐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미국 대형 백화점 체인인 시어스가 도산한 것을 비롯해, 국내도 마찬가지로 대형 유통 업체들의 폐점과 구조조정이 잇따르고 있다. 심지어 ‘소매의 종말’이라는 다소 충격적인 표현이 등장할 정도다. 그래서 오프라인 공간의 생존 방식으로 ‘카멜레존’ 트렌드가 등장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온라인에서 오프라인 공간의 고유 기능을 가져갔다면,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기능의 변화’를 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위장술로 목숨을 부지했던 카멜레온처럼, 오프라인 공간들 역시 약진하는 온라인 플랫폼과의 차별화를 위해 변화할 때가 된 것이다. 공간 비즈니스를 기반으로 하는 호텔 역시 이러한 트렌드에 주목해야한다. 먼저 구체적으로 우리 주변에 어떤 ‘카멜레존’이 새롭게 찾아왔는지 살펴보자.
도심 속 크리에이티브한 복합 공간, 사운즈 한남
네스트 호텔과 글래드 호텔의 디자인을 진행하기도 했던 제이오에이치(JOH)에서 신개념 공간 플랫폼 ‘사운즈 한남’을 선보였다. 한남동 제일기획 건물과 순천향대학병원 사이, 유동인구가 많지 않은 위치했지만 사운즈 한남은 벌써 문화 힙스터들의 핫 플레이스로 각광받고 있다. 이곳은 JOH에서 운영해온 브랜드와 레지던스, 오피스, F&B를 결합해 탄생시킨 복합공간이다. 600평 규모의 평지에 다섯 개의 건물로 이뤄진 구조부터 유니크한데, 일반적인 상업 시설처럼 ‘높게’ 쌓아 올리지 않고, ‘넓게’ 퍼트렸다. 그 안에는 14세대의 레지던스와 JOH의 오피스 그리고 15여 개의 상점들이 어우러졌다. 사운즈 한남 내부를 스틸북스, 일호식, 매거진B 등 기존 JOH가 쌓아올린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담은 콘텐츠들로 가득 준비한 것이다. 이렇듯 세련된 도시인의 취향을 잃지 않음과 동시에 ‘작은 마을’과 같은 분위기를 형성한 것이 사운즈 한남의 특별한 점이다.
호텔업계에 찾아온 ‘카멜레존’ 트렌드
국내 호텔업계에서도 이러한 흐름을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컬래버레이션 성공 사례로 힐튼 부산의 이터널 저니 서점이 잘 알려져 있다. 힐튼 부산이 위치한 휴양 단지 ‘아난티 코브’는 그 자체로 다채로운 문화복합공간이다. 아난티 코브에는 워터 하우스, 야외 공연장, 해변 산책로 등이 들어서 있어, 힐튼 부산의 투숙객들은 여행 중 단순히 잠만 자러 오기보다는, 머물며 휴식을 즐기러 오는 이들이 많다. 이터널 저니는 이러한 투숙객들의 특성에 맞게 서점의 기획과 운영을 섬세하게 고려해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지난해 오픈한 워커힐호텔앤드리조트의 캡슐 호텔 다락 휴는 기존 국내 업계에서 시도하지 않았던 혁신으로 주목받았다. 여수국제박람회장 내부에 론칭한 다락휴는 내부 구성을 마치 세트장처럼 구성해 차후 다른 공간으로의 이동이 가능하다고 전했다.
이는 기술을 통한 공간 혁신을 시도한 것으로 의미가 깊다. 더불어, ‘재생’과 ‘공유’ 측면에서도 이러한 호텔들의 도전이 업계의 가능성을 넓혀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공간의 본질은 경험을 제공하는 것
김석훈 디자이너는 제일기획 매거진 7월호에 공간의 본질에 대해 언급했다. ‘공간’을 완성시키는 것은 시설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채워질 경험의 총체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현대의 ‘공간’들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온라인 매장이 제공할 수 없는 ‘무엇’을 찾아내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 ‘무엇’이란 공간 안에 채워질 다채로운 콘텐츠가 될 것이다. 현재 호텔업계는 공유 숙박의 등장을 비롯해 신선한 아이디어로 새로운 형태를 띤 다양한 숙박 업체들과 경쟁 구도에 돌입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의 방식을 답습한 채로 생존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특히 아이디어와 콘셉트로 승부해야하는 3,4성급의 중소형 호텔일수록 전통적인 호텔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과감한 시도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오프라인 공간의 혁신 틈에서 호텔이 나아가야할 방향은 어디일까. 이에 대해 스튜디오 익센트릭 김석훈 대표와 이야기를 나눴다.
“호텔, 오픈 마인드로 다양한 공간 기획과 디자인 시도할 때”
스튜디오 익센트릭 김석훈 대표
본인 소개 부탁한다.
현재 스튜디오 익센트릭의 대표이자 크레이티브 디렉터로 활동 중이다. 론칭 6개월 차의 신생 디자인 스튜디오로, 다양한 공간 기획 및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더불어, 홍익대 건축대학의 겸임 교수로 강의를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이전부터 공간 디자이너로서 다양한 호스피탤리티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 참여했던 대표적인 프로젝트에 대해 소개한다면?
이전에는 스튜디오 가이아 뉴욕 본사의 수석 디자이너로 활동하다, 서울 지사 대표로 한국에 들어오게 됐다. 스튜디오 가이아 소속 당시 주로 호텔 공간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의 안다스 호텔, W호텔 워싱턴 D.C 등의 디자인을 맡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W호텔 파나마인데, 호텔 작업을 할 때 그 지역의 문화, 역사를 반영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W호텔 파나마는 색감, 형태에 강렬한 남미의 전통 문화가 흡수돼 로컬리티의 정체성을 나타낼 수 있었다 .
호스피탤리티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특별한 철학이 있는지?
호텔 공간 프로젝트는 ‘편안함’과 ‘새로움’의 줄타기라고 할 수 있다. ‘Hospitality’라는 단어가 접대라는 뜻을 가진 것처럼, 투숙객들은 일단 편안하기를 기대하고 방문한다. 또, 집이 아닌 공간에서 꿈꾸는 변화와 새로움에 대한 니즈도 동시에 존재할 것이다. 편안함을 위해서는 호텔의 기본적인 요소에 충실하고, 그게 갖춰졌을 때 새로움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특히 호텔 공간에서 사람들이 내가 의도한 대로 경험을 즐길 때 기쁨을 느끼게 된다.
현재 공간 마케팅 분야에서 다양한 공간들이 결합하며 ‘카멜레존’으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국내 호텔의 공간 디자인 및 마케팅 현황은 어떠하다고 생각하나?
최근 공간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변화의 흐름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기존 오프라인 공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탈피해,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한 창의적인 시도라고 생각한다. 호텔업계에서도 다양한 공간 기획과 마케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까지 다소 경직돼있고 정형화돼있다는 느낌이 든다. 어느 정도 리스크를 떠안고 과감한 액션을 취하면 흥미로운 결과물을 선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호텔의 공간 마케터 혹은 공간 디자이너가 이를 잘 활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호텔업계에서 한층 오픈 마인드로 접근하기를 바란다. 가령, 호텔과 상상할 수 없던 전혀 다른 분야의 콘텐츠와 파격적인 컬래버레이션을 염두에 둬도 좋을 것 같다. 젠틀몬스터, 탬버린즈 등의 국내 브랜드들이 기존의 공간 콘텐츠들을 상업 공간과 결합한 케이스를 눈여겨볼만하다. 또, 국내에서 라이즈 호텔의 프로젝트가 인상적인데, 이곳에서는 호텔의 아이덴티티와 부합하는 롱침, 사이드 노트 클럽 같은 브랜드와 함께했다. 또, 뉴욕의 MOXY 호텔은 팝업 스토어를 통해 지역성을 적극 활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로컬리티를 활용하는 것도 호텔이 지향해 나가야할 방향성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찾고 싶은 호텔 공간이란 어떤 곳이 돼야 할까?
최근 조애나 월시(Joanna Walsh)의 저서 <호텔>에서 이와 관련해 울림을 주는 구절을 읽었다. “호텔이라는 개념은 돌아가기 위한 집이 있기 때문에 성립한다.”라는 문장이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듯 ‘집 같은 호텔’은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일 수 있다. 본질적으로 투숙객에게 호텔은 집이 아닌 새로운 ‘이상향’일 수밖에 없다. 호텔은 새로운 경험에 대한 소비자의 니즈를 충족시킬 수 있는 창의적인 ‘데스티네이션’으로 거듭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