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Wine Column] 2000년 역사의 헝가리 와인, 그 놀라운 변신의 현장을 가다

2022.11.13 09:00:16

 

날씨가 쌀쌀해지니 스위트 와인을 그다지 찾지 않는 필자도 갑자기 달콤한 와인이 당긴다. 셀러를 여니 한켠 구석에 황금색 색상의 예쁜 작은 와인 병이 눈에 딱 들어 온다. 토카이 와인이다. 필자는 스위트 와인은 토카이만 마신다. 나의 원픽인 셈이다. 


황금빛 액체를 글라스에 따르니 특유의 귀부 와인 향과 더불어 감미로운 꿀 내음이 온 방에 진동한다. 천상의 음료 토카이를 한 잔 마시니, 지난 10월 초순에 있었던 헝가리 와인 시음회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시음회는 경희궁 뒷편의 성곡미술관에서 진행됐다. 


주한 헝가리 대사관과 헝가리 국립은행(MNB)에서 헝가리 현대 추상 미술전을 후원했는데, 그 행사의 일환으로 한국에 수입된 헝가리 와인 시음회를 주최했던 것이다. 그 날 초청돼 참석했던 필자는 총 20여 가지의 최신 헝가리 와인들을 시음하고는 그야말로 ‘경악’했다. 


필자 기억에 헝가리 와인 시음회 참석이 거의 십 수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필자의 무관심과 게으름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와인 품질의 혁명적 도약을 일궈낸 신세대 헝가리 와인 생산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우리나라 와인 애호가들에게 다소 낯선 헝가리 와인에 대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에 펜을 들었다.

 

 

 

2000년 동안 면면히 흐른 헝가리 와인의 발자취


헝가리 와인의 역사는 고대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로마 제국의 속주인 판노니아(Pannonia, 현재의 발칸반도 북쪽의 동부 유럽 여러 나라를 포괄)에서는 로마 제국의 포도 재배 기술이 도입됐고, 유입된 헝가리 족의 그리스도교 귀화와 함께 와인산업은 서서히 발전할 수 있었다. 13세기 중엽 몽골족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멈추지 않았던 헝가리의 와인산업은 16세기 초, 오스만투르크 족의 침략으로 다시 어려움을 겪게 됐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였다. 역설적으로 이 시기 투르크와의 전투 과정에서 ‘에그리 비카베르(Egri Bikaver)’라는 와인 스토리가 탄생하게 됐고, 전쟁으로 인한 포도 수확의 어려움 속에 수확 시기를 놓쳐 곰팡이핀(귀부화된) 포도로 만든 ‘토카이’ 스위트 와인이 나타날 수 있었다. 


17세기 말 오스만투르크가 물러가고, 헝가리가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Habsburg) 왕가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면서, 포르투기저(Portuguiger) 등 독일계 포도 품종들이 유입되는 계기가 됐다. 합스부르크 통치 하에 헝가리가 위치한 트란실바니아 땅은 라코치 가문(Prince Rákóczi)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역대 군주(Prince)들은 토카이 와인을 외교에 곧잘 사용했다. 특히 페렌츠 라코치 2세(Ferenc Rákóczi II)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루이 14세에게 토카이 와인을 선물했는데, 토카이 와인의 달콤한 맛에 매료됐던 루이 14세와 루이 15세는 “Vinum Regum, Rex Vinorum(Wine of Kings, King of Wines)”이라는 멋진 말을 남기기도 했다.

 

19세기 말에는 전 유럽을 휩쓴 필록세라가 헝가리까지 도달하게 됐고 파괴된 포도밭을 재건할 때, 많은 프랑스 품종들이 대거 유입됐으니, 현재 헝가리 곳곳에 많은 국제적 품종들이 오래 전부터 재배되고 있는 이유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화된 헝가리 와인산업은 국유화 과정과 대량 생산 체제로 편입되면서, 생산자들은 고생했으며 와인 품질은 크게 훼손됐다. 그러나 1989년 소련 연방이 무너지고 1991년 헝가리에 민주주의가 찾아왔을 때, 헝가리는 다른 동부유럽 국가들보다 유리한 경제적 환경 하에 있었다. 공산당 통치하에서도 이미 어느 정도의 사유 제도가 가능했기에 사유화로 인한 대 혼동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20세기 후반기에 서구화 과정 속에서 비교적 빠르게 현대 와인산업에 적응할 수 있었다.

 

 

 

헝가리 국가와 와인산업


헝가리는 발칸 반도 북부에 위치한 동부 유럽 국가다. 면적은 9만 3000㎢로서 우리나라보다 약간 작다. 지도를 보면,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크로아티아 등 주변 8개국에 둘러싸여 있는 방주(배) 모양을 하고 있다. 지금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와도 동쪽으로 약간의 국경을 접하고 있다. 유럽의 젖줄 다뉴브 강이 수도 부더페슈트를 지나며, 국토를 남북으로 양분한다. 북부와 서부는 산지가 많고 남동부는 지평선이 보이는 광대한 헝가리 평야 지대를 형성한다. 대륙성 기후지만 전반적으로 기후가 온화하고 연 600㎜의 적은 강수량에, 국토의 25%가 구릉지대로서 포도 재배에는 매우 우호적인 자연 조건을 가지고 있다. 


헝가리의 포도밭 면적은 약 6만ha로서 유럽 8위며 보르도 와인 산지의 절반 정도 된다. 와인 생산량은 연 평균 2700만hL로서, 오스트리아, 그리스 보다 많이 생산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와인용으로 재배되는 포도 품종만 약 180여 종이 식재돼 있으며 귀한 토착 품종들도 많다. 


약 2/3는 청포도로서, 다수확종이며 재배가 용이한 비앙카(Bianca) 품종을 선두로, 체세기 퓌세레시(Cserszegi fűszeres), 올라스리즐링(Olaszrizling), 푸르민트(Furmint), 샤르도네 등이 있다. 적포도로는 1/3 이상을 차지하는 블라우프랑키시(Blaufränkisch) 품종을 필두로 까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츠바이겔트(Zweigelt), 까베르네 프랑, 피노 누아 등을 재배한다. 헝가리에는 22개의 세부 와인 생산 지역이 있다. 이 중에는 세계적 명성의 토카이(Tokaj) 귀부 와인 산지와 에게르(Eger) ‘황소의 피’ 와인 산지, 빌라니(Villány), 쇼프론(Sopron) 등이 손꼽힌다. 그러면, 헝가리의 대표 와인 지역 두 곳을 찾아가 보자. 

 

 

헝가리 와인의 이미지, 토카이 스위트


세계 최초의 귀부 스위트 와인 토카이는 단연 헝가리를 대표하는 독보적 와인이다. 토카이 와인의 세계로 들어서기 전에 먼저 발음은 같지만 철자가 다른 두 용어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먼저 ‘Tokaj’는 지역 이름이며, 뒤쪽에 형용사형 어미 ‘I’가 붙은 ‘Tokaji’는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뜻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유서 깊은 와인 생산지 토카이에 도착하면 다른 세계로 발을 내딛은 느낌을 받는다. 도시는 부다페스트에서 3시간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지만, 매우 외진 세계처럼 느껴진다. 바위에 힘들게 파놓은 깊은 터널과 주변의 작은 마을들, 수백 개의 사화산이 완벽한 이국적 풍경을 만든다. 1650년경 토카이 지역의 수도원 원장은 오스만투르크의 침략을 걱정하며 포도의 수확을 늦추도록 했는데, 늦수확이 포도송이에 귀부 현상을 가져와 이로 인해 높은 당도와 독특한 향과 맛을 내는 토카이 와인이 만들어졌다는 탄생 스토리가 있다.

 

과거 토카이는 황제와 왕, 귀족들만 마실 수 있는 매우 귀한 와인으로서 헝가리의 자랑거리였다. 일찍이 토카이 와인을 맛본 프랑스 루이 14세는 ‘왕들의 와인이며, 와인의 왕’이라는 최고의 헌사를 바쳤으며, 러시아 황제들은 이 진귀한 엑기스를 헝가리로부터 황궁의 셀러까지 안전하게 운송하기 위해 특별 코자크 기병대까지 뒀다고 전해진다. 이미 18세기 초반에 포도밭의 위치, 토양, 포도 품질에 따라 크뤼 등급을 나눴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와인의 품질과 명성에 신경을 써 왔다. 


화산토 경사지에 심어진 푸르민트와 하쉬레벨루 포도에 보드로그(Boderog) 강변에 형성된 짙은 안개로 인해 귀부 곰팡이 균이 퍼지면, 당도와 산도가 농축되고 복합미가 깃든 귀부 포도가 만들어진다. 수확된 귀부 포도는 별도의 통에서 압착해 귀부 원액 아쑤(Aszú)를 만들고, 이를 일반 신선한 포도즙에 섞어 농도와 잔당을 조절하는 방법으로 ‘Tokaji’ 와인 제품을 만들어왔다. 2013년 새 규정이 발효돼, 모든 Tokaji Aszú 와인은 최소 120g/L의 잔당 기준을 준수해야 한다. 헝가리산 오크통에서 최소 18개월의 숙성을 거치고 병입 후에도 1년의 추가 안정기를 거쳐 출시한다. 

 

 

스위트를 넘어 고품질 드라이 와인의 세계로


토카이 스위트 와인이 지난 400여 년의 헝가리 와인의 명성을 이끌었다면 21세기 헝가리 와인의 미래는 드라이 와인에 달려 있다. 설탕이 귀했던 시절에야 달큰한 스타일이 최고였을지 모르지만, 21세기는 다르다. 먼저 레드 와인으로 가장 명성을 얻고 있는 와인은 앞서 기록한 ‘에그리 비카베르’다. 부다페스트에서 북동쪽으로 150km 지점에 있는 에게르(Eger)라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이다. 흔히, ‘황소의 피(Bull's Blood)’라고 편히 불리지만, 현지인들은 헝가리어 표현 ‘Bikaver’를 선호한다.

 

이 이름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의 항쟁사와 깊은 연관이 있다. 1552년 헝가리 수비군은 전투력을 얻기 위해 현지 레드 와인을 많이 마셨고, 침입자들은 멀리서 이를 보고 ‘황소의 피’를 마신다고 믿었다. 붉은 피까지 마시며 날뛰는 헝가리 용사들을 보고는 투르크 병사들이 기겁을 하고 도망갔다는 재미있는 전설이다. 전투의 주인공은 헝가리의 전설적 영웅 이시트반 도보(Istvan Dobo)다. 그는 에게르의 와인으로 오스만을 물리치고 에게르를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마을의 한 복판, 옛 요새 자리 바로 곁에 있는 거대한 분수대의 청동상에는 투르크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 내용을 조각해 놓았다.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비카베르라고 불리는 와인은 19세기 초부터 존재해 왔다. 공산주의 하에서는 값싸고 촌스러운 레드 블렌딩 와인으로, 현재는 헝가리의 대표 레드 블렌드 와인으로 재탄생됐다. 이 와인은 켁프랑코시(Kekfrankos) 품종을 주종으로 해, 오포르토(Oporto), 까베르네, 메를로 등 13종 중에서 최소 3종을 블렌딩해 생산한다.   


한편, 화이트 와인 계열에서도 현재 헝가리의 신진 와인메이커들은 흥미로운 드라이 와인과 괜찮은 스파클링 와인을 선보이고 있다. 그중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차세대 대물, 짜릿한 드라이 화이트 와인 ‘Dry Furmint’다. 푸르민트 품종은 마치 Riesling처럼, 상쾌한 산도를 동반하며 Bone-Dry에서 Sweet까지 커버할 수 있다. 마치 Chardonnay처럼 고급 스파클링도 만들 수 있고, Chablis 같은 차갑고 가녀린 화이트에서부터 Bourgogne와 같이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구조감의 화이트까지 생산할 수 있다. 그러나 푸르민트에겐 무언가 더 특별한 것이 있다. 푸르민트 와인은 귀족적 자태에 더해 보헤미안적 야생 기질을 표현하는 듯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헝가리의 독특한 화산토 떼루아를 반영하는 비범한 능력을 들 수 있다.

 

헝가리의 푸르민트 재배 면적은 3700ha 이상으로 세계 최대다.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토카이 지역에 거의 대부분인 3500ha 이상이 식재돼 있고, 서부 발라톤(Balaton) 호수 북쪽 연안 숌로(Somlo) 지구의 화산토 지대에서 소량 재배된다. 토카이 지역에서도 전부터, 귀부 현상이 만족할 정도로 진행되지 않은 해에는 드라이 와인을 만들어왔지만, 처음부터 고품질 드라이 화이트 와인 생산 지향점을 두고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다음 페이지에서 테이스팅 후기를 보면 드라이 푸르민트의 놀라운 품질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품질과 개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헝가리 와인


헝가리 신세대 생산자들은 포도밭을 이해하는 것을 배우고 또 배우며, 억지로 쥐어짜낸 와인메이킹이 아니라, 균형있고 섬세하고 정교하게 와인을 만드는 법을 현장에서 배우고 터득하고 있다. 헝가리는 20세기 중후반의 소련 공산주의 치하에서 대량 생산 체제의 와인 생산을 해 왔으나, 현재는 고급 와인 생산을 위한 정도를 걷고 있다.

 

젊은 와인메이커들은 전 세계 생산지를 다니며 배우고 익혀서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창의적 철학과 생각으로 와인을 만든다. 헝가리 와인의 종류가 엄청나게 다양해졌으며 현대적 감각을 장착한 놀라운 품질 수준을 보인다. 음식과의 친화력이 뛰어나며, 고유한 떼루아를 잘 표현한 와인을 만든다. 많은 헝가리 와인들은 생산 지역에 얽힌 역사적 이야기와 비전을 담고 있어, 마케팅면에서도 장점을 갖는다. 헝가리 와인에 대한 서서히 국제적 인식도 바뀌고 있으며, 전 세계 와인숍의 선반에 레스토랑의 와인 리스트에 점점 더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제 헝가리는 ‘특별하고 훌륭한’ 와인을 골라야 할 때 떠오르는 1순위 국가가 될 것이다. 

 

Wine Regions of Hungary

1. Sopron 
2. Nagy-Somló 
3. Zala 
4. Balaton-felvidék 
5. Badacsony 
6. Balatonfüred-Csopak 
7. Balatonboglár 
8. Pannonhalma 
9. Mór 
10. Etyek-Buda 
11. Ászár-Neszmély 
12. Tolna 
13. Szekszárd 
14. Pécs 
15. Villány 
16. Hajós-Baja 
17. Kunság 
18. Csongrád 
19. Mátra 
20. Eger 
21. Bükk 
22. Tokaj-Hegyalja.

 

오로스라노스, 처크타이야, 푸르민트 Oroszlanos, CsakTallya, Tokaji, Furmint


오로스라노스 와이너리는 ‘사자들의 와인 셀러’라는 뜻으로 토카이 지역의 대표 생산자 중 하나다. 35ha의 밭에서 친환경 재배법으로 경작하고 있다. 푸르민트 품종은 헝가리 전 지역에 분포하며 특히 토카이 지역의 대표 품종으로 유명하다. 귀부 현상이 잘 일어나는 편이고 당도가 매우 높으며, 주석산의 함량이 특이하게 많다. 이런 포도 자체의 특성 덕분에 최고로 감미로운 스위트 와인과 최고로 날카로운 드라이 와인이 동시에 생산될 수 있는 다재다능한 품종이기도 하다. 스테인리스 탱크에서 발효했으며 오크통은 사용하지 않았다. 맑은 노랑색에 초록빛 뉘앙스가 예쁘게 박혀 있는 멋진 색상에, 상쾌한 라임과 민트 향이 첫 코의 감각을 시원하게 일깨워 준다. 


이어서 강한 미네랄 노트가 등장하는데, 구즈베리, 자몽, 청사과, 사프란, 카모마일 등 상쾌한 향이 주류를 이룬다. 강한 미네랄 풍미, 금속성 알싸한 향, 메탈 아로마, 비릿하지 않은 석유류 내음, 부싯돌, 신선한 풀내음, 생 아스파라거스 등 시원시원하고 깨끗하며 투명한 향은 어느 정도 알자스 리슬링을 연상시키나 더 우아하다. 입에서는 의외로 부드러운 당미의 오프 드라이 스타일인 듯 한데, 높은 산미가 균형감과 생동감을 준다. 산도는 매우 높고 강직하며 고결하다. 맛깔스런 산미다. 미네랄의 힘이 강해 점착력이 강하며 지속력과 피니시가 길다. 말미의 은은한 쓴맛도 고상하다. 중성적인 맛의 뉘앙스 속에 레몬, 라임즙을 입에 한 웅큼 물은 듯한 압도적 산미, 강력한 미네랄을 동반한 거부할 수 없는 마성의 산미다. 미디엄 라이트 보디의 무게감에 알코올은 11%vol로 낮은 편이다. 와인은 충분히 힘있게 느껴지는데, 그렇다면 이 힘은 알코올에서 온 것이 아니라 미네랄 충만한 산도에서 온 힘이겠다. 


핵폭탄급 강한 산도와 진하며 긴 피니시를 가진 참신한 스타일의 토카이 드라이 화이트다. 필자가 본문에서 언급한 최신 헝가리 와인의 경향을 그대로 반영한 훌륭한 와인이다. 토카이의 화산토질과 서늘한 기후 조건, 저수확 농법과 깔끔한 현대적 양조 기술이 낳은 개가다. 필자의 느낌에 푸르민트 드라이는 알자스 리슬링과 루아르 소비뇽 블랑 와인을 합한 듯한 스타일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짭쪼름한 바닷내음이 가득한 해초류 음식이나 생굴, 각종 조개구이, 킹크랩, 대게 등 갑각류 구이 등과 기막힌 조화를 이루겠다. Price_ 약 15유로(미수입 와인)

 

훔멜, 카라시카, 펫낫 Hummel, Karasica Pét-Nat


2020년대 와인업계의 가장 뜨거운 화두는 ‘펫낫(Pét-Nat)’과 ‘내추럴(Natural)’이다. 이 중 펫낫은 1990년대 프랑스 루아르 밸리에서 시작된 새로운 경향으로, 옛스런(Ancestral) 생산법으로 만든 스파클링 와인을 말한다. ‘내추럴’ 와인 운동의 연장선 상에서 스파클링 와인도 최소한의 개입으로 생산해보자는 것이다. 철사줄로 동여맨 전통적 둥근 코르크가 아니라, 맥주 병처럼 ‘크라운캡’으로 봉입하는 것도 특별하며, 레이블도 이름도 모두 펑키하다. Funky Name, Funky Lable, Funky Taste, Funky Closure~! 생산자 훔멜 와이너리는 1998년 베를린 출신 변호사 호르스트 훔멜(Horst Hummel)이 설립했다. 와인에 대한 영감을 찾아 유럽 전역을 여행하다가 헝가리 빌라니 지역의 떼루아에 깊이 빠져들게 됐다.

 

8ha의 포도밭은 유기농법과 바이오 다이내믹 농법으로 가꾸며, 토양의 생명력을 살리고 표현하는 내추럴 양조 철학을 견지한다. 이 와인의 이름은 빌라니 지역을 가로질러 흐르는 아름답고 깨끗한 작은 강 ‘카라시챠(Karashitsa)’에서 따왔다. 병에 전사된 꿀벌 그림은 생산자가 직접 그리며, 매년 새롭게 그려서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필자가 시음한 2020 펫낫 와인은 훔멜사가 빌라니(Villany) 지역에서 생산한 와인으로, 토착 품종인 하쉬레벨류(Hárslevelű) 품종으로 만들었다. 껍질이 얇고 부드러워 껍질 침용하는 오렌지 기법에 적절한 품종이다.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발효를 시작해 개방형 탱크에서 5일 간의 추가적 자연 발효를 거쳐 30일 후 병입했다. 병 속에서 이어진 발효를 통해 발생한 탄산가스 덕분에 자연스러운 발포성을 갖게 되며, 고유한 효모 내음과 크림성 질감을 느낄 수 있다. 부드러운 볏짚색에 신선한 사과와 잘익은 배, 은은한 꽃향기와 새큼한 살구 요거트의 맛을 가졌다. 미감에서는 오프 드라이의 부드러운 당미와 칼칼한 내추럴 산미를 가진 매력적인 입맛을 선사한다.

 

껍질 침용에 따른 타닌감과 부드러운 발포성 속에, 구수한 헤이즐넛 풍미와 황홀한 멘홀 내음이 피니시를 장식한다. 낮은 온도에서 마실 것이며, 탄산이 빠지고 난 후에도 며칠에 걸쳐 오렌지 와인처럼 즐길 수 있다. 침전물이 많으니 막잔을 조심하며, 통곡물 빵이나 견과류를 안주 삼아 흥미롭게 마셔 보자. Price_ 9만 원대

 

 

크리스티누스, 홀리스틱, 까베르네 프랑 kristinus, Holistic, Cabernet Franc


발라톤 호수는 헝가리 서부에 위치한 담수호다. 길이 77km, 면적 600㎢로 서울시 크기와 비슷한 중부 유럽 최대 호수다. 바다가 없는 내륙국 헝가리의 바다다. 호수 남쪽에 있는 발라톤보글라(Balatonboglár) 지역은 크고 작은 화산 언덕으로 이루어진 구릉지대로서 풍화된 현무암질 토질 덕분에 정갈한 미네랄 특성이 배인 와인을 생산한다. 이 지역의 신세대 양조장 크리스티누스는 세 명의 젊은 와인메이커가 운영하는 역동적인 와이너리다. 2009년 설립 이후 점진적으로 바이오 다이내믹 농법을 2018년에는 모든 밭에 적용하고 ‘Demeter’ 인증을 받았다. 그는 균형잡힌 생물 생태계 속에서 자란 건강한 포도나무로부터 강한 생명력을 전달 받은 와인이 생산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만든 홀리스틱 까베르네 프랑 와인은 이번 시음회에서 가장 주목받은 와인 중 하나였다. 사실 까베르네 프랑은 ‘까베르네’라는 이름이 갖고 있는 귀족성에 비해 매우 저평가 받고 있는 대표적 고급 품종 중 하나다. 보르도에서 일부 극소수 양조장을 빼고는, 보통 생략되거나 소량만 블렌딩되며, 이런 상황은 뉴월드 국가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역 만리 떨어진 동구권의 와인 산지에서 혁혁한 무공을 쌓고 있으니, 이 ‘헝가리언 까베르네 프랑’은 만들어지는 와인마다 개성과 품질이 뛰어나다. 


특히 필자가 시음한 크리스티누스의 까베르네 프랑은 발효 후 350L들이 세라믹 암포라에서 12개월간 숙성시켜 원시적 정기와 생명력을 키웠다. 여과 과정없이 병입됐는데, 2018년 빈티지는 1500여 병만 입병됐다. 내추럴 와인이며 비건 인증을 획득한 와인으로, 매우 고유한 개성을 지닌 놀라운 와인이었다. 맑고 적절한 심도를 갖춘 루비 색상으로, 피노 누아를 연상케 하나 약간 더 깊은 색감이 깃들어 있다. 첫 코에 우아하고 세련된 내추럴 풍미, 은은한 멘홀취, 암모니아, 두엄, 마구간, 농장 내음 등 이 모든 것이 우아하게 최소화돼 등장한다. 진솔한 내추럴 와인의 산뜻한 높은 산미에 실키~벨벳 촉감의 앙증맞은 타닌감에 작지만 확실히 섬세한 수렴성이 느껴지는 예민한 질감을 선사한다.

 

입술에 맺히는 뽀득한 타닌감에 기분이 좋아질 무렵, 거의 마지막 맛에서 살짝 쓴 여운과 함께 까베르네 프랑의 DNA 피망 내음이 연하게 드러난다. 알코올은 13%vol이며, 레이블에는 발라톤 호수의 실루엣을 그려 놓았고, 독특한 병 모양은 2차 대전 시기 서유럽 전장에서 사용한 망치형 수류탄을 닮았는데, 눈에 쏙 박혀 잊혀지지 않는다. Price_ 8만 원대

 

 

 

켁제 앤 하디, 조피아 Kecze & Hady, Zsofia Cuvée

 

졸탄 켁제(Zoltán Kecze)는 독일에서 15년간 엔지니어로 일했다. 2002년 가족의 취미 생활로 첫 번째 와인을 생산한 것이 발전해, 가족의 열정을 온전히 와인에 쏟아 붓게 됐다. 발라톤 호수 상류 지역의 200년 된 와인 셀러 인수를 시작으로 점차 와인 생산을 넓혀 나간 그들은 현재 총 4ha에 달하는 3개의 밭을 소유하고 있다. 인자한 할아버지 얼굴이 들어있는 와이너리의 로고는 바쿠스가 아니라 ‘포도밭의 성인 세인트 오르반(St. Orban)’으로서, 그가 이 와이너리를 지켜준다고 믿고 있다.

 

이들의 와인에는 가족 모두의 캐릭터가 녹아 들어 있다. 딸과 아들의 이름을 따서 만든 와인과 아내가 가장 사랑하는 와인을 소개하며, 이들은 자신의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 모두가 켁제 가족의 일원이 된 느낌을 받기를 원한다고 했다. 필자가 시음한 와인도, 어린 딸이 직접 그린 ‘웃고 있는 꽃’ 그림이 있는 레이블이었다. 이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이 이 꽃들처럼 평화롭게 웃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렸다고 한다. 사랑스런 마음이 담긴 따뜻한 와인이다. 이 딸의 이름을 딴 ‘조피아’는 까베르네 프랑, 까베르네 소비뇽, 포르투기저 품종을 블렌딩해 배양 효모, 첨가제, 보존재 등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3년 이상 오크조에서 발효시켜 만든 순수 내추럴 와인이다. 


진한 흑적색의 농축미가 느껴지는 레드 색상에, 오크목에서 추출된 유제놀 성분으로 인한 매콤하고 알싸한 정향의 향이 강하게 깃든 토스트, 스모키 뉘앙스가 첫 코를 자극한다. 연이어 추출된 바닐린에서 유래한 감미로운 바닐라, 연유의 락톤 풍미가 첫 자극을 세련되게 매만져주며 향긋하고도 고급스러운 첫 부께를 구현한다. 이어 내추럴 와인의 특징인 동물향과 퇴색된 산화미가 등장하며, 초기의 달콤한 연유와 정향 풍미와 추가적인 복합미를 이뤄낸다. 한 모금 머금으니, 엄청나게 농축된 보디와 견고한 구조, 미려한 타닌감이 연기에 그을린 코코넛 풍미, 감미로운 스모키 풍미와 함께 오버랩되며 피니시를 마감한다. 향과 맛, 질감에서 각각 강력한 대조가 느껴지는 화려하고 진하고 멋있는 탐미적(Hedonistic) 와인이다! 
드라이 에이징된 두툼한 한우 티본 스테이크가 생각났다.

Price_ 9만 원대

 

 

 

사진 제공_ 칠락와인(T. 02-6956-2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