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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9 (금)

레스토랑&컬리너리

[Dining Veteran_ 300호 특집] 조리인생 48년, 조리업계의 산증인 - 조리인생 48년, 조리업계의 산증인


올해로 조리인생 48년을 맞이한 이상정 대한민국조리명장. 그의 기억 속에는 호텔의 역사와 조리의 역사가 오롯이 담겨있다.
접시닦이에서 시작해 총주방장, 대학원장 그리고 대한민국 명장까지.
스타 셰프의 시대, 그는 셰프들의 스타 셰프다.

취재 서현진 기자 | 사진 조무경 팀장


밥도 주고 돈도 주니 신나는 직업
1968년 중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에 와서 충무로에 있는 양식당 ‘삼호그릴’에서 요리를 시작했습니다. 장남에 장손이라 공부를 해야한다는 부모님께 끌려 다시 집으로 갔지만 3개월 만에 다시 요리에 손이 갔습니다. 식당에서는 밥도 주고 돈도 줘서 더욱 신났습니다. 당시 월급도 무려 1500원이었으니 신나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후 군대에 갔는데 신체검사하니 방위가 나와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해병대에 지원해 운전병으로 갔습니다. 그때 요리가 재미있기도 했지만 사실 저의 꿈은 택시기사여서 또 좋았습니다. 당시에는 택시기사가 최고의 인기 직업이었습니다. 그 후 요리사였던 제 경력으로 부사단장 공관에서 조리병으로 일하게 됐고 제대 후 1975년 당시 서울에 몇 안되는 특 1급 호텔이었던 프라자 호텔에 입사했습니다. “요리사는 크려면 호텔로 가야한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요리사는 크려면 호텔로 가야지
2년 후 그랜드 하얏트 호텔, 프랑스 식당 ‘휴고’의 오픈 멤버로 합류, 2년간 책임자 역할을 했습니다. 그때 영어 공부를 참 열심히 했습니다. 신라, 롯데호텔보다 먼저 생긴 호텔이었고 인터내셔널 호텔 체인이었기에 외국인들이 많았는데 영어를 할 줄 아는 셰프가 별로 없었습니다. 제가 또 영어를 할 줄 아니 영어 못하는 셰프들보다 실력을 인정받아 1년에 두 단계씩 초고속 승진하기도 했습니다. 레스토랑도 웨이팅 고객들이 2~3m씩 줄을 설 정도로 인기가 높아 사회적으로 유명해지고 회사에서도 모범 사원으로 뽑혀 해외 연수도 많이 다녀왔습니다.


그래, 바로 이것이 내 직업이야
이때 직업에 대한 확신이 들었습니다.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이 셰프’라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그래서 더 넓은 쪽으로 눈을 돌려 요리 자격증 심사를 많이 했으며 요리학교 원장들을 모아 자격증 준비에 대한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뉴월드 호텔에 스카우트됐다가 1년 만에 스위스 그랜드 호텔, 지금의 그랜드 힐튼에 부장으로 가게 됐습니다. 1987년 당시 역시 셰프들이 영어가 부족해 제가 통역을 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이때, “진정한 셰프는 무엇인가”라는 고민에 빠지게 됐습니다. 그리고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에 조리부장을 하면서 방송통신고등학교, 경희호전을 졸업하게 됐습니다.
지금이야 국내외 요리대회가 많아 참가도, 수상도 많이 하지만 당시에는 불모지나 다름없던 이 분야에서, 1991년 제1회 서울 인터살롱 요리경연대회 금상 수상을 시작으로 1992년 제8회 FHA 국제 살롱요리경연대회 금상 수상, 1992년 독일요리올림픽 금상 수상, 1997년 제13회 FHA 국제 살롱요리경연대회 동상 수상 등 50여 개의 국내외 조리경연대회마다 상을 휩쓸며 많이 알려지게 됐습니다.
또 외국인 총주방장이 일색이던 호텔 주방에, 특급호텔에서 제가 맡고 있던 조리부장인 내국인 중에서 제일 높은 직급이었습니다. 이때부터 후배들을 이끌어주기 위해 KCC(한국총주방장회)를 특급호텔 셰프들과 함께 조직하고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1994년 리츠 칼튼 호텔의 조리부장을 맡으면서 LTB(외국인총주방장회)에도 함께 참여했습니다.


항상 공부하는 셰프가 발전한다
그때 제가 후배들에게 제일 많이 한 말이, “항상 공부해야 셰프가 발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몸소 실천하고자 청운대 정보산업대학원에서 호텔관광외식경영 석사학위와 경기대 관광전문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그리고 조리기능장 자격증을 취득했으며 후에 조리기능장회장까지 역임했습니다.
2000년 메리어트호텔 총주방장으로 오픈 때부터 참여했는데 처음에는 고속터미널이라는 위치적 장점에도 매출에 고전을 하다 3년 만에 정상 괘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002년 대한민국 조리명장 3호로 선정됐습니다. 명장(名匠)이라는 칭호는 특정 부문의 기능인 중에서 가장 높은 성취를 이룬 이들에게만 선별적으로 주어지는 영예로 지금 조리부문의 명장에 선정된 이는 현재 6인에 불과합니다.
대한민국 명장에 선정되니 학교에서 러브콜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2004년 영산대 교수로 학생들을 꾸준히 대회에 참가시켰고 서정대를 거쳐 청운대로 옮겨 대학원장까지 지내게 됐습니다. 제가 가르친 학생들은 지금 40여 개 학교에서 대학교수를 하고 있고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 유명 호텔과 레스토랑 대부분에 제자를 두고 있습니다.


가가호호 방문하며 사죄했다
기억나는 에피소드라....우선 ‘초짜’ 시절인 1975년 프라자호텔 주방팀 근무 당시 선배들이 예비군훈련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갑자기 청와대 칵테일파티 출장 명령을 받았지만 무리없이 치러낸 것도 기억에 많이 남고, 장관 부부 6쌍이 우리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모두 배탈이 난 일도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여름에 치즈가 많이 들어간 음식을 먹고 찬물을 마시면 안 되는데, 그걸 몰라 배탈이 난 것입니다. 정계 고위층 인사가 탈이 났으니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요리를 아무리 위생적으로 만들어도 요리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안된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낀 사건이었고 이후 공부를 통해 시즌 메뉴를 구성,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셰프도 셰프지만 홀의 매니저도 레스토랑에 근무한다면 지식이 있어야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리츠 칼튼 근무 당시 추석 연휴가 길어 코스트를 절감하기 위해 시장에서 소라를 많이 구매했는데 이후 뷔페업장에서 식사한 1000여 명 중 소라를 먹고 30여 명이 배탈이 나 가가호호 방문해 일일이 사죄했던 기억이 지금까지도 생생합니다. 그 때만 해도 인정이 있어 오히려 저의 방문을 고마워하시며 저희 레스토랑에 단골 고객이 되셨던 분들도 많습니다.


거짓말과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세계
오랫동안 조리업계에 있다보니 멸치만으로도 40가지 요리를 순식간에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노하우를 전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시푸드 뷔페 레스토랑 ‘스카이온’, ‘무스쿠스’, ‘마키노차야’ 등에 노하우를 전수했으며 정영도 명장과 함께 ‘비바루체’에서 태평염전의 천일염만으로 맛을 낸 300여 가지의 뷔페 요리를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요리에는 정성이 가장 중요합니다. 물도 잘 끓이면 맛이 있지만 설 끓이면 맛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리는 지극한 정성으로 빚어낸 종합예술이자, 절대로 거짓말과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세계입니다. 내가, 내 가족이 먹을 요리를 남에게 주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정성껏, 즐겁게 만들어야 합니다.


스타 셰프 길러내는 교수
요즘 스타 셰프들이 많습니다. 저는 스타 셰프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타 셰프를 많이 배출해야합니다. ‘제빵왕 김탁구’로 제과제빵을 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었던 것처럼 지금은 요리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우려하는 이들도 많지만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순 없습니다. 셰프가 많아지면 셰프의 길 또한 많아지게 됩니다. 셰프를 길러내는 교수가 될 수도, 셰프를 채용하는 경영인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학교에 있는 한 실력 있는 스타 셰프를 키워내는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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