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 시오노 나나미가 사랑에 마지 않았던 ‘주홍빛 베네치아’의 5월은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물의 도시’, ‘카니발 축제’, ‘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 베네치아를 부르는 수식어는 저마다 다릅니다. Scene 1 # 산타루치아 기차역은 매일 8만 명, 연간 3000만 명의 이용자를 수용하는 곳으로 유럽과 이탈리아에서 가장 바쁜 기차역 중 한 곳이죠. 관광객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베네치아의 한 뒷골목에서 눈을 감고 있으면 바람이 불면서 ‘끼익, 끼익’ 하는 소리가 납니다. 보트를 묶어놓기 위해 만들어진 나무로 된 물체가 움직이면서 내는 소리입니다. 너무 얕아서 파도라고 부르기엔 겸연쩍은 물소리와 갈매기 소리가 합주를 합니다. 평화로운 오후란 책에서 나오는 문장이 아니라 실체란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6세기 망망대해 갯벌뿐인 바다 위에 섬을 만들고 다리를 연결해 수많은 운하가 도시 내부의 지역을 이어줬습니다. 118개의 섬, 400여 개의 다리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해상도시가 건설된 것이죠. 하나의 국가로 1500년의 장엄한 시간을 이어온 역사를 지켜온 베네치아의 현재 모습은 15~16세기의 모습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유리공
Prologue # 아침에 눈이 말똥말똥해져 일어나보니, 시계는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창문을 열어보지 않아도, 스며드는 빛 없이 고요한 방안의 공기가 이를 확인시켜 줍니다. 환절기마다 찾아오는 불청객은 일교차가 큰 탓에 온도가 최저로 떨어지는 시간대에 몸의 변화를 감지하고 깨어나는 것입니다. Scene 1 #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다면, 혹은 스트레스로 작용하는 무엇이 있다면, 이 모든 무의식적 요인들은 불안을 일으키고, 우리의 뇌는 이 문제에 대해서 수면 중에 반응한다고 합니다. 불안은 직접 중추신경계의 변화를 가져오고, 이 변화는 수면 주기와 관련된 신경 화학적, 생화학적 시스템들에 또 다른 작은 변화를 야기시킨다고 합니다. 분절 수면을 일으키는 불안은 우리의 몸과 정신을 복원할 수 있는 깊은 수면의 단계를 방해한다고 하네요. 주로 봄이나 가을철의 환절기에 그런걸 보면, 계절의 변화에 몸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갑작스런 변화는 그 자체가 평온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Scene 2 # 이탈리아는 최근 2019년 경제 전망을 내놓으면서, 대내외적으로 시끄럽고 불
Prologue # 베란다 사이로 걸쳐있는 알프스의 만년설을 구름이 우산처럼 덮고 있습니다. 몇 년 동안 정든 옛 집에서 조금 더 외곽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깨끗하고 확장된 새로운 집으로 옮기는 좋은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를 섭섭함이 몰려옵니다. 사람만큼이나 집도 정이 드나 봅니다. 햇살이 스며든 창문을 열자 동공 안으로 삼각형 모양의 아이스크림을 연상시키는 장관이 빨려오듯 들어옵니다. 복잡했던 마음도, 겨울의 쓸쓸함도 이내 고요해 집니다. 자연의 설계자에 대한 경탄과 함께 말이죠. Scene 1 # 알프스는 유럽 중부에 있는 산맥으로, 동쪽으로는 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에서 시작해, 이탈리아와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독일을 거쳐 서부 프랑스에 이르기까지 광활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산맥에서 가장 높은 산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에 위치한 몽블랑입니다. 알프스(Alps)는 산을 뜻하는 켈트어 또는 백색을 뜻하는 라틴어가 어원입니다. ‘희고 높은 산’이란 의미로 불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보통 알프스라고 하면 스위스의 절경 또는 프랑스의 몽블랑을 연상시키기 쉽지만, 이탈리아의 산맥은 1200km에 이르는데, 이는 전체 산맥의 약 27.3%를 차지하며
Prologue # 겨울에 내리쬐는 따뜻한 햇살은 참 맛있습니다. 찬 공기에 귀가 빨개진 채 버스를 기다리며 먹는 어묵 한 꼬치와 따끈한 국물처럼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가죠. 1월의 광합성은 왠지 더 포근하게만 느껴집니다. 잠시 눈을 감고 걷던 길을 멈춥니다. 명동처럼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지만, 찰나의 순간 햇살과 대화를 잠시 나눕니다. 질투심이 많은 바람이 어디선가 불어와 정오의 데이트를 방해합니다. 마음을 동요하지 않고 따뜻함에 집중하자 더욱 거센 몸짓으로 심술을 부립니다. 이솝 우화에 등장하는 해님과 바람의 이야기처럼 모자를 뒤집어쓴 채 외부의 진동에 저항합니다. 봄을 갈망하는 차가운 겨울입니다. Scene 1 # 오늘 이탈리아의 동부 해안 라벤나에서 25km 떨어진 지점에서 강도 4.6규모의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볼로냐, 마르케, 베네토 지역에서도 이 지진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불안해 집에서 잠을 청할 수 없어서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발 빠르게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임시 휴교령이 내려졌고, 전문가를 파견해 각 건물의 안전을 검사한다고 합니다. 시장은 방송을 통해서 이러한 조치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위험에 대처하는 이들의 모습이 놀
Prologue # 뼛속까지 시린 공기가 폐부로 들어옵니다. 실제로는 영상의 기온임에도 불구하고 체감은 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알프스의 공기를 연상시킵니다. 한국의 겨울에 비하면 비교적 높은 온도지만, 이토록 춥게 느껴지는 이유는 지형적인 영향으로 공기가 매우 습하기 때문입니다. 서울의 1월 평균 습도가 59.8%에 비하면, 밀라노는 86%까지 올라갑니다. 온도계가 가리키는 숫자가 절대적인 가치를 담지 못하는 상황으로, 오래 거주한 교민들은 ‘뼛속까지 시린 추위’란 표현을 종종 씁니다. 우주의 질서 안에서 찾아오는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추위는 왠지 사람들을 위축시키고, 어딘가 모르게 허전함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Scene 1 # 추운 날씨 가운데 밀라노에서는 L’artigiano in Fiera 행사가 RHO에서 열렸습니다. 이 행사에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의 각 나라들이 참석해 나라별 특징을 간직한 특산물과 공산품, 음식 등을 선보이며 축제의 열기를 더해갔습니다. 이름 자체가 장인을 의미하는 아르띠지아노(Artigiano)인데요. 사전적 의미로는 기술자를 가리키는 단어로 또한 예술가를 일컫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경지에 이른 숙련된
Prologue # 스타벅스, 명실상부 지구 1등 커피 프랜차이즈가 35년 만에 밀라노에 입성했습니다. 여러분은 스타벅스의 이름이 어디에서 유래됐는지 알고 계신가요? 머리가 흰 거대한 고래에게 한 쪽 따리를 잃은 에이햅의 고래를 향한 복수를 담은 서사시적 소설 <모비딕> 속 등장인물의 이름에서 따왔는데요. 고래를 잡는 배 포경선 피쿼드호의 선장 에이햅은 복수심으로 불타 동료들의 충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백경을 찾아서 대서양에서 희망봉을 돌아 태평양에 이르기까지 항해를 하게 됩니다. 마침내 흰 고래와 3일이나 되는 사투를 벌인 끝에 선장은 작살을 명중시키고도 바다 밑으로 빨려 들어가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적인 내용입니다. 여기에 돛대의 밧줄을 담당한 일등 항해사 ‛스타벅’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그리고 세 명의 멤버를 더해 s’를 붙여 스타벅스가 됐다고 합니다. Scene 1 # 스타벅스의 로고는 그리스 로마신화의 바다의 인어 사이렌을 형상화했습니다. 아름답고 달콤한 목소리로 유혹해 수많은 배를 침몰시키고 죽음의 축제를 벌인 캐릭터인데요. 달콤하고 치면적인 유혹으로 많은 사람들을 이끌겠다는 스타벅스의 의지가 담긴 엠블럼인 셈입니다. 이 세계적 기업이
Prologue #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립니다. 출근길인데도 집에 돌아가서 잠자리에 들어야 할 것만 같은 어둠이 도시를 삼켰습니다. 잠에서 깨어났지만, 불빛을 대체한 어둠은 어젯밤 퇴근길의 제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인위적으로 더 많은 달걀을 생산하기 위해 밤을 낮으로 바꿔치기한 ‘양계장의 닭’과는 사뭇 대조적입니다. 마치 영화 <인셉션>의 한 장면에 등장하는 ‘꿈속의 꿈처럼 몽환적인 밀라노의 아침입니다. Scene 1 # 양계장의 불빛이란, 대도시의 삶과도 일정 부분 닮아 보입니다. 저녁이 되면 자연스레 각성의 늪에서 벗어나 가정과 평온으로 돌아가야 하는 자연스러움을 거부한 채 긴장을 향해 질주하는 뫼비우스 띠처럼, 아드레날린 중독은 흥분과 위험의 수치를 한층 높이며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붓게 합니다. 더 많은 자극이 있어야하는 과잉의 시대, ‘Less is better’란 문구가 비상구처럼 느껴집니다. 닭…. 이 존재와 관련된 깊은 사랑의 이야기가 제 삶의 한 조각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하굣길 정문 앞에는 병아리를 파는 상인이 있었습니다.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상자 안에서 여러 마리의 병아리가 ‘삐약삐약’거리며 어미를 잃은
Prologue # 가을이 부는 아침에 눈을 뜨면 도화지처럼 파란하늘이 창문 사이로 인사합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좋은 아침이야’라고 화답하려 신선한 공기를 힘껏 마십니다. 뜨거운 태양 때문에 자전거의 페달을 밟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지구의 공전은 가을의 중심으로 우리를 안내했습니다. 왠지 서정적으로 보이는 낙엽들을 즈려밟으며 밀라노의 상징 ‘스포르체스코 성’ 주변을 자전거 바퀴가 힘차게 굴러갑니다. 붉게 물들어가고 있는 나뭇잎 사이로 가벼운 가을 소풍을 즐기는 아이들, 강아지와 산책을 나온 사람들, 다양한 풍경들이 지나칩니다. Scene 1 # 이런 날에는 왠지 바리톤 가수 김동규의 ‘10월의 어느 멋진 날’이 떠오릅니다. 노르웨이 출신 뮤지컬 가수 엘리자베스 안드레아센이 ‘Danse mot var’란 제목으로 1992년 발표한 것이 원곡인데요. ‘봄을 향해 춤을 춘다’란 의미의 제목은 ‘10월의 어느 멋진 날’과는 계절적으로도 다른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이 곡의 작곡가는 노르웨이 출신 ‘Rolf Lovland’로 피아니스트이기도 한 그는 아일랜드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Fionulla Sharry를 만나 듀오 ‘시크릿 가든’을 결성하고 1996년
Prologue # 이탈리아의 여름은 뜨거운 태양이 아스팔트를 녹여버릴 것 같은 기세입니다. 물론 100년 만에 찾아온 한국의 더위에 비하면, 한숨을 돌릴만한 수준입니다. 8월의 이탈리아는 90% 정도의 사람들이 휴가를 떠나며 빗장을 걸어 잠그는 시기입니다. 토스카나의 발도르차를 향해 떠난 여정은 영화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밀밭 사이로 줄지어 서있는 사이프러스 나무들은 아름다움에 입 밖으로 감탄사가 새어나옵니다. Scene 1 # ‘막시무스의 집’으로 불리는 곳에도 들려보았는데요. 영화 <글레이데이터>에서 주인공 막시무스가 아내와 아이를 그리워하며, 자신의 집으로 걸어 내려오는 명장면이 된 곳과 매우 비슷해 이렇게 이름 지어진 곳이기도 하죠. 광활한 구릉지에 추수 이후 둥그렇게 말린 건초더미가 펼쳐진 모습이 장관을 이룹니다. 포도밭과 올리브 나무는 태양에게 백기투항을 한 채 열기를 받아내며 영글어갑니다. 소도시의 유명 와인과 음식을 맛보는 것도 여행의 백미입니다. Scene 2 # 낭만의 여정 가운데, 무더위를 피해 방문한 도시는 바로 ‘라퀼라(l’acquila)’입니다. 아브루초 주에 위치한 이 곳은 로마에서 차로 약 1시간 30분 떨어진 곳에
Prologue # 1만m 상공을 시속 870km로 비상하는 비행기는 오늘 따라 유독 심한 난기류와 만났습니다. 불안감을 달래보려고 애써 잠을 청해보지만, 기체가 흔들릴 때마다 느껴지는 오싹한 느낌은 놀이기구의 짜릿함과는 다른 무엇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것이 큰 위협이 아니란 사실을 이성적으로 직관한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유년시절에는 멋지게 푸른 창공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를 타는 것이 그렇게도 소원이었는데, 이토록 바라던 것이 현실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상상하던 것과 실재하는 것의 간극은 때로는 말하기 섭섭한 무엇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뜨거운 온탕에 들어가서 ‘시원하다~’라고 하는 아빠의 말에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탕에 따라 들어가 ‘지옥 불’ 같은 뜨거움을 맛보고 나서야 어른들이 사용하는 그 ‘시원함’이란 중의적 표현을 몸소 배우는 아이들의 여정처럼 말이죠. Scene 1 # 한국에서 열리는 Coffee and Talks의 행사에 참여하기 위한 여정 중에 기내에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시선에는 ‘워커홀릭’처럼 비춰질 수 있겠지만, 시간을 쪼개야만 하는 처지, 한편으로는 열 한 시간 이상을 비좁은 공간에서 무료함과 사투를 버리는 과정 보다는 글을
Prologue# 반가운 손님들이 한국에서 찾아왔습니다. 외국에서의 삶을 사는 제게 친구란 의미는 매우 소중합니다. 무엇보다 친구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가족처럼 따뜻한 사람들과 마주하는 시간은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Scene 1# 6월의 나폴리는 뜨거운 여름을 준비하고 있지만 저녁에는 시원한 바닷바람으로 여독을 달랩니다. 소렌토, 포지타노, 아말피, 폼페이의 유적은 남부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품고 있었습니다. 나폴리는 밀라노, 로마에 이은 3대 도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전히 골목에는 빨랫줄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서민적 모습이 남아있습니다. 작년 영국 대중지가 선정한 세계 10대 위험도시에 ‘나폴리’가 포함되자 이곳의 시민들은 불쾌함을 표현했습니다. 필자가 다니는 직장에도 3명의 나폴리 출신이 있는데, 누구보다 정감이 넘치고 근면 성실한 친구들이어서 그들의 도시가 ‘위험하다’라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더 선은 “이탈리아 내에서는 ‘지옥에 가라’는 말이 ‘나폴리에 가라’는 말과 동일할 만큼 나폴리의 악명은 높다.”고 했는데요, 나폴리의 시장 루이지 데 마지스트리스는 이에 대해 “거짓 뉴스이고, 나폴리에서 단 하루도 보내보지 못한 사
Prologue# 동이 트지도 않았는데 아침이 밝아왔다는 사실로 본능적으로 침대 시트를 한 번 더 붙잡아 보려는데.. 의지 사이, 귓가를 맴도는 새들의 지저귐으로 아침이 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리지 않는 ‘알람 소리’. 흐르는 정적이 안겨주는 불안함은 무엇일까요. 일조량이 길어진 탓인지 새들은 너무 일찍 잠에서 깨어난 것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인근에는 새들이 제법 많은데, 무엇이 그렇게도 좋은지 새벽부터 노래를 부르는 탓에 이 순간만큼 저는 ‘아침형 인간’의 삶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찾는다.’는 속담이 오늘따라 심술궂게 느껴지는, ‘썸머타임’ 존재의 이유를 몸소 체험하는 하루입니다. Scene 1# 5월 1일 밀라노의 노동절은 대부분의 상가들이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서 몇 블록을 걸어가야만 하는데, 이마저도 중국 상인이 운영하는 바에 가야 하는 실정입니다. 음식도 주로 터키인, 아랍인들이 운영하는 케밥집이나 차이나타운의 식당들에 가야 합니다. 이탈리아에서 중국인들은 매우 부지런하며, 전략적으로 장사를 하고 있어서 그들의 세는 점점 불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일찍 일어나는
Prologue#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고, 진달래 피는 곳에 내 마음도 피어.” 흐릿한 기억으로 떠오르는 가사를 흥얼거려봅니다. 1931년 발표된 가곡으로 김동환님의 시에 김동진 작곡으로 봄을 기다리는 소박한 마음이 담겨 있는 이 곡은 단순하게 반복되는 멜로디가 제법 목가적입니다. 설레는 마음이 봄바람을 타고 들어오지만 2018년 4월의 봄은 늦겨울의 삼한사온처럼 변덕스럽습니다. 반팔 티셔츠를 꺼내야 할 것 같다가도 어느새 트렌치코트를 꺼내 입어야 합니다. 낭만과는 제법 거리가 멀지만, 봄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Scene 1# 커피엑스포에 참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필자는 남산타워 꼭대기에 걸려있는 하얀 구름과 파란 도화지 하늘을 상상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중국 발 미세먼지로 자욱한 잿빛 하늘입니다. 마스크를 착용한 행인들이 심심치 않게 보이고 달리는 차창 넘어 아스팔트 빛 하늘과 흐드러지게 피어난 흰 분홍 벚꽃의 간극이 상념을 불러일으킵니다. 집 근처 남산은 아파트가 들어서지 않은 동네 아이들에겐 놀이터와 같은 곳이었죠. 개울이며 산기슭을 활보하는 개구쟁이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개나리꽃 구경도 하고 가재잡기도 하려고 개울 사이의 돌들을
Prologue# 이탈리아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선거로 떠들썩했습니다. 2009년 과격한 반체제주의자인 코미디언 베페 그릴로가 창당한 오성운동이 선거에서 싹쓸이를 했기 때문입니다. 불과 10년 사이에 비주류에서 주류가 된 것입니다. 이들의 등장을 처음에는 많은 이들이 비웃었지만 다크호스를 넘어 메이저가 돼버렸습니다. 변화의 속도는 계절의 변화만큼이나 빠릅니다. Scene 1# 사무실 창문을 누군가 두드립니다. 저와 직장동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3층 높이의 건물 창문을 누군가 두드린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죠. 뜻밖의 침입자는, 아니 어쩌면 친구가 되고 싶었는지 모르는 불청객은 다름 아닌 참새였습니다. 부리로 계속 두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류들에게도 표정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왠지 천진난만해 보이는 표정의 새가 벌이는 난타공연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표정이라... 기분 탓이겠지요? 실제로 봄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이탈리아의 아침은 커피 잔이 부딪치는 소리, 그라인더에서 커피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주문이 오가는 소리로 분주합니다. 어떤 날은 그것이 ‘난타공연’처럼 일정한 리듬을 갖추고 있는데 세라믹 재질의 그것들이 부딪치며 나는 소리가 어쩔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