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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8 (목)

정승호

[정승호의 Tea Master 43] 티의 해상운송 역사를 뒤바꾼 수에즈운하

 

최근 대만 해운사의 컨테이너선 에버그린호가 수에즈운하를 가로막아 세계 해상무역 물동량의 14%, 해상운송 원유의 10%가 일시에 멈춰 버렸다. 이 운하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인공 바닷길로서 티의 운송 시간을 대폭 단축시켜 19세기까지 흥성하던 티(또는 실크)의 해상무역로인 ‘일로(一路)’와 운송 선박인 쾌속범선을 사라지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19세기 영국의 티 해상운송사와 20세기 초 수에즈운하의 개통으로 야기된 티 무역의 변화상에 대해 살펴본다.

 

사진 출처_ 한국티소믈리에연구원

 

 

영국의 티 운송선, 티클리퍼(Tea Clipper)의 시대


19세기 영국은 ‘홍차 문화의 황금기’를 맞았다. 이로 인해 홍차의 대중화와 함께 해상무역도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결국 영국은 지난 200년간 타국적 선박의 입항을 금지하는 조례를 1849년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무역도 자유화되면서 티 무역도 활기를 띠고 운송 경쟁에 불이 붙었다.


그동안 동인도회사가 티 무역을 독점하던 시기에는 중국에서 티가 영국 런던으로 운송되는 시간이 무려 2년이나 걸렸지만, 미국 등 타국적의 새로운 쾌속범선인 ‘티 클리퍼(Tea Clipper)’들이 최고 시속 28km로 운항해 런던으로 입항하면서 운송 시간도 약 97일밖에 걸리지 않게 된 것이다.


당시 영국인들은 티의 운송 시간이 단축된 결과, 새롭고도 신선한 티의 참맛을 느끼게 되면서 티 클리퍼의 운송에도 본격적으로 경쟁의 바람이 붙었다. 런던의 항구에 가장 먼저 입항하는 티 클리퍼에 내기를 걸거나 최초로 입항한 신선한 홍차들을 티 도매상들이 웃돈을 주고 먼저 구입하려는 치열한 경쟁이 붙은 것이다. 또한 런던 템즈강의 유역에는 각종 찻집들이 들어서고, 선술집 등에서는 티 클리퍼의 경주를 놓고 도박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당시 티 클리퍼는 중국 푸저우 등의 항구에서 출발, 인도네시아를 경유해 머나먼 아프리카대륙의 희망봉을 돌아서 영국 런던의 템즈강으로 항해했다. 소위 중국 티(또는 실크)의 고대 무역로인 ‘일대일로(一對一路)’ 중 해상무역로인 ‘일로(一路)’를 통해 티를 운송했던 것이다.

 

 

 

 

새로운 동력원의 선박, 증기선의 등장


한편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는 증기기관이 발명 및 개량되면서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이와 함께 영국의 발명가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가 1776년 그 증기기관의 효율을 월등히 높인 것을 결정적인 계기로 증기기관을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선박 등의 운송 수단에서도 획기적인 발전이 일어났는데, 이렇게 등장한 선박이 ‘증기선’이다.


이 증기선은 초창기에는 강철로 제작돼 선박이 무거울 뿐만 아니라 막대한 돈까지 들여 석탄을 구입 및 사용해야 하는 등의 문제로 자연의 공짜 바람을 이용하는 쾌속범선에 비해 운송 수단으로서의 매력과 호감이 그리 높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숙련된 선원들의 기술보다 기계로 작동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는 강한 거부감도 한몫했다.


그러나 쾌속범선은 자연의 바람을 이용하기 때문에 풍향과 풍속, 그리고 일기에 따라 운송 속도에 편차가 크고, 또한 물살을 거슬러 오르거나 바람이 없는 곳에서는 운항이 어렵거나 운항 자체가 안 되는 등 큰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반면 증기기관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열효율이 점차 향상되면서 새로운 동력원으로 급부상해 자연히 증기선도 티의 새로운 해상운송 수단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수에즈운하의 개통으로 변화된, 티의 ‘해상운송로’와 ‘운송 수단’


최근 대만 해운사의 컨테이너선인 에버그린호가 수로를 가로막으면서 세계의 해상 물동량과 원유의 해상운송에 막대한 차질을 빚은 수에즈운하. 이 수에즈운하는 이집트의 시나이반도 서쪽에 위치하며, 인도양, 홍해, 지중해를 해상으로 연결하는 길이 193km의 인공 바닷길이다. 국제수로기구(IHO)에서는 이 수에즈운하를 인도양 일부로 분류한다. 수에즈운하의 건설에 관한 최초의 시도는 기원전 2세기경 고대 이집트 제12왕조의 세누스레트 3세(Senusret III : 재위 B.C. 1878~B.C.1839)의 치세기까기 거슬러 올라가며, 그동안 역사상 수많은 군주들이 건설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세기인 1869년 11월 17일 마침내 그 역사적인 개통식이 이뤄진 것이다.


수에즈운하는 개통 당시에 운하의 단면이 수심 7.9m, 저부의 너비 22m, 수면의 너비 60∼100m였지만, 1964년부터 확장 공사를 계속해 지금은 수심 22m, 수면 너비가 205m~318m에 달한다.


그런데 이 수에즈운하가 개통되면서 19세기 당시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던 운송 수단인 티 클리퍼가 역사상으로 사라지게 됐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항로 길이(운송 시간)의 단축이었다. 기존의 해상운송로였던 일로(一路)는 인도에서 출발해 인도양, 아프리카 희망봉을 지나 대서양을 통해 영국 런던의 템즈강으로 가는 경로였다. 그 항로 길이만 2만km가 넘었다. 반면 수에즈운하를 지나면 동일하게 출발해 영국 런던의 템즈강까지 가는 항로 길이가 일로(一路)의 절반인 약 1만km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이로 인해 기존의 해상운송로인 ‘일로(一路)’는 그 실용성이 사라지면서 티의 해상 운송 역사에서도 자취를 감추게 됐다.


두 번째로 수에즈운하는 시나이반도 서부 내륙을 관통하기 때문에 대양에서처럼 큰 바람이 없어 범선은 운항하지 못하고, 오로지 자체 동력원을 지닌 증기선만이 지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두 요인으로 인해 신선하고도 훌륭한 향미의 티를 하루속히 맛보려는 영국인들은 점차 수에즈운하로 티를 운송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쾌속범선들은 설 자리를 잃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수에즈운하의 사고로 티 무역로인 ‘일대일로’의 재등장

 


한편 이번 수에즈운하의 사고는 이집트에는 한화로 수 조원대의 피해를 안겼을 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에도 큰 타격을 준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이를 빌미로 중국에서는 고대의 옛 티(또는 실크) 운송로를 벤치마킹해 오늘날 중화민족의 기세를 다시 떨치려는 국제정치적 승부사인 ‘신일대일로(新一帶一路)’의 부활을 주장하고 나선 것으로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신일대일로는 중국 시진핑 주석이 중국의 경제적인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추진하는 핵심 정책이기도 하다. 여기에 뒤질세라 일명 ‘북극곰’이라는 별명을 지닌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북극해 항로’를 새롭게 조명하고 개척해야 한다는 주장에 나섰다. 북극해 항로는 유럽과 아시아 태평양을 연결하는 가장 짧은 항로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수에즈운하의 운영에 치명상이 생기자 러시아, 중국과 같은 열강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새로운 항로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열강들의 그와 같은 배경에는 항로가 바뀌면 선박들이 목적지로 가는 도중에 잠시 들르는 기항지(寄港地)들이 바뀌면서 지역 경제의 흥망성쇠가 달라지고, 자국에게 유리한 지역에 경제를 부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열강들이 적극적으로 국제 정치적으로 역량을 펼치는 것은 그만큼 수에즈운하는 티뿐만 아니라 세계 해상 물량의 운송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하고 큰 역할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사실의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

 

 

 

 

 

 

 

 

 

 

 

 

 

 

 

 

정승호 
한국 티소믈리에 연구원 원장
국내 최초의 티(TEA) 전문가 양성 교육기관 및 연구 기관인 한국 티소믈리에 연구원장으로 글로벌 시대에 맞게 외식 음료 산업의 티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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