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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5 (월)

레스토랑&컬리너리

[The Chef_ 서승호 편] 음식은 眞心. 서승호의 진심을 담다.

100% 예약제 레스토랑 라미띠에, 원 테이블 레스토랑 서승호 레스토랑, 디저트 마카롱 전문점 데쎄르... 이들의 공통점은 국내 최초로 시도된 콘셉트에 있다. 누구나 두려워하는 처음을, 그 어려운 것을 해내고야 만 서승호 셰프이다. 오롯이 재능기부로 G20의 만찬 행사의 일부인 코시어 서밋을 성공시켰고 SK나눔재단이 운영하는 뉴스쿨의 전신, SK해피스쿨의 초대 교장으로 부임해 획기적이고 파격적인 교육 시스템을 도입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누구도 시도해보지 못한 원 테이블 레스토랑을 성공시켰다. ‘최초의, 최고의’라는 수식어가 꼬리표처럼 따라 붙을 정도로 잘나가던 스타 셰프가 4년 전, 이 모두를 내려놓고 원 테이블 레스토랑 서승호와 함께 세종시 조치원에 새 둥지를 틀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섭골농원, 레스토랑 시옷, 세종식문화연구원이 한 울타리 안에서 셰프 서승호의 완전체를 만들었다. 이번엔 팜 테이블이다. 도대체 이 사람, 정체가 뭘까.



<정원을 앞에두고 원테이블 레스토랑 서승호가 있고 왼쪽으로 와인색 건물 비스트로 시옷, 세종식문화연구원이 연결돼 있다. 건물 주변 밭고랑을 따라가다보면 뒷 편에 섭골농원이 자리잡고 있다.>


서울에서 차로 1시간 반을 달려 도착했다. 산을 병풍처럼 두른 마을 초입에 들어서자 내비게이션은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일러주는데 도무지 간판을 찾을 수 없는 건물 두 채가 ‘나 여기 있소.’ 사인을 주는 것 같아 이끌리듯 들어갔다. 넝쿨진 입구를 따라 정원에는 울릉도 백리향과 올망졸망 꽃망울을 움튼 카모마일이 손을 뻗어 진한 향기를 전한다. 잘 가꾸어진 조경수 사이로 한가로이 풀을 뜯는 토끼가 한눈에 들어올 즈음... 찾았다! 저수지를 마주하고 사이좋게 서 있는 비스트로 레스토랑 시옷 그리고 서승호 레스토랑이다. 처음 찾는 이들은 생소하게 느껴질 법도 한 간판 하나 없는 나지막한 이 현대식 건물을 두고 과연 레스토랑이라 생각할까? 올해는 건물을 빙 둘러 밭고랑을 따라 명이나물을 만 포기나 싶었단다. 막 꿀 수확을 마친 벌집도 앞마당에 한 자리 잡았다. 아스파라거스 잎이 심심찮게 보이는 밭고랑을 따라 가다보면 구절초, 인삼, 우엉, 명이나물 등이 심어져 있는 각종 작물의 배양소-섭골농원을 만날 수 있다. 괭이와 삽이 비스듬히 세워져 있는 아담한 하우스 텃밭에는 수고한 이들의 땀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서승호 셰프, 흙을 만져 우엉을 보듬는 손길이 아기 다루듯 애정이 넘치는데 그가 만드는 음식은 오죽할까.


“나의 요리와 성공은 내가 열심히 해서 얻은 노력의 산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손 내림 없이 지금의 내가 있었을까. 배움과 노력이 표현을 근사하게 만들긴 했지만 그 핵심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으며, 요리를 시작했기에 발견된 재능이었음을 깨닫는다. 기술은 어느 경지에 이르면 오르는데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선천적으로 타고 난 끼를 무시할 수 없으며 요리 스킬에는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이 함께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예끼! 남자는 주방에 얼씬도 말어~!
요리사가 되고 싶었지만 집안의 반대가 너무 심했다. 고향, 조치원의 시골 마을에서는 어른들이 으레 그래왔듯, 남자가 요리하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당시 요리사라고 하면 중국집, 냉면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생각했기 때문에 남 몰래 냉면집에서 냉면 기술도 배우고 청주를 오가며 레스토랑 주방에서 차곡차곡 꿈을 키웠다. 경주호텔학교의 입학시험을 세 번이나 치렀다. 집안의 반대가 완강해 등록도 하지 못하고 시험만 치르다보니 벌써 세 번째. 하지만 입학자격에 나이 제한이 있던 터라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릴 수 없었고 결국 25살의 나이로 막차에 올라 그 해 나이가 가장 많은 신입생이 됐다.


경주호텔학교-조선호텔-르 꼬르동 블루
당시 엘리트 코스로 불리던 경주호텔학교를 졸업하고 조선호텔에 입사했다. 안정된 미래가 보장돼 있었지만 돌연 프랑스행을 택했다. 명목은 유학이었지만 진짜 속내는 미식의 도시, 파리의 레스토랑에서 일을 배우는 것이었다. 비자를 취득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 있는 요리학교 르 꼬르동 블루에 입학했다. 하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지식보다 현장의 살아있는 경험이었다. 학교를 다녔지만 결석이 잦았던 탓에 졸업이 아닌 수료에 그쳤다. 학교에 있지 않은 시간에 서 셰프는 레스토랑에서 일을 했다. 매일 남들보다 20~30분 일찍 도착해 그날 무엇을 할지 생각했다. 먼저 생각하고 일을 시작하는 것과 도착해서 일을 준비하는 것은 출발점이 달랐다. 그리고 그 시간은 반드시 보상받게 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1995년, 뤼카스 카르통(Lucas carton) 레스토랑의 알랭 상드랑(Alain Senderens) 셰프가 신라호텔의 프로모션 셰프로 초청됐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프렌치를 경험하고 감탄을 했다. 그게 곧 유학의 계기가 됐지만, 만남이란 것이 삶에서 얼마나 소중한 가치를 안겨주는지 지금도 매일 경험하고 있다.  


“지금도 그 때 내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해요. 월급쟁이라는 수동적인 삶은 내가 꿈꾸던 요리사가 아니었거든요. 내가 한 요리에 대해 바로 피드백을 얻고, 변화시키는, 내가 주체가 되는 역동적인 삶. 그게 내가 바라던 삶이예요.”


서른 셋, 라미띠에
서른 셋이라는 이른 나이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 중심에는 라미띠에가 있었다. 타이밍이라고 해야 하나. 시대적 흐름이 잘 맞았고 무엇보다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라미띠에는 국내 최초의 원 테이블 레스토랑이지만 시작은 원 테이블이 아니었다. 파리에서 일했던 렉스큐즈(Restaurant L’excuse)(서 셰프가 일했던 렉스큐즈는 없어졌으며 본지에서 언급되고 있는 렉스큐즈는 현재 검색되고 있는 렉스큐즈와는 다르다.)라는 레스토랑을 한국에 옮겨놓고 싶었다. 처음엔 네 개의 테이블로 시작했다가 점점 테이블 수를 줄이고 음식의 질을 높였다. 요리에 자신만의 색을 담으려면 그만큼 자기가 일을 많이 해야 한다. 하지만 그 색깔이 독특할수록 소비층이 많지 않은 법이다. 오롯이 손님에게만 집중하기 위한 마음. 그게 서 셰프가 작은 레스토랑을 선택한 이유다.


“손님은 정직합니다. 말없이 떠나 발을 끊는 손님이 가장 어렵죠. 그 순간은 요리사가 알아요. 또 알아야 하고요. 이럴 땐 깊은 성찰을 통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음식은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결코 아니거든요. 음식은 진심이에요. 혼을 불어넣지 않으면 제대로 된 요리가 될 수 없어요.”


이태원의 구멍가게에서 시작된 레스토랑 서승호
경리단 길. 지금처럼 미식 거리로 번화하기 전, 서승호 레스토랑이 있던 곳은 조그마한 구멍가게와 세탁소가 자리 잡은 허름한 건물이었다. 일 년 넘게 비어있던 구멍가게였지만 서 셰프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고, 이후 4년 동안 애정으로 일궈온 원 테이블 프렌치 레스토랑 서승호가 됐다. 여든이 넘은 건물주 할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얼마 있지 않아 할머니도 돌아가셨는데 이후 건물주가 바뀌는 과정에서 투자한 돈을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나오게 됐다. 이곳을 떠나게 될 바에야 더는 미련이 남지 않았다. 그 길로 고향 조치원으로 내려와 2년 동안 건물을 하나씩 지어가며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창틀, 테이블, 소품 하나하나에 그의 공력이 들어갔다. 하우스, 정원, 건물 두 채가 나란히 이어져 서승호를 만들었다.


<(左) 비스트로 시옷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공간. 서리를 피해 화분이 줄지어 섰다.>

<(右)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 옹기 디자인 작업에 참여했던 작품들. 레스토랑 서승호에 들어서면 별실로 가는 길목에 전시돼 있다.>


지역적 한계를 넘어 가능성을 맛보다
서울을 미련 없이 떠났다지만 떨어져도 너무 떨어졌다. 정말 이 곳에서 원 테이블 레스토랑이 가능한가.
“파인 다이닝이 서울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게 불공평하지 않나요? 저는 이곳에 원 테이블 레스토랑을 옮겨와 지방에서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봤어요. 왕복 소요 시간이 4~5시간 정도 되지만 그럼에도 예약 문의가 꾸준해요.”
그도 그럴 것이 인터뷰 중간 중간 걸려오는 예약 전화가 인기를 짐작케 했다. 영업을 하는 날보다 하지 않는 날이 많아 문을 두드리는 손님에게 ‘오늘은 영업하지 않습니다.’라는 멘트를 상냥하게 건네는 모습이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간간히 들러 커피 한 모금 마시기 위해 기다림도 마다하지 않는 손님, 수확한 무화과와 인삼, 씨앗과 모종을 한 아름 가져다주는 마을 어른들이 그의 벗이고 선생님이다.
레스토랑의 뒤뜰에는 닭도 있고 개도 있고 칠면조도 있다. 매일 닭장에서 서너 개의 달걀을 꺼내는 재미도 쏠쏠하고 누가 오는지 미리 알려주는 개도, 식재료로 사용하고 남은 배를 쪼아 먹는 칠면조, 닭도 모두 가족이다. 여느 시골 마을처럼 정겨운 분위기가 연출 되는 이곳. 서승호 셰프의 원 테이블에 오르는 요리는 어떤 매력이 있어 사람들이 끊이질 않을까.



<원 테이블 레스토랑 서승호 내부. 가벽을 사이에 두고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과 식사 전 후, 차나 와인을 마시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뒀다.>


기억하지 않으면 발전이 없다
셰프 서승호의 요리는 크지 않다. 작지만 힘 있게 움직인다. 음식의 색, 첫 느낌이 화려하거나 임팩트 있지 않지만 한번 경험하면 잊히지 않아 다시 찾게 되는 게 매력이랄까. 그는 레스토랑을 처음 시작하던 1999년부터 줄곧 고객 정보를 관리하고 있다. 그 당시 식재료 구입 기록까지 남아있을 정도다. 이런 데이터를 바탕으로 손님의 성향과 레스토랑 방문 목적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짚어 낸다. 특히 손님이 오기 전 메뉴를 미리 정해놓는 법이 없다.
“손님이 오시면 3~5분 안에 어떤 메뉴를 할지 결정을 내려야 해요. 우선 전화예약을 통해 모임 성격과 정보, 가격대를 맞추고 나서 손님의 이전 경험이나 기록을 찾아요. 그리고 손님이 오셨을 때 제 경험을 토대로 판단하는데 이게 그동안 잘 적중했어요. 지금 손님의 감정, 컨디션이 중요하거든요.”
사실 원 테이블 레스토랑이 가지고 있는 색깔은 일반적이지 않다. 원 테이블이라는 프라이빗한 공간이 주는 의미도 있어 고객층도 확연히 구별된다. 이곳을 찾는 고객의 80% 이상이 기사를 동반해 차를 가지고 온다. 그래서 레스토랑 서승호는 문 앞까지 차가 인접할 수 있지만 빨리 빠져나가야 하는 곳에 있다.
“뮤지컬이나 영화를 관람할 때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되죠. 식사의 구성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지루하지 않게 강약을 조절해 중간 중간 즐거움의 요소를 만들어 넣어요. 가령 기업 간 계약이 성사돼야 한다면, 계약이 이뤄지는 식사 중간에 20분 정도 멈춰 있다가 다음 요리에 포인트를 줘 맛있게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죠. 우리는 신체 일부를 만족시키는 요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어요. 손님의 기대치를 넘어선 의외의 경험, 음식 외적으로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이 바로 그것이에요. 손님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요리도 연극이나 뮤지컬처럼 연출과 변화가 필요해요.”



<비스트로 시옷의 내부. 서승호 셰프의 책들이 ㄷ자 모양으로 빙 둘러져 있다. 건너편 주방은 작업실 겸 실습실로도 쓴다.>


천천히, 정확하게, 쉬지 않고
레스토랑 예약문화, 오너 셰프, 원 테이블 레스토랑, 부띠끄 레스토랑, 디저트 전문점, 커피, 치즈, 와인, 차와 음식의 마리아주... 서승호 셰프가 뿌린 씨앗이다. 씨앗을 퍼트렸으니 양분을 주고 더 크게 키우는 것은 후배들의 몫이다. 프랑스에 있을 적에 현장을 발로 뛰며 마르고 닳도록 공부한 흔적이 손 때 묻어 노랗게 변한 노트에 남아있다. 나만의 조리법이 생기고, 배우고 터득한 것을 한국에 돌아와 여러 사람과 나누기 시작했다. 소유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탓에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인심이 후한 편이다. 하지만 그러한들 내 것으로 만들려 노력하지 않으면 가져갈 수 없지 않은가. 재능 기부도, 제자 양성도 서 셰프의 이러한 철학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제자들이 더 높이 오르는 데 제가 디딤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다만 선배를 존중하고 겸손할 줄 아는 인성을 가진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서승호 셰프와 그의 제자들 (左)부터 이주연, 서승호 셰프, 김준형, 김지연>


정성과 노력의 집합체 도제식 교육
서승호 셰프의 공간을 기웃거리다가 키친에 도달했다. 한 학생이 열심히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는 서 셰프가 가르치고 있는 세 명의 제자 중 한사람이다. 군대에서 보낸 편지 한통으로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기 시작했는데, 제대 후 미국의 CIA 요리학교에서 재학하던 중 학업을 미루고 스승에게 도제식 교육을 받고 있다. 여기에서 먹고 자고 공부하기를 3주 남짓, 수면시간은 하루 2~3시간에 불과하지만 이제 어느 정도 프랑스 레시피를 알아볼 정도가 됐다. 수업료는 무료인데 학생을 아무나 받지는 않는다.
“학교는 학생을 교육시켜 현장으로 배출하죠. 저는 제자를 전문가로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혼자 배워 자기만 쓰는 것은 무의미해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을 가르치고 싶어요. 이곳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 배우고 가요. 될 때 까지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반복하지요. 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흐트러지지 않도록 잡아주고 싶어요.”
배우는 것도 에너지가 많이 소비된다며 체력보충을 위해 스승은 매일같이 제자의 밥상에 고기를 올리고 소꼬리를 고아 먹인다. 가능성에 확신을, 체력적 지원을, 동기부여를. 스승으로서 제자를 아끼는 마음이다.
“그것 참, 밑지는 장사 같은데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 중에서 수익이 안되는 일이 90%이지요.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예요. 하면 가치가 늘어납니다. 사람은 나이가 듦에 따라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저는 20대에 공부를, 30대에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일을 열심히 했고, 40대에는 가르치는 일에 최선을 다 했어요. 이제 50대에서 해야 할 몫이 마땅히 있다고 봐요. 오늘 새벽에는 된서리가 내렸답니다. 그래서 어제는 밖에 있는 화분을 들여놨어요.(마침 문을 열고 입구에 들어설 때 일렬로 줄지어 허브가 심어져 있는 화분을 본 기억이 났다.) 어제 그 일을 미뤘다면 아마 오늘 저 화초들은 얼어 죽었겠죠. 중요한 시기에 해야 할 것을 놓치지 않는 것. 소소하게 정원을 가꾸는 일도, 사람을 가꾸는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완급의 조절이 필요하지요.”


당부하건대,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임해야
프랑스는 1980~1990년대 음식문화가 융성했다. 일본은 1990년대에, 미국은 2000년대 초반에 그랬다. 우리나라는 2010년부터 2012년 사이 음식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지금은 먹는 즐거움을 찾기에 이르기까지 요리의 사회적 관심이 높다. 하지만 유행은 지나가기 마련이다.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셰프는 사회적 현상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가야 한다. 다시 말해, 불이 붙는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이기도 하다. 새로운 유행이 생기면 이내 사그러들고 만다. 이 신호를 놓치지 말고 준비를 해야 한다. 좋은 방향으로 변화가 일어야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좋은 생각을 가지고 음식을 만들면 원하는 결과를 얻지 않을까? 
“좋은 생각이란 게 참 모호하지 않나요?”
“농부가 정성껏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어 맛있는 배추를 수확했다고 가정해봅시다. 부자에게든, 가난한 사람에게든 이 배추는 맛있는 배추 그대로이지요. 셰프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위치에 있든, 무엇을 하든, 좋은 생각으로 한다면 좋은 영향력을 낳게 돼 있어요. 저는 이런 현상들이 결코 희화화 되는 것을 원치 않아요. 사회 현상은 주기가 있어 돌고 돌지요. 좋은 것은 그만큼 오래 갈 것입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스타 셰프, 조엘 로부숑(Joël Robuchon)은 차갑고 냉정하기로 유명하다. 은퇴 전 레스토랑 Jamin은 그런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은퇴 후에 만난 조엘 로부숑은 아이를 대하듯 따뜻한 손길로 요리사들을 격려해줬다.
20년 전, 조엘 로부숑이 스치듯 내게 말을 건낸 적이 있다. “어디에서 왔습니까?” “힘내십시오.” 이 두 마디가 내 마음에 따뜻하게 닿아 지금껏 내 인생을 이끌었다. 사람, 인연은 그래서 소중하다. 
(셰프 조엘 로부숑은 1996년 은퇴 후, 아뜰리에 드 조엘 로부숑(L’atelier de Joël Robuchon)으로 2003년 복귀했다.)


Epilogue#

오너 셰프인데, 레스토랑 문에는 ‘closed’가 심심찮게 걸린다. 농부, 그 시간 셰프는 손님상에 올릴 채소를 얻기 위해 밭에 나가서 모종을 심고 가꾸고 수확한다. 양봉인, 레스토랑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나무 데크에는 벌통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60 군데 이상 벌침에 쏘여가며 수확한 꿀은 감히 가격을 책정할 수도 없다. 요리에 쓰일 이 꿀은 벌들이 주변의 꽃에서 채취한 순수한 꿀이다. 선생님, ㄷ자 모양의 서재에는 책들이 빼곡히 쌓여 있고 집필하다 만 원고들도 눈에 띈다. 불이 환히 켜 있는 주방에서는 끊임없이 식재료가 오가며, 선생님을 부르는 제자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레스토랑인데 연구실 같기도 하고 도서관 같기도 한. 이곳 주인장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서승호 셰프. 사실 그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은 십 수 년도 더 된 일이다. 누구나 꿈꾸는 이상적인 삶을 사는, 그래서 뭇 셰프들이 꿈꾸지만 감히 시도해보지 못한, 그는 그런 삶을 살고 있다. 셰프들 사이에서 늘 회자되었지만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어느 행사장에서 우연찮게 만나 일단 섭외를 해 놓고, 내친 김에 만나러 갈 채비를 꾸렸다. 독자들에게 그의 일상을 더 자세히 전하고 싶어 욕심을 냈다. “양봉하시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고 싶은데요.” 두말없이 벌집 뚜껑을 열어 보이는 서 셰프에게 벌침 공격이 이어졌다. 앗! 그의 눈꺼풀이 발갛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괜한 욕심이 화를 자초했나보다. 눈꺼풀에 박힌 벌침을 빼고 급히 촬영을 마무리했지만 미안한 마음을 지울 길이 없다. 이제 좀 나아졌을까. 발갛게 부은 눈에 환한 웃음을 지어 떠나는 이들을 애써 안심시켜준 서승호 셰프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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