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자욱한 안개가 도로 위를 뒤덮어 버렸습니다. 한치 앞을 볼 수 없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도 몇 미터 앞을 볼 수 없는 현실 속 상황입니다. 시속 130㎞까지 주행할 수 있는 고속도로지만, 현실은 비상등을 켠 채 느릿느릿 굴러가는 중입니다. ‘새벽안개 헤치며 달려가는 첫차에 몸을 싣고, 꿈도 싣고’란 노래 가사를 중얼거리며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애쓰지만, 얼마 남지 않은 주유 상태가 불안감을 높입니다. 이런 여행은 기억에 남을 만하지만 앵콜을 외칠 만큼 아름다운 경험은 아닙니다. 이탈리아의 겨울은 안개 쓰나미(Troppa Nebbia)로 명성이 자자합니다. 실제로 모데나(Modena)를 방문하기 위한 이번 여정에는 동행이 있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열리는 탱고 라이브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감상하기 위한 모임이었는데, 이들은 안개주의보 앞에서 맥없이 백기를 들고 말았습니다. 덕분에 저는 ‘혼밥, 혼여행’을 하게 됐습니다. 12월엔 눈이 내리기를 기대하지만, 실제로는 비가 더 많이 내립니다. 한국에 설날과 추석이란 대 명절이 있다면, 유럽에서는 크리스마스가 매우 중요한 축제이자 가족 모임의 날입니다. 각 지역으로 흩어졌던 가족들도, 이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된 하이앤드 원그룹 머신 ‘Mina’의 론칭과 관련한 특별워크숍에 초대돼 다녀왔습니다. 보통은 항공편을 이용하는데, 신제품과 함께 신기술을 설명하는 자리인지라 많은 짐을 차에 싣고 운전해야 했던 터프한 여정이었습니다. 프랑스의 모나코, 니스, 칸느를 거쳐 스페인에 도착하는 경로였는데 프랑스 국경과 인접한 도시 산레모(San Remo)를 지나는 순간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회귀한 듯 제 생각은 2013년의 어느 날로 멈춰 있었습니다. 시선의 저편에서 기억이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매달려있던 2013년 가을의 토스카나 골목, 끝없이 펼쳐지는 지중해를 품고 있는 리구리아 해안. 어떤 꿈과 이상 같은 것을 가슴 한복판에 새긴 채 80ℓ짜리 대형 배낭을 스쿠터 뒷자리에 꽁꽁 묶은 채 바람을 가르는 한 청년의 모습이 보입니다. 체 게바라의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를 인상 깊게 본 탓일까요? 나이가 들면 들수록 배짱이 줄어든다고 하는데, 어디서부터 생겨난 객기인지 용기가 마음을 끌어당겼습니다. 이탈리아의 식문화와 레스토랑과 바(Bar) 등, 아름다운 풍경과 역사의 유구함을 만끽할 수 있는 아름다운 여정이었지만, 또한 그것은
Prologue# 밀라노에서 약 200km 떨어진 곳에는 붉은 벽돌색으로 물든 예술의 고장, 볼로냐가 위치해 있습니다. 그야말로 붉은 치맛자락을 펼쳐 놓은 듯한 볼로냐 시내의 아름다움이 오렌지색 벽과 조화를 이룹니다. ‘뚱보의 도시’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이 도시는 미식각의 도시로 유명합니다. 손으로 직접 만든 파스타 탈리아텔레pasta tagliatelle와 고기 스튜의 묵직함이 어우러진 ‘라구ragu'는 일명 ‘볼로네제 파스타’로 불리며 이탈리아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덕분에 슈퍼마켓에서도 쉽게 라구소스를 구매할 수 있습니다. 너무 유명해서 이젠 흔한 아이템이 됐지만, 집집마다 그 맛과 풍미는 천차만별입니다. 작년 겨울 이 지역 주민 사이에서 입 소문이 난 가족운영 레스토랑 뜨라또리아trattoria에서 맛본 파스타 볼로네제는 이탈리아의 다른 레스토랑에서 맛볼 수 없었던, 담백하면서도 동시에 고기 특유의 풍미가 입안 가득한 맛이었습니다. 이런 풍부함의 원천에는 지역이 지닌 특수성도 있어 보입니다. 볼로냐가 속해있는 에밀리아로마냐 주州는 예전부터 교통의 요충지로, 롬바르디아 평야와 포 평원으로 펼쳐지는 대평원 덕분에 이탈리아에서 제일가는 곡창 지
Prologue# 눈부신 햇살이 비춰오네요. 태양은 귀찮게도 따라다닙니다. 간질이기도 어루만지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자전거 위에서 펼쳐지는 도로 위의 풍경이 오늘은 왠지 더욱 로맨틱합니다. 선글라스를 착용한 탓일까요? 렌즈 사이로 들어온 빛이 모든 풍경을 흑백 사진처럼 만들어버렸습니다. 하얀색 셔츠의 소매를 약간 걷어 올린 신사부터, 화사한 원피스를 입고 자전거 페달을 밟는 구릿빛 피부의 여인, 이런 모습은 이곳에서 낯설지 않습니다. 유럽에서는 선글라스를 낀 사람을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홍채가 푸른 백인종은, 홍채가 검은 인종보다 멜라닌 색소가 적어 눈부심에 민감하다고 합니다. 유럽에서는 계절을 떠나 선글라스는 필수 아이템입니다. 뒤집어 이야기해보면 한국인의 눈은 외부의 빛에 강한 적응력을 가진 셈입니다. 스포르체스코 성안으로 자전거 핸들 방향을 바꾸고 페달 속도를 늦춰 생동감 넘치는 사람들을 관찰합니다. 초록색 잔디 위에 누워 다정하게 스킨십을 나누는 연인들부터 태양을 온몸으로 받으며 태닝하는 사람들,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 꼬랑지를 연신 흔들며 공을 던져 달라 짖어대는 강아지... 자전거 바퀴는 계속 굴러갑니다. 몇 초 단위로 펼쳐
Prologue# 세베소는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주에 있는 도시입니다. 전통적으로 가구업이 발달한 이곳은 겉으로는 매우 소박해 보이지만 튼실한 도시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한국에 수출되는 이탈리아의 명품 가구들은 주로 밀라노의 북부에 위치한 소도시에서 대대로 가업을 이어받아 만들어집니다. 이 작은 도시가 ASDC Ba Se라는 축구팀도 가지고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필자는 TV를 시청하지 않지만, 우연히 인터넷에서 '비정상회담'이라는 프로그램을 본 기억이 납니다. 이탈리아인 알베르토가, 가족과 친구들의 축구 사랑에 대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이야기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축구공 하나로 22명의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쉴 새 없이 누비는 이 스포츠가 이탈리아를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축구 광신도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세베소의 지명은 이 지역을 흐르는 강 이름에서 유래됐다고 합니다. B.C 3세기에 군사 요충지 역할을 한 세베소는 16세기에 기근과 페스트를 두 차례나 겪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76년 익메사(icmesa) 공장에서 다이옥신을 포함한 유독성 화학물질이 유출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지역 사회는 물론 이탈리아 전체가 충격에 휩싸이게 됩니다.
Prologue# 반가운 손님이 지구 반대편에서 찾아왔습니다. 미식을 즐기고 그림과 클래식을 좋아하는 커플인지라 즐거운 마음으로 사소한 것부터 챙기며 이들의 여행을 안내하게 됐습니다. 위대한 사상가, 예술가의 고향인 피렌체의 에너지를 몸소 느끼고, BisteccaFiorentina(비스떼까삐오렌띠나)의 정수를 맛보고자 고속도로 위를 가볍게 달리고 있습니다. T-본 스테이크는 T자 모양의 뼈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지만, Toscana를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우연히 시청한 이탈리아의 서바이벌 요리 프로그램 ‘I Re dellagriglia(그릴의 왕)’에서 좋은 고기 부위의 선정, 손질, 조리방법 등이 자세하게 소개됐는데, ‘BisteccaFiorentina(비스떼까피오렌띠나)’편에서 T-본 스테이크에 대한 참가자들의 열정과 최고 셰프들의 자부심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스모키한 숯향, 구운 것과 날 것의 경계 안에서 갇힌 육즙 그리고 고기 자체가 단단하게 품고 있는 풍미는 그야말로 명불허전 입니다. 침을 꼴깍 삼키며 공기를 마십니다. Scene 1# 햇살이 따가운데, 바람은 시원합니다. 눈은 앞 차와의 간격을 유지하기 위해 동공을
Prologue# 에어컨을 가동시켰습니다. 분명 아카시아 향기를 맡으며 다녀온 피사 여행이 아직도 생생한데, 자동차 시동을 켜기 위해 키를 돌리는 짧은 순간, 이곳은 사하라의 사막 또는 습식 사우나를 연상케 합니다. 이윽고 물방울로 맺힌 땀이 ‘뚝’ 떨어지고 맙니다. 자연의 대류현상을 몸으로 느끼는 찰나입니다. 여담이지만, ‘찰나’는 불교적인 용어로, 산스크리트어가 어원이라고 합니다. ‘대비바사론’에 따르면 75분의 1초에 해당하는 매우 짧은 순간을 의미한다고 하는데요. 저는 불교 신도가 아닙니다. 다만, 짧은 순간의 해프닝을 어떻게든 묘사해 보려 발버둥 치는 궁색한 필자입니다. 큰 일교차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코 푸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 소리 역시 다가올 여름의 신호탄이 아닐까요…. 코 푸는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이탈리아에서는 식사 도중에 코를 푸는 것에 대해서 매우 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코가 떨어질 정도로 크게 풀어도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 고급 레스토랑에서도 말이죠. 그런데 파스타면을 먹을 때 후루룩 소리를 내며 식사를 한다거나, 음식의 냄새를 맡기 위해 오랫동안 코를 킁킁거리는 행위에 대해서는 매너가 없거나 교육받지 못한
Prologue# ‘어제 본 자스민처럼 생긴 저 꽃은 무엇일까? 아카시아 나무인가?’달리는 차창 밖으로 펼쳐진 파노라마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가운데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수 십 km동안 펼쳐진 초록 잎과 하얀 꽃들은 아스팔트 위에 상쾌한 향기를 뿌리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검색해 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아카시아 나무였습니다. 봄과 여름의 사이. 그 미묘한 간극에서 피어나는 존재. 한 송이 내에서도 먼저 피고 지고 또 다시 피고 지다 강렬한 향기를 풍기며 절정을 맞이하는 꽃, 꿀벌들이 좋아하는 꽃 가운데 으뜸인 아카시아 말입니다. 꽃말에는 ‘숨겨진 사랑’, ‘나의 비밀스런 사랑’이란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합니다. 어제는 분명 밀라노에서 목적지인 피사(Pisa)까지 정해진 시간 안에 도착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쉴 새 없이 차선을 변경하며 도로의 질주자를 자처해야만 했는데, 집에 돌아가는 길은 경춘선 국도를 달릴 때 왠지 모를 낭만을 느끼는 것처럼 여유롭기만 합니다. 마음이 가벼운 것이 꼭 봄날의 흩날리는 꽃가루 같다고나 할까요. 라스패치아(La sprezia)에서 파르마(Parma)로 연결된 도로에는 자연 말고도 사람의 손이 빚어낸 고풍스러운 가옥들이 평온하게 자
Prologue# “그곳은 꼭 가보셔야 해요, 다른 곳은 몰라도 그 곳은 정말이지 꼭이요!.” 2013년 밀라노의 한 민박집에서 여행 도중 만난 카톨릭 신부님께서 제게 남겼던 메시지입니다. 이탈리아의 성당을 순례 여행하고 계신 그 분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여행이었지만 저 역시 에스프레소의 본고장을 순례하듯 커피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에스프레소는 이탈리아에서 씨가 뿌려져 싹이 나고 꽃을 피운 하나의 문화입니다. ‘산 지미냐노라...’ 기약을 할 순 없지만 반드시 가보리란 스스로 짧은 다짐을 했습니다. 비제바노, 토리노, 피아첸차, 파르마, 모데나, 볼로냐, 피렌체... 맛을 향한 본능적 질주가 시작됩니다. 식약처가 권장하는 일일 카페인 권장량을 비웃기라도 하듯 궁금증을 못 이기고 이곳저곳 눈에 보이는 카페들을 들락날락 거립니다. 단지 몇 개월의 여행으로 이탈리아의 음료 문화를 이해한다는 의도 자체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매우 불순합니다. 결국 이 사실을 깨닫고 언어를 배우며 문화를 이해하려고 하다 보니 어느새 이탈리아에 살면서 직장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회가 되면 여러 도시를 방문하지만 문화를 이해하고 느끼면 느낄수록 다양함과 깊은 역사성에 놀
Scene 1... 친퀘테레는 이탈리아 리비에라에 있는 절벽과 바위로 이뤄진 해안입니다. 이탈리아 라스페치아(La Spezia)의 서쪽에 있는 리구리아 지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소개했던 제노바와 인접해 있고 아래쪽으로는 토스카나주에 속한 마사(massa)에서 한 시간 정도를 달려가면 친퀘테레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피사에서 친퀘테레를 향해 뻗은 해안선을 달리다 보면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의 풍경과 더불어 드넓은 백사장을 뒤에 두고 관광객을 맞이하는 즐비한 레스토랑과 바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이탈리안 해산물 요리 애호가인 저는 바닷가 근처에 방문할 일이 생기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입가에 침이 고이곤 합니다. 자연에서 건져낸 자연스러운 짠맛과 바다의 냄새를 간직한 요리접시는 과장을 조금 보태 입으로 바닥을 청소해 주고 싶은 마음까지 생깁니다. 그 옛날 소금이 화폐의 수단으로 사용됐던 것만 보더라도 음식의 저장과 맛의 측면에서 짠 맛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습니까? 실제로 저는 2년 전 이 지역을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달린 경험이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카페 문화를 구석구석 경험해 보고 싶었던 제게 400cc의 스쿠터는 와이너리를 품은 산간지역은 물론
Scene 1... 덜컹거리는 소음 사이로 눈앞의 첩첩산중에 위치한 아기자기한 집들이 펼쳐집니다. 저는 지금 제노바행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연신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는지 신이 난 초등학교 1, 2학년 즈음 돼 보이는 아이와 이를 흐뭇하게 지켜보면서 과일이며 빵이며 연신 아이의 입속으로 넣어주는 할머니의 모습이 정겹게 느껴집니다. 밀라노 첸트랄에서 한 시간 이상을 열차로 달리다 보면 강원도 산간지역을 통과하는 듯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산 아래 풍경을 보니 제법 높은 곳을 달리고 있나 봅니다. 불과 어젯밤까지만 해도 저는 스위스 루체른에 있었습니다. 2016년의 커피 시장의 동향과 머신업계의 미래를 전망하는 모임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같은 산간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어제와 오늘의 느낌은 사뭇 다릅니다. 바다가 펼쳐져 있는 이태리 제노바와 보석처럼 빛나는 호수를 품고 있는 스위스 루체른은 분명 다른 무언가가 존재합니다. 이탈리아의 꼬모 호수를 가로질러 스위스의 국경을 차로 넘나들면서 알프스가 제공하는 신선한 공기를 온몸으로 마셨습니다. 잠시지만 자연의 넉넉한 마음은 이방인인 제게도 관대하게 느껴집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든 깨끗한 자연이 가져다주는 위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