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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호

[정승호의 Tea Master 42] 인물로 둘러보는 홍차산업의 근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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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물 다음으로 많이 마시는 음료인티. 그 티 중에서도 전 세계에서 가장 소비가 많은 것이 홍차다. 홍차는 오늘날 동서양을 불문하고 건강 트렌드와 맞물려 밀레니엄을 세대를 중심으로 열풍이 불면서 미래의 트렌드가 됐다. 이번 호에서는 홍차의 확산에 획기적인 위업을 이룬 중요 인물들을 통해 근대 홍차 산업의 역사를 살펴보려 한다.
사진 출처_ 한국티소믈리에연구원

 

 

영국식 홍차의 대중화 ‘토머스 트와이닝’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홍차 문화의 기반은 ‘영국식 홍차(British Style Tea)’다. 영국에서 상류 계층이 즐기던 음료인 영국식 홍차를 대량 수입 및 상품화를 통해 대중적인 음료로 유통시킨 주인공이 바로 토머스 트와이닝(Tomas Twinning, 1675~1741)이다. 토머스는 동인도회사에 잠시 근무한 뒤 18세기 당시 영국에서 수입 열풍이 불었던 티에 주목해, ‘톰의 커피하우스(Tom’s Coffee House)’의 개장을 시작으로 트와이닝 브랜드의 역사를 열었다. 그 뒤 토머스의 2세인 대니얼 트와이닝이 선친의 사업을 이어받고 얼마 뒤 당시 영국의 시대적 사조인 금주운동이 펼쳐지면서 홍차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했다. 이로부터 영국식 홍차가 맥주인 에일과 독한 술인 진을 대신해 영국의 국민 음료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트와이닝 일가는 이후 대를 이어가며 가업을 세계적인 홍차 브랜드로 성장시키기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영국의 티 산지를 개척시킨 ‘임칙서’
영국은 홍차의 국내 소비가 확산되자 중국에서 막대한 양의 티를 수입해 홍차를 대중화시키는 찬란한 빛도 있었지만, 반면 어둠도 있었다. 바로 대중국 무역에서는 막대한 적자를 기록한 것이다. 영국은 당시 재정적자를 만회할 방편으로 교환물품을 찾았고, 그 물품이 바로 아편이었다. 영국은 인도산의 값싼 아편을 구해 중국 청나라에 판매하고, 그 대금으로 다시 티를 수입했다. 일례로 1834년에는 연간 1만 6000상자, 1839년에는 4만 상자까지 아편을 청나라에 수출해 청나라는 만성 재정적자에 시달렸을 뿐만 아니라 국민 건강에도 큰 위협이 초래됐다. 이러한 상황이 이르자 1839년 황제, 도광제(道光帝, 1782~1850)가 아편 금지령을 내림과 동시에 임칙서(林則徐, 1785~1850)를 흠차대신(欽差大臣)에 임명해 관리 감독을 강화했다. 임칙서는 당시 아편에 대해 무관용적으로 대처하고 영국 상인의 뇌물을 통한 회유와 부패를 척결함과 동시에 광둥성 광저우(廣州)에서 영국의 아편을 전량 몰수해 소각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영국은 청나라를 상대로 두 차례의 아편전쟁을 벌였고, 그 결과 청나라가 패전하면서 난징조약(南京條約)이 체결됐다. 이로 인해 영국은 홍콩을 할양받고, 광저우, 샤먼, 닝보, 푸저우, 상하이의 5개 항구도 강제로 개항시켜 무역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한편, 이 사건으로 영국은 홍차를 포함해 티의 수입에 대한 대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인도, 스리랑카를 비롯해 아프리카 대륙 여러 나라 등 새로운 티 산지를 개척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임칙서의 청렴하고도 부패에 대항하는 무관용의 태도로 촉발된 아편전쟁은 영국이 새로운 티 산지를 개척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아삼 홍차의 시작은 ‘로버트, 찰스 브루스’ 형제로부터
이와 같은 배경으로 19세기 영국은 인도, 스리랑카 등 식민지에서 새로운 티 산지를 개척하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인도에서 새로운 종의 차나무를 발견한 사람이 있었다. 1820년 인도 무굴제국에 파견된 영국의 해군 소령인 로버트 부르스(Robert Bruce)였다.

 

 

 

 

로버트는 1823년 오늘날 시바사가르(Sibasagar)에서 싱포족(Singhpo)의 족장인 비사 가움(Bisa Gaum)과 만나 차나무의 존재에 대해 전해 듣고 향후 종자와 묘목을 받기로 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이후 로버트의 동생인 찰스 부르스(Charles Bruce)가 형으로부터 전해 들은 내용을 기억한 뒤 싱포족으로부터 차나무의 종자와 묘목을 전달받고 아삼주 정원에 심었다. 찰스는 아삼주에 남아 이 나무가 차나무일 것으로 확신하고 본격적으로 재배, 1839년 캘커타의 티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차나무임을 인정받았다. 이것이 바로 중국의 시넨시스종(일명 중국종)에 대응하는 아사미카종(일명 아삼종)의 차나무로서 인도, 스리랑카, 아프리카의 케냐 등 전 세계에서 재배돼 오늘날 인스턴트 형태의 영국식 홍차, CTC 아삼 홍차 및 티백, 밀크티의 원천이 됐다.

 

다르질링 홍차의 시작은 ‘아치볼드 캠벨’로부터
한편 영국은 19세기 중국에서 밀반출한 차나무의 묘목과 종자를 식민지인 인도에서 재배하려는 노력들도 기울였다. 중국종의 종자들을 인도 캘커타로 보내 아삼, 닐기리 등 인도 각지에서 재배가 이뤄졌는데, 대부분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해발고도 2000m 이상인 히말라야 산지의 다르질링에서 차나무의 재배에 최초로 성공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아치볼드 캠벨(Archibald Campbell) 박사였다. 아치볼드 캠벨 박사는 다르질링 지역에서 중국종의 차나무를 재배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결과, 오늘날의 ‘세계 3대 홍차’로 평가되는 다르질링 티가 탄생했다.

 

플랜트 헌터, ‘로버트 포춘’의 맹활약
또한 영국은 19세기에 동인도회사를 중심으로 차나무의 밀수입에 열을 올렸는데, 당시 플랜트 헌터를 모집, 세계 각지에서 고급 작물이 될 만한 식물을 채집하는 일도 진행했다. 이 당시 스코틀랜드의 식물학자인 로버트 포춘(Robert Fortune)이 플랜터 헌터 공모에 응모하자, 플랜터 헌터로서의 경력이 일천해 떨어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로 따지면 공공업체 공채 시험에 떨어진 셈이다. 그 뒤 로버트는 1850년부터 무려 51년에 걸쳐 중국에 잠입해 우이산까지 차나무의 탐사를 진행하고 그 지역의 재배 현황을 조사하는 등 중국 현지의 풍부한 지식을 섭렵한 뒤 산업스파이로서, 플랜트 헌터로서 동인도회사에 소속돼 우이산 일대로부터 묘목과 종자를 밀반출해 캘커타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하기에 이른다. 또한 묘목으로부터 영양생식을 통해 번식한 1만 그루가 넘는 차나무를, 캠벨 박사가 개척한 재배지인 히라말야 산지의 다르질링 지역으로 옮겨 심는 작업도 진행했다. 다르질링에는 백수십여 개의 다원이 존재했고, 오늘날에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다원 87개가 지리적표시제로 보호를 받으면서 다르질링 티
를 생산하고 있다.

 

 

 

실론 티의 선구자, ‘제임스 테일러’
한편, 인도와 마찬가지로 스리랑카(당시 국명 실론)도 19세기에는 영국의 식민지였다. 그런데 스리랑카에서 차나무가 재배된 것은 인도의 경우와는 완전히 달랐다. 스리랑카에서는 오래전부터 커피농장이 발달했고, 전체 산업에서도 커피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았다. 그런데 1860년경 지독한 녹병이 돌면서 커피농장이 초토화돼 새로운 재배 작물을 찾아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됐다. 이때 당시 커피농장의 재배 전문가였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제임스 테일러(James Taylor)가 1867년 아삼종의 묘목을 룰레콘데라(Loolecondera) 산악지로 옮겨 재배에 나서 불과 2년 만에 재배에 성공했다. 인도에서 영국인들이 15년간 겪었던 재배의 실패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단기간에 성공한 것이다. 그 뒤 스리랑카에서는 커피농장을 대신해 다원이 대규모로 들어서면서 오늘날 스리랑카는 세계 3대 홍차인 우바(UVA)를 포함해 세계적인 품질의 홍차를 생산하는 대국이 됐다.

 

 

 

 

홍차의 유통 대왕, ‘토머스 립톤’
이와 같은 배경으로 19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인도와 스리랑카산 홍차가 중국산 홍차의 수입량을 상회하면서 홍차의 수요가 급속히 늘어나 일반 대중들에게는 이제 없어서는 안 될 기호 음료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1880년 훗날 ‘세계 홍차 유통의 왕’이라는 토머스 립톤(Thomas Lipton, 1850~1931)이 홍차 도매업에 뛰어들었다. ‘생산물은 생산자로부터 직접 구입한다’, ‘사업 자본은 체력과 광고’라는 슬로건을 내걸며 홍차 유통 시장에 일대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홍차의 판매 방식도 파운드 단위의 무게로 판매하지 않고 소량 포장 형식으로 다량 판매하는 형식을 채택, 소비자로부터 구매력을 높이고, 또한 디자인에도 각별히 신경을 쓰면서 홍차는 더 이상 옛 재래식 식품이 아니라 모던한 개념의 신제품으로 태어났다. 또한 립톤은 스리랑카의 우바 지역의 다원들을 매입해 립톤 다원을 1890년 조성하고 최고 품질, 고부가가치의 홍차 생산에 길을 열었다.

 

티백으로 대표되는 홍차의 선구자, ‘토머스 설리번’
티백(Tea Bag)은 오늘날 미국과 영국에서 소비되는 홍차의 약 90% 이상일 정도로 그 소비량이 많다. 이는 전 세계 홍차 소비시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간편하면서도 매우 다양한 디자인, 그리고 훌륭한 침출성으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고있는 것이다. 이 티백은 1904년 미국의 티 상인 토머스 설리번(Thomas Sullivan)에 의해 우연히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개발됐다. 당시 토머스는 찻잎을 비단주머니에 넣어 소매상인들에게 샘플로 배송했다. 그런데 소매상인들은 찻잎을 꺼내 우리는 것이 아니라 비단주머니를 통째로 넣고 우려내는 실수 아닌 실수로 하게 됐고, 그 편리성으로 인해 큰 인기를 끌면서 오늘날과 같은 티백으로 상품화된 것이다. 이후 티백은 밀봉 소재가 비단주머니에서 거즈, 종이, 부직포, 나일론 그물망으로 다양한 형태로 변화했고, 침출성이 좋게 디자인도 더해져 오늘날에는 홍차를 즐기는 가장 대중화된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인도 홍차 시음 권하다 아이스티 착안한 ‘리처드 블렌친든’
오늘날 미국에서는 대부분의 홍차가 아이스티로 소비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소비량이 특히 많다. 또한 배리에이션을 통해 매우 다양한 내용물로 상품들이 판매되고 있다. 그런데 미국에서 발명된 이 아이스티는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인이 착안한 상품이었다.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세계박람회가 열린 상황에서 영국의 티 상인 리처드 블렌친든(Richard Blechynden)이 발명한 것이다.
당시 리처드는 박람회 부스에서 지나가는 손님들에게 인도 홍차(핫티)의 시음을 권하면서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지만 아무도 여름철에 뜨거운 홍차를 마시려고 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리처드는 뜨거운 홍차 속에 얼음을 넣어서 아이스티로 시음을 권하자 무더위에 지쳤던 사람들이 시음에 응하면서 그 인기가 폭발했다. 이것이 아이스티의 첫 등장이었다.
오늘날 아이스티는 녹차, 홍차, 백차 등 다양한 티의 종류와 각종 과일류, 시럽류와 함께 블렌딩돼 세계에서도 가장 인기가 높은 티 음료에 속하고 있다.

 

홍차의 대량 생산 시대를 연 ‘윌리엄 매커처’ 경
홍차의 가공 방식에는 크게 사람들의 손길이 많은 오서독스 방식과 기계에 의한 CTC 방식이 있다. 특히 이중 CTC 방식이 등장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티백 홍차의 대량 소비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CTC 방식을 처음 개발한 사람은 윌리엄 매커처 경(Sir. William Mckercher)이었다. 윌리엄은 1930년 인도 북부에서 찻잎을 기계를 통해 부수기(Crush), 찢기(Tear), 휘말기(Curl)작업을 단번에 진행해 산화도가 100%인 홍차의 산화 시간을 대폭적으로 단축시켜 티백 홍차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이 CTC 방식은 오늘날 아삼, 케냐, 스리랑카 등 세계 홍차 생산 대국에서 대부분 채택하고 있는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정승호 
한국 티소믈리에 연구원 원장
국내 최초의 티(TEA) 전문가 양성 교육기관 및 연구 기관인 한국 티소믈리에 연구원장으로 글로벌 시대에 맞게 외식 음료 산업의 티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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